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경 Jan 29. 2023

귀신의 시간에 난 거실에 앉아 있었지 (2)

강해진다는 ‘진짜’ 의미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으로서 내 생의 최초 한계는 부모로부터의 가난이었다. 가난이란 소재의 서사는 익숙하고 지루한 데다 각각의 고유성을 담고 있어 생경하기까지 하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듣고 싶기도, 듣고 싶지 않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굳이 언급해야겠다.     


여중 1학년 교실, 보통 두 명에서 많게는 8명까지 모여 깔깔 웃으며 도시락을 먹는 다정한 점심시간의 풍경. 하지만 나와 내 짝꿍은 각자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조용히 자신의 도시락을 먹었다. 그녀는 내가 도시락 뚜껑을 열 때마다 반찬을 힐끗 훔쳐보았고, 당시 어지러운 가정환경을 감안했을 때 도시락을 가지고 등교를 할 수 있다는 것과 내가 직접 싸지 않아도 됐던 자애로운 가족의 수고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마음이었다. 1학기 중간고사를 마칠 즈음 그녀는 내게 말했다.

“너와 점심은 함께 먹지 않을래.”     


우리는 제 자리에 앉은 채 각자의 도시락을 먹었을 뿐이다. 나는 매일 다채롭고 풍요로운 그녀의 반찬을 누가 될까 하여 먹지 않았으며, 그녀는 간혹 나의 볶은 김치에만 손을 댔다. 나의 도시락 반찬은 언제나 변함없이 볶은 김치였다. 밥을 먹으며 서로 평소처럼 자잘한 대화를 간혹 나누었다.

나는 대답 대신 ‘함께 먹지 않을래. ‘의 진의를 파악하려 애썼다. 나의 반찬을 더 이상 먹지 않겠다는 선언인가? 식사할 동안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녀가 다른 자리로 옮겨 다른 친구와 먹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먹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숭숭한 나에게 그녀가 이어 말했다.

“점심시간의 너는 좀 창피하거든.”

     

그제야 나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점심시간의 너는 좀 창피하거든.”이라고 말한 그녀에게 덤덤히 말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나를 창피해하는 너니까 네가 나를 피해야겠네. 나의 가난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나는 항상 하던 대로 내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을게. 내 자신이나 가정환경을 창피하게 생각한 적이 없으니 앞으로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야. 너도 너 원하는 대로 하면 돼.”

    

가난은 늘 이런 식이다. 쏟아붓는 소나기처럼 나의 사정 따윈 봐주지 않는다. 가엾은 나를 어딘가 숨길 사이도 없이 젖은 머리와 젖은 옷, 그로 인해 내 빈약한 전신에 비참한 빗물이 타고 흐르도록 만든다. 맞지 않아도 됐을 소나기를 거듭, 거듭, 거듭 만나왔다. 미성년인 나는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포기하거나 낮추어 보고 싶지 않았고 계속해서 나를 추슬렀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려, 오히려 강해지려면 어떡해야 할까? 어린 나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1. 가난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2. 무엇도 원망하지 않는다

3. 스스로 마음의 상처를 돌본다

4. 문자로 된 것으로 배우고 익힌다


다행히 학년이 오를수록 어느 정도 초연할 수 있었다. 곧 가난은 다소 불편할 불쾌감을 남길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들은 공통점이 있다. 넘어서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은 단순히 버티기 위함이 아니다. 단순히 버티기만 한다면 더 나은 나를 만나기 어렵다. 더 나은 나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약속한 듯이 나타나지 않는다. 책으로 배우든, 타인에게 배우든 무언가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관심 어린 학습이 필요하고 학습한 후 내 것으로 체득해야만 한다. 가난으로부터 강해지기 위해 내가 알고 싶고, 갖추고 싶었던 것은 높은 수준의 아비투스였다. 기품 있는 선생님, 선배, 친구와의 속 깊은 대화는 내게 유일하고도 소중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유의미한 존재가 되어갔다.


여고 2학년 이과반 교실, 쉬는 시간에 문과반 장난꾸러기 친구가 와서 말을 걸었다. 마침 심심했던 나는 그녀에게 연습장과 빨간 볼펜을 가지고 오라고 했고 가지고 온 그녀에게 내 자리에 앉으라 했다. 앉은 그녀에게 연습장에 볼펜으로 자유롭게 선으로 된 낙서를 하라고 했다. 그녀는 마구 엉킨 부드럽고 의미 없는 선을 그었다. 나는 고심하는 척 팔짱을 끼고 한쪽 발을 살짝 사선으로 디딘 채 눈으로 선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지나치게 명랑해. 하지만 마음이 비어있지. 집에 돌아가 우울감을 느끼곤 하는구나. 진정한 친구와의 깊이는 대화를 하고 싶어 해.”

그녀는 여기까지 듣고 하얀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았다.

“넌 어떻게 그걸 알아? “

“어렵지 않아. 네가 그린 선을 보고 의미를 읽었을 뿐이야.”

그녀는 돌아갔고, 점심을 먹은 후 문과반 친구들 한 무리를 이끌고 다시 나타났다. 그 무리들은 하나같이 연습장과 빨간 볼펜을 들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그녀들을 돌려보내며 생각했다.

‘이런 멍청이!! 사기꾼이 될뻔했잖아!‘

연습장과 빨간 볼펜, 분위기라는 장치만으로도 인지의 오류가 일어난다. 그녀와 나는 이미 서로에 대해 많은 대화를 했었고 나는 다만 알고 있었던 것을 말했을 뿐이다. 장치와 분위기에 속지 않고 본질을 알아채는 것은 내가 외부의 요인에 흔들리지 않게 되는 근원적인 힘, 선천적인 강함이다.


나는 이 장에서 계속해서 한 가지를 말하고 있다. 강해지는 진짜 의미이다.

나에게 있어 강해진다는 것은 과잉, 과다, 최고, 최다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오히려 간과하기 쉬운 것, 속에 싸인 것, 연약한 것, 따뜻한 것, 유연한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딱딱하고 견고한 껍데기가 아닌 말캉한 알맹이, 그것이 강함의 본질이다.

삶 속에서 강해진 내가 더욱 강해질 기회는 거듭 주어진다. 각자의 선택의 몫이겠지만 맞서고 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항상 여겨왔다. 그것의 결과가 일보 전진이든 퇴보이든 그 어떤 것에도 알맹이는 남는다고 경험에 의해 말할 수 있다. 아무튼 해보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는 항상 낫다는 것이다, 결과를 두고 너무 참담해하며 나머지 여생을 의미 없이 여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한 낙관론자가 나에게 눈을 뜨고 세상을, 쏟아지는 햇빛 속의 산을, 골짜기를, 강물을, 식물을, 동물을, 기타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세상은 요지경 속이 아닌가? 이런 것들은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지만 그것으로 존재하기란 완전히 다른 일이다.

― 『인생론 Aphorismen zur Lebensweisheit』


갑가지 내리는 소나기처럼 류머티즘이 내게 왔을 때 나는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댔다. 두 아이의 육아로 바닥난 체력과 흐려진 판단력이 더해져 강해지기는 커녕 완전한 패배자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이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말캉하고 따뜻하며 다정히도 아름답지만 그것으로 존재하기란 완전히 다른 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귀신의 시간에 난 거실에 앉아 있었지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