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걸을까? 괜찮아?”
케이의 차분하고도 어른스러운 억양의 제안.
나는 허둥대며 케이에게 받은 액자를 현관문 안에 놓아두고 그대로 케이를 따른다.
팔만 들어 올려도 더운 날씨였다. 목과 등을 타고 금방 땀이 흘러내렸다. 지난 나의 몇 달은 케이의 뒷모습과 목소리로 채운, 견뎌야 하는 힘든 시간이었다. 이렇게 나란히 걸고 있으니 그 곤란한 뻑뻑함이 땀을 타고 씻겨 흐르는 듯했다. 검게 그을린 케이의 목덜미 역시 땀으로 반짝이고, 짧게 밀어 올린 까슬한 짧은 머리칼 끝에 이슬처럼 땀이 송알송알 맺혀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 공연히 웃었다.
케이가 나를 내려 보며 물었다.
“왜?”
“아니, 그냥.”
“심안아, 너에게 할 얘기가 있어.”
나는 케이의 말에 약간 두렵기도 설레기도 했다.
“우리 엄마가 많이 아프셔. 그래서 곧 이사 가. 2학기에는 같이 학교 다니지 못할걸?”
나는 놀랐고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공허한 검정과 회색의 도형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엄마가 아프셔?”
“응. 그런지는 꽤 오래됐어. 그런데 엄마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고 그러셨나 봐. 아빠가 제주도에 집을 알아보신 지도 꽤 오래 전인 것 같은데, 그런 일은 나와 상의하지 않으니까 결정되고 나도 알게 됐어.”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응. 우리는 그렇게 되는 거야.”
케이가 실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케이의 팔을 팔꿈치로 툭 치며 함께 웃었다. 케이가 아프다며 엄살 부렸고 난 또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등교했을 때 케이는 예상대로 보이지 않았다. 액자를 받던 날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저 웃으며 서로 무언가 묻지도, 답하지도 않은 채 헤어졌었다. 케이는 붉은 노을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나는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와 나의 만남과 이별, 사랑은 이렇게 뱀이 벗어 놓은 허물처럼 실체가 없이 엷은 막으로 남았다. 제대로 형태를 갖추지 못했고, 확인되지 않고 표현하지 않았다. 다만 본체의 성장을 위해 벗어야 했던 껍질이었다. 학교에서 케이의 뒷모습과 목소리를 완전히 잃었다 확신이 든 순간,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휘두르는 대로 몸이 휘둘리기 시작한 때였다.
당시 케이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으므로 남은 날들을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는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성인이 된 후로도 계속 케이는 나에게 포함된 채로 나를 이루고 있었고 언제든 케이가 돌아올 수 있도록 그만큼의 공간을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았다. 케이가 없는 나는 오롯이 홀로 외로운 채다. 나는 채워질 수 없도록 입구를 단단히 막은 집이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나는 더욱 외롭고, 그 외로움은 잔인하게 사실적이어서 가능하면 혼자이고 싶어지고 만다.
오늘 낮에 보았던 학부형, 이한을 생각한다. 케이와 이한, 머릿속에 맞대어 세워본다. 아무래도 중학생의 기억으로 현재의 모습을 미루어보기는 쉽지 않다. 류와 케이를 맞대어 비교해 본다. 케이의 점이나 흉터 같은 단서를 알고 있다면 좋았겠다, 생각한다. 꿈속에서 케이가 웃으며 자꾸만 내 얼굴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주 산만하고 뜬금없이 크리스마스 미니 전구처럼 케이의 얼굴이 꿈속에서 깜박였다.
모닝 알람에 눈을 떠보니 천정에 박힌 할로겐 등이 크리스마스 미니 전구처럼 깜박이고 있다. 깜빡이는 등을 올려다보며 케이, 정확히는 이한의 얼굴을 떠올린다. 케이가 이한인지 이한이 케이인지 그도 저도 아닌 것 인지 또 멍하니 서 있다.
종례 후, 류를 불러내 묻는다. 오래 많은, 고민하고 싶지 않다. 이미 케이에 관해 무기력하게 보낸 시간이 길다. 이한이 케이가 아니라면 다시 무기력해지면 된다. 지금은 무기력할 때가 아니다. 운 좋게도 시간은 참고 견딘 나를 위해 실마리를 내보이고 있다.
“류야 궁금한 게 있어.”
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린다.
“제주도에 산 적 있니?”
“네, 어렸을 때….”
“그럼, 너의 형, 혹시 지금 이름 개명한 이름이니?”
류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를 보고 있다.
“알면 말해줄래?”
무심히 류가 대답한다.
“개명, 잘 모르겠어요.”
이어 류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한다.
“별명이 있어요. 형 친구들은 형을 케이라 불러요.”
“케이?”
“네, 케이. 알파벳의 케이.”
그가 케이라 불린다. 이한은 케이다. 갑자기 속이 매스꺼워진다. 류를 등지고 곧장 화장실로 가 구역질한다. 퇴근 후 집에 돌아가 거실 바닥에 한참을 웅크린 채 있다가 저녁때를 한참 넘겨 이한에게 전화를 건다. 힘없고 머리가 아프긴 하지만 간절함에서 비롯된 의지가 솟는다.
“네, 여보세요.”
이한의 차분한 목소리.
“저 한심안인데요.”
“네, 선생님.”
“혹시 저 모르시나요?”
“한심안, 심안이. 아는 이름이긴 합니다.”
“그 이름, 어떻게 아세요?”
“류의 담임 선생님이 한심안 선생님이어서 흔한 이름이 아니니까 내가 아는 한심안이 아닐까 생각은 했었어요. 중학교 때 헤어진 친구인데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막상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니 당황하기도 했고요.”
나는 결국 울고 만다.
“백화점에서 통화하며 만났을 때, 심안이구나, 했어. 음색, 말투, 외모나 체형이나 성격, 너의 모든 것을 잘 지키고 살았더라고, 용케도.”
“케이…”
전화기 너머의 케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속싸개에 싸이는 신생아처럼 안온함을 느낀다. 나는 소리 내어 운다. 케이는 저 너머에서 그냥 잠자코 있다. 여태 밀쳐두었던 외로움이 따뜻하게 나를 데운다. 나를 기다려주던 케이가 차분히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말, 나의, 한심안. 다시 만나 반갑다.”
마침내 울음을 거둔 내가 물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답한다.
“내가 나만 잘 지키고 살았겠냐? 내 안의 너도 잘 지키고 살았지.”
“궁금한 게 정말 많았는데 막상 물어볼 수가 없네. 그때처럼.”
“그때?”
“응, 여름방학 때, 그날 내가 너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게 얼마나 많았는데. 곧 헤어질 거라 생각하니 또 무슨 소용인가 싶고, 아무튼 그랬어.”
“그때 넌 나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물어봤어야 했어. 그때의 나 역시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줬어야 했고. 그걸 하지 않아서 나는 아직도 반쪽 세상을 살고 있다고.”
“심안아, 미안하다. 나에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 미안하다.”
“뭐가 미안하냐? 이렇게 다시 만났으면 됐지.”
케이가 허탈한 듯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나의 마음도 따라 무거워진다.
간혹 학생들의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해 타로를 놓곤 한다. 아이들의 맑은 영혼은 조금만 읽어 주어도 곧잘 동화된다. 억지로 그들의 입과 귀, 마음을 여는 대신 타로 카드 세 장이 나을 때가 있다. 그들과 타로를 매개로 한 대화를 마치며 당부하곤 한다. 기회가 오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 무용하다고 말이다. 나는 어두운 바다를 헤엄쳐 건널 운명으로 시작도 전에 겁에 질린 채 압도된 기분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케이가 놀랍게도 나에게 돌아왔다. 운명은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을 데다 놓았고, 이제 케이와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할 것인지 물을 것이다. 나는 그 물음에 답을 해야 함에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에 당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