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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컵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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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경 Dec 29. 2023

현대 야사(野史)

(4) 우리의 기도

깊은 밤 홀로 우는 그대여 그대 눈물을 내가 아노라

그대 눈물은 가슴을 적시고 발을 적시고 땅 위에 내린다

그대 아픔을 내가 같이 하노라

그대 슬픔에 내가 기쁨 주리라

그대 눈물을 내가 다 마시노라

깊은 밤 홀로 기도하는 그대여 그대 기도를 내가 듣노라

-기도하는 그대여/김용진 시, 이정림 곡-     


나의 슬픔은 인간관계나 물질적 빈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아주 무관하다 할 수 없지만 정작 내가 끝없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쓸쓸함, 크기가 가늠되지 않는 내 안의 비어있는 공간이었다. 마음의 공간이 느껴질 때마다 그 누군가의 함께함이 간절해지곤 했다. ‘기도하는 그대여’는 어린 내가 고독감이 깃들 때 많이 듣고, 퍽 많이 읊조리던 성가다.     


지금 다시 새겨들어보니 가사가 참으로 든든하고도 품이 크다.

가사의 주체 즉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와 눈물을 알고 함께 하니 시제는 현재진행형이다. 그에 비해 우리의 슬픔 끝에 주어질 기쁨에 관한 ‘하나님’의 언약은 막연한 미래형이다.    

  

전지전능한 그분의 큰 테두리 안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우리의 슬픔과 ‘하나님’ 은총으로서의 기쁨이 자리한 시제(時制)의 의미를 알 것이다.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선의를 기반으로 성실해야 한다. 또한 시선을 두어야 할 곳은 바로 지금, 현재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이 슬픔이든 고독이든 절망이든, 그 무엇이든 오롯이 현재진행형으로 겪어내야만 한다. 현재의 견딤이 훗날 기쁨이 되리라는 약속은 막연함으로 무장하므로 위력을 지닌다. 현재를 겪는 동안 약속된 기쁨이 ‘특정한 어느 날’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날을 염두에 두므로 현재에 오롯이 담기기 어렵다.

나의 선의와 타인의 선의가 합쳐져 만들어질 변수에 의해 약속된 기쁨은 빨리 다가올 수도, 더디 다가올 수도, 아니면 영 없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먼 훗날의 기쁨보다 현재의 삶 그 자체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로 인해 내 눈물의 깊이를 알며 나를 듣고 있고 또한 나와 완전한 하나로써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위로다. 기도로 더욱 깊이 접촉되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으므로 오히려 더 확실히 나와 함께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두운 기도실에 놓인 차갑고 폭신한 겨울 방석 위에 무릎 꿇고 앉아 마음을 담아 기도할 때 느껴지는 ‘하나님’과의 충만한 일체감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로써 외롭지 않으므로 따뜻한 마음을 내고 여유를 가졌으며 입가에 미소를 띨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기도는 외로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누군가의 절대적인 힘을 빌려 본인의 현재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다. 매 순간 다가오는 현재의 삶, 시간이 흐르고 과거가 되는 그 삶의 결과로 결국 받게 되는 많은 과제와 성과는 누군가 조작할 수도, 무엇으로 대치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내 삶의 흐름을 두고 누군가를 원망할 일도,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일도 아니다.      


요즘에도 나는 종종 마음으로 기도한다. 누군가를 축복할 때, 말로 전하는 위로가 충분치 않을 때 기도한다. 소리 없이 많은 것을, 많은 사람을, 많은 상황을 축복하며 위로한다. 내 마음속 정서의 기저에선 이미 축복과 위로 잔치이지만 역시 특별히 축복이나 위로를 담은 기도가 필요한 때가,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다.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 그 밖의 인간 세상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 유용한 것에 대해 기도를 해본 적이 없다. 합격이나 승진이 간절한 타인을 위한 축복은 해보았으나 나 자신의 합격이나 승진을 위한 기도는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할 때는 마음이 어지럽거나 요동칠 때이다. 구체적인 언어로 풀어내기가 내키지 않으므로 최근에는 명상이나 만트라를 듣거나 암송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구체적인 어떤 것이나 상태를 구하지 않고 다만 내 삶을 충실히 계속할 수 있도록 평평한 마음이 새로이 다가오길 기도하며 기다린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역시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사랑이 나에게서 발현된다. 그 사랑은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순수하고 따뜻하며 무한하다.

아이들을 위한 기도라 해서 별다르진 않다. 아이들의 마음이 요동칠 때 그 마음이 다시 평온해지길 기도한다. 그들이 너무 뜨겁거나 차가워지지 않고 평상심을 되찾길 기도하며 기다린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은 나뭇가지에 앉은 새처럼 내 품에서 노닌다.

내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이다. 너무 기쁘지도 너무 절망스럽지도 않은 가운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관통해 충실히 살아가는 것, 그럴 수 있도록 도우며, 기다리고, 기회를 준다. 그 아이들이 이젠 자신의 삶을 주관하며 탐색 가능해진 시기,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기적과도 같이 감사한 일이다.      


가장 가치롭게 여겨 마음에 새겨둔 성어가 ‘인생사 새옹지마’이다. 여유를 가지고 진심으로 살아가다 보면 어느덧 좋은 기회가 다가오며 작은 인연이 큰 인연을 이루며 더욱 안정적인 삶을 누리게 된다. 나는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에 구체적인 몫으로 기도하지 못한다. 구체적인 어느 것을 염원하기엔 우리의 인생이 크고 넓으며 또한 유한하다.     


나는 보다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한다. 또한 나를 위한 기도는 언제나 내 평평한 마음에 관한 것이다. 마음이 평평해지면 외로움마저 자유롭다. 나는 자유롭고 그것으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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