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용서에 관하여, 밀양(2007)
완전히 ‘꽂힌 사람’을 우리는 제정신 아닌 ‘미치광이’라고 부른다. ‘정상’ 범위 내에 있는 다수의 이들은 특정한 무엇인가에 편중한 상태를 꺼리거나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예술이나 문화는 완전히 꽂혀버린 사람들의 산물이다. 예술가적 기질이라 불리는 고약함 역시 꽂힌 사람 아니고서는 어림도 없다. 오랫동안 나는 꽂힌 사람들에게 꽂혀 있었다. 어렸을 때도, 중년의 지금에도 나는 꽂힌 사람들의 행위를, 그 결과로써의 반짝임을 아끼고 탐색하곤 하는데 최근 ‘밀양’을 다시 보기로 보았다.
많은 비늘에 덮여 있는 영화 ‘밀양(2007)’, 당신의 밀양은 어떤 식으로 소화되었는지 몹시 궁금하다.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안에 담긴 서사와 섬세한 흐름을 담담히 따라가다 마침내 나는 오랫동안 불편했던 내 옆구리 의식에 불이 지펴졌다. 신앙심과 삶의 본질, 용서와 사랑의 의미, 신과 인간, 종교인으로서의 인간과 비종교인으로서의 인간, 혹은 기독교와 불교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기독교인인가 불교인인가?’ 묻는다면 종교인이라 답할 것이다. 태어난 이후 줄곧, 삶의 의미에 대해서 의문을 지니고 있고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는 방편이 곧 종교다. 이 글을 통해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 용서는 글의 결론부에 두기로 하고 그보다 먼저 나의 종교인으로서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적고자 한다. 이 글을 쓰는 나란 인간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 끝에 닿게 되는 ‘용서’가 보다 의미 있기에.
나는 중학생 때부터 옆마을에 있는 교회에 다녔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 침례를 받았고, 고등학생 때에는 교육부장과 총무를 맡았었다. 이성교제나 온갖 세상 것에 그리 관심이 없었던 나는 교리에 집중했고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홀로 기도했다. 배고프고 불안한 시기였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던 이유다. 대학에 진학하며 고향과 교회를 떠났다. 다시 교회를 다닐 기회가 있었으나 (침례교회가 아닌) 개신교회였고, 이끄는 목사는 정치색이 무척 강한 데다 물욕 또한 많은 인물이었다.
“우리 교회에 왜 아직도 헌금 바구니가 있는지 아십니까? 혹시 헌금 바구니에 헌금을 넣다 끼고 있던 헐거워진 금반지가 바구니에 떨어지는 역사가 이루 질까 해서입니다.”라고 그가 말하자 신도들이 소리 내어 웃으며 “아멘!” 하던 모습을 끝으로 다시 교회에 가지 않았다.
시절인연으로 이른바 마음공부를 시작했을 때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을 독했다. 아득하니 먼 곳을 가리키는 거대한 막대의 한 부분을 눈을 가린 채 손으로 더듬듯 어리석고도 답 없는 인연을 이어가는 중 첫 번째 꿈을 꾸었다.
심야의 어둠을 지닌 하늘이 땅과 가깝게 내려앉아 있었고 지상에는 모든 것이 타버린 뒤 빨갛게 이글거리는 알불이 듬성듬성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간신히 어렵게 뜬 눈에 느껴지는 지상의 열기와 알 수 없는 공포감에 바짝 엎드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펑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이 터진 것인가 보려 해도 열기와 연기에 눈을 바로 뜰 수 없었다. 보이진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은 인간의 육신이 외부의 커다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끔찍하도록 크게 천둥처럼 울리는 소리, “주여!!!”라는 누군가의 외침을 들으며 잠에서 깨었다.
그 후 몇 년 뒤 두 번째의 꿈을 꾼다.
고향의 작은 교회는 가파른 언덕 위에 높고 뾰족한 지붕을 얹은 전형적인 침례교회 모습을 지녔다. 경사의 단차를 이용해 중고등학생부와 성인의 예배를 위한 예배당은 가장 놓은 곳에, 그 아랫단에는 어린이 주일학교 예배를 위한 기도실을 배치했다. 기도실을 끼고 오른쪽으로 통하는 좁고 작은 샛길은 산 쪽으로 향했고, 기도실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면 마을로 통하는 넓은 신작로가 이어졌다. 꿈에서 나는 불 꺼진 기도실,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몸을 덜덜 떨며 기도를 하다 몸을 내리누르는 힘을 느껴 큰 공포감에 기도실을 빠져나와 산으로 이어지는 샛길로 도망쳤다.
홀로 하는 ‘마음공부’는 30대 중반 책으로 시작해 최근 유튜브로 이어지고 있었다. 온라인은 이제 감춤이나 검열 없이 모든 정보가 열렸으며 확장되었다. 정보에 접근하는 안목을 갖추기만 한다면 접속하는 즉시 높은 경지의 스승을 만날 수 있는 세상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깊이 잠겨 있을 즈음, 몇 해 전 꾸었던 세 번째 꿈, 이 꿈은 마지막 꿈일까?
이번에도 고향의 작은 교회, 기도실이다. 나는 무슨 일인지 그곳에서 내 옷과 소지품을 챙기고 있었다. 조금 분주했지만 두렵거나 공포감은 없었다. 보잘것없는 물품을 담다 보니 속옷도 얼핏 보인다. 지퍼를 잠글 사이도 없이 허당처럼 성근 마음으로 산으로 향하는 샛길을 이용해 기도실을 벗어났다.
꿈에서의 내가 기도실을 벗어나 산으로 가는 샛길을 향하는 것은 사실과 같다. 내가 살던 마을과 교회가 위치한 마을은 산을 사이에 두고 있어 귀갓길은 언제나 좁은 산고랑을 타고 산고개를 넘어야 했다. 대개 수요일 밤 예배를 드리는 날은 홀로 집에 돌아가야 했는데 발에 밟히는 나뭇잎의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고요한 무덤, 또 무덤, 성경과 찬송가를 꼭 끌어안고 열네 살의 나는 끝도 없이 실로암을 부르며 걸었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와 하나님의 동행은 이렇게 여기까지이며, 또한 여기서부터의 새로운 시작이다.
영화 밀양을 덮고 있는 수많은 비늘 중 나는 어머니로서 신애와 신도로서의 신애가 맞닿는 지점, 용서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아들을 잃은 신애가 절망에서 벗어나 밝게 웃을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회계하고 은혜를 받음으로 가능해진다. 수감 중인 아들의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한 후 찾아간 신애, 정작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 회계하고 마침내 구원을 받았다는 평온한 미소의 그를 만나고 난 후 다시 지옥에 갇힌 채 이렇게 고백한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데,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데...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신애가 바랐던 완벽한 용서는 어떤 것일까? 죄수복 차림의 상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일까?
“하나님을 만나 거듭 태어난 ’ 내가‘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겠다.”
또한 그에게서 신애가 보고 싶었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고개도 들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상대가 신애의 용서를 받고 깊은 감동과 회한의 눈물을 보이는 것, 그런 것이었을까?
죄와 벌은 스스로의 몫이며, 용서는 아무 일없던 본디의 바로 그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대상과 주체가 없고 그러므로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단 자신이 꽂혀있는 그 원망의 한 점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 지점에 머물러 있다면 무엇보다 자신이 자신을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죽이는 것과 같으므로 자신을 돌보고 괴로운 그 지점을 고집하거나 머물지 말 일이다. 무엇을 방편으로 삼든 상관없이 용서의 대상을 향해 자신이 몰입된 모든 괴로운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결국 용서이다. 사안이 크면 클수록, 서사가 깊으면 깊을수록 단번에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괴로운 원망의 마음이 일어나면 다시금 벗어나고, 거듭하다 보면 저절로 흐르는 시간 속에, 성실히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 속에, 변함없이 곁에 있는 소중한 인연 속에 잊힐 것이다.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선언적 용서가 형식면에서 완벽하지만 스스로의 내적 결핍을 해결하지 않고서 행해지는 선언이 무슨 의미인가? 완전히 벗어난 사람에게는 ‘용서한다’라는 말조차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마침내 신애는 자신의 집 마당, 스스로 한줄기 빛 속 거울 앞에서 머리를 자른다. 신애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듯 지난 일에 대한 관념을 끊어내는 것, 그것이 용서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용서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