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잇는 연료

by 홍경

토요일 새벽에 눈을 떠 커튼을 걷고 고요한 세상을 본다.

허기를 느끼고 부엌으로 가 상부장을 열고 하나 남은 봉지 라면을 집어 내린다. 봉지의 옆구리를 길게 뜯고 열린 사이로 허연색의 면을 끄집어낸다. 마치 살아있는 짐승의 내장을 꺼내듯 신중하게. 바닥에 허연 면의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곤란하다. 치우기 위해 몇 번이고 거듭해서 허리를 숙여야 한다. 사각 스테인리스 용기에 딱딱한 면을 담는다. 분말 수프의 냄새를 맡으니 이내 입에 침이 고인다.

이 세상 모든 생라면의 면은 식감이 다르다. 어떤 놈은 오도독하며 쉽사리 씹혀 고소하면서도 분말 수프와 함께 어우러진 연한 여운을 남기는가 하면, 어떤 놈은 으드득거리며 입안에서 녹아들지 않고 치아와 잇몸, 입천장을 괴롭히려는 듯 거칠게 굴러다닌다.

생라면을 입에 넣고 씹는다. 나쁘지 않은 식감이다. 분말 수프를 더 흩뿌려도 좀처럼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른 새벽엔 미각이 제일 늦게 깨어난다. 어쩔 수 없이 식감만으로 먹는다.

소파의 스마트폰이 진동한다.

미옥 씨의 전화.

“안아, 심안아, 한심한!”

스피커폰으로 울리는 목소리. 역시 내 이름을 대충 발음한다. 발음에 성의를 보이는 것이 사랑이지 싶은데.

“어, 엄마.”

대답하고 생라면을 씹는다. 오도독.

“야, 너 생라 먹어?”

생라면을 '생라'라 부르는 것도 거슬린다. 줄여 부르지 말라고, 제발.

“응, 아니야.”

“너는 진짜 왜 그렇게 라면을 생으로 먹고 그래?”

“용꼰몬 곤똔히!”

생라면을 다시 집어 들어 입에 물며 어눌하게 말한다.

“다음 주가 엄마 생일 주간인 것, 알지? 한번 와. 어떻게 그렇게 한 번을 안 오니? 명절도 그렇고. “

”상황 봐서, 갈게. “

”어, 그래. 그럼 오는 것으로 알게. “

”아니, 상황 봐서 간…“

말도 끝나지 않았는데 엄마가 전화기를 귀에서 떼어내며 아버지에게 신난 듯 외치는 소리,

”한심한 아버님! 한심한 따님이 집에 오신다네욧! “


오전에 도착한 백화점. 1층 매장부터 돌아본다. 사랑스러운 미옥 씨의 선물은 무엇이 좋을까?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결정되지 않는 '무엇'을 구매하기 위해 쇼핑을 한다는 것은 거침없이 외로운 행위이다. 선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립스틱이 좋을까? 향수? 그렇게 끌리지 않는다. 선물은 받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결정은 주는 사람의 몫이다. 두 사람의 일치된 취향이나 공감 능력 혹은 전적으로 주는 사람이 섬세함에 기댄 눈 가리고 하는 게임이다. 매장 2층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얹는다.

이동하며 시간을 확인한다. 오늘은 류의 보호자 이한과 통화해야 한다. 류는 성적이 좋고 예체능에도 소질이 있는 학생이다. 호감형 외모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 아직 고1. 성인의 용모가 완성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지만, 확실히 외모상으로는 또래 아이들에게도 호감을 얻기 충분하다. 류는 대개 침착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극받으면 흥분하기 쉽고 간혹 포악해지기도 한다. 지난주, 류의 단짝 친구 하루가 류를 자극해 담임인 나로선 귀찮은 일이 생겼다.

“야, 이류! 네 형은 일류야? 동생은 삼류겠네?” 하루가 낄낄거리며 말했고, “저 새끼가!” 류는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스마트 패드를 하루에게 던져 버렸다. 다행히 하루가 피해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스마트 패드 액정이 깨졌다.

류의 스마트 패드 파손 건에 대해 알리려고 보호자 연락처로 몇 번 통화를 시도했지만 받지 않았다. 중한 일은 아니지만 처리되지 않고 미뤄지는 것이 싫어 주말에 통화해야겠다 생각했다. 일요일보다는 토요일에, 점심 식사 직전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매장 2층이다. 반 바퀴를 돌아 맞은편 에스컬레이터로 3층을 향한다. 3층에서 내려 반 바퀴를 돌다 보니 아기자기한 귀여운 매장이 눈에 띈다. 'K'라는 알파벳이 내부 간판으로 걸린 매장 앞으로 가 기웃거려 본다. 좁고 긴 형태의 작은 매장이다. 벨벳 소재로 리본을 묶어 붙인 머리핀에 눈이 간다.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어느새 옆에서 선 매장 직원이 말한다.

“K의 머리핀은 잘 망가지지 않습니다. 소중한 사람의 이름처럼 오랫동안 쓰이고 기억되길 바라면서 만들어요.”

그를 바라본다. 빨갛게 달아오른 귓바퀴. 이 사람, 내향형인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스위치를 넣은 듯 귀가 붉어진다. 괜찮은지 만져주고 싶은 기분이다.

“머리핀은 잘 망가지고 잘 잃어버리는 것 중 하나여서 별 의미 없이 사두려던 건데…”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답한다.

“소소했던 것이 간혹 전체를 집어삼키기도 하니까요.”

모호하지만 마음에 와닿는 말이다.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내 마음대로 이해해 갖는다. 체크카드로 계산하고 머리핀 건네주길 기다린다. 그는 검정 헝겊 소재의 끈이 달린 빨간색 쇼핑백에 머리핀과 함께 자잘한 몇 개의 무언가를 담아 건넨다.


머리핀을 구매한 후 매장을 나와 시간을 확인하고 스마트폰에 입력해 둔 류의 형에게 전화를 건다. 한 번의 신호음, 두 번, 세 번! 마침내 상대가 응답한다.

“여보세요?”

“아,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류의 담임입니다.”

대화 중 기분 나쁜 하울링이 느껴진다.

“네, 한심안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울링이 더욱 심해지며 모든 소리가 어눌하다.

머리핀의 매장에서 좀 전의 판매 직원이 스마트폰 통화를 하며 나온다.

“류의 일로 통화 가능하신가요?.”

각자 통화 중이지만 K의 판매 직원과 나는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살핀다.

“류에게 무슨 일이…”

스마트폰에 말을 흘려 넣는 K의 판매 직원. 그와 나는 지금 같은 전화 라인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머리핀매장의 직원이 류의 형, 이한이다. 우리 둘은 어색하게 웃으며 통화를 종료한다.

몹시 당황한 듯한 이한은 귓바퀴에서 시작된 붉음이 얼굴로 번져 물들었고, 눈 흰자위까지 붉어졌다. 또다시 나는 괜찮은지 만져주고 싶은 기분이다.

“한심안 선생님.”

전체 이름을 부르고 있는 이한, 하지만 발음이 완벽하다. 내 등줄기가 부릉부릉 울린다. 잠시 사이를 두다 이한이 내 얼굴에 시선을 꽂은 채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묻는다.

“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니,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에요. 학기 초 류의 학부모 상담이 이뤄지지 않아서 궁금하신 점이나 당부사항이 있으실 것이고, 제가 말씀드려야 할 것도 있고 해서 여유 있게 통화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근무 중이시니까 퇴근하신 후 통화가 가능한 때 연락하세요.”

이한이 잠시 머뭇거리다 답한다.

“네, 선생님. 연락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대답 없이 나는 가벼운 목례하고 돌아선다. 속이 울렁거리며 멀미가 난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으면 곤란하다. 이곳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집에 도착해 소파에 털썩 앉으며 손에 든 K의 쇼핑백을 보며 깨닫는다. 정작 엄마의 선물을 사지 않았다는 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이다. 소파에 아무렇게나 눕는다. 그때 아득하게 들리는 목소리.

'심안아, 커피 믹스 마시자. 커피 믹스 두 개를 넣고 뻑뻑하게 녹여 먹자.'

정수기에서 온수를 뽑아 뻑뻑한 커피 믹스를 탄다. 한 모금 들이키니 단내가 앞장서고 들쩍지근하게 혀에 들러붙는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이 커피 믹스를 밥 대신 먹었었지. 아마도 작가는 나와 같은 작자일 것이리라 생각했다. 커피 믹스가 위안을 넘어 생을 잇는 연료가 되는 순간,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근본적인 마음의 구멍, 구멍이 영혼마저도 집어삼키려들 때, 끝내 내가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빌어먹을 악착같음을 아는 작자.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