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설친다. 동그랗게 뭉쳐 놓았던 실을 풀어내는 기분이다. 가느다란 실이 당기는 대로 끝없이 내 손에 쥐어진다. 그 실에 담긴 서사에 케이는 없다. 케이가 등장하려면 실뭉치를 모두 풀어야 한다. 시간을 거슬러 케이가 등장할 때까지 천천히 실을 푼다. 한참을 그러다 잠든다.
스무 살이 되어 만난 남자가 있었다. 같은 과 친구가 형을 소개했고 나를 압도하는 외모와 문장가로서의 학식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밑도 끝도 없이 나의 모든 것을 그에게 쏟아부었다. 케이처럼 또 놓칠 것 같은 불안함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가 써 놓은 글을 읽기 위해 틈만 나면 친구의 집에 갔다. 학업 외의 모든 시간은 그와 함께여야 했고 그의 사정에 의해 만나지 못할 때는 불안함과 우울감을 떨치지 못하고 내내 잠을 청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나의 집착에 힘들어했으나 그때의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서로 묶인 채 지내는 시간은 내가 졸업하면서 끝났다. 임용고시 준비하는 동안 한시적으로 그와 떨어져 지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떨어져 지내는 생경함도 잠시, 고시를 치른 첫해 합격하지 못했고 나는 몹시 낙심했다. 그에게서 오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안부를 전하는 메시지에도 답하지 않은 채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다 잠시 잊고 있던 마음의 요동이 시작되었다. 숨을 잘 쉬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은 극한 공포와 함께 케이가 생각났다. 케이는 내 마음속에 잠자코 잠수해 있었고 위급할 때 무형의 존재감으로 되살아났다. 다시 의지를 가지고 임용고시 준비하던 3월의 어느 날, 형을 소개했던 과 친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너, 우리 형과 헤어져라. 형이 요즘 다른 사람 만나는데 너에게 하던 것과 많이 달라. 형이 그 사람 진짜 좋아하는 것 같아.”
나는 순순히 답했다.
“응, 알았어, 그럴게.”
완전히 방전된 건전지처럼 전원이 툭하고 꺼졌다. 미치광이처럼 그에게 매몰되었던 수많은 밤과 낮이 암전 속에 사라졌다. 오히려 혼자인 나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누가 꺼주길 바랐던 것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곧 편안히 그에게 이별을 고했고, 그는 예상하지 못했던 듯 당황했다. 몇 주 후 그의 어머니 연락을 받고 카페에서 만났다.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온한 채로 카페의 직원이 내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심안아. 걔 놓고 가. 네 인생 살아.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야. 내가 너희들 사주 가지고 점을 본 적 있어. 너에겐 아주 훗날 진짜 인연이 기다리고 있대. 마음속에 뭘 그리 담고 사는지, 널 보면 항상 마음 쓰였는데… 우리 애는 요즘 밥을 통 못 먹고 술만 마셔. 응급실도 몇 번 갔다 왔어. 너희 둘이 인연이 아닌 걸 어떡하겠어.”
진짜 인연, 그 얘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의 권사님이 나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했다.
“저 아가씨, 이 집 사람 아니야. 인연이 한참 뒤에 있어. 식 올려도 신 벗어놓고 갈 사람이야.”
그와 이별 후 맞은 첫 추석. 그가 꽤 멋진 모습으로 저녁 무렵 우리 집에 왔다. 그는 아빠와 상을 두고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내가 불편해하자 엄마는 나무랐다.
“네가 하도 유난이어서 아빠도 깊이 마음을 줬던 사람이잖아. 너희 둘만의 이별이 끝이 아니지. 가족들과도 이렇게 이별해야 옳아.”
나는 아빠와 그의 사이에 앉았다. 일상의 대화와 부자연스러운 시선을 주고받으며 나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살이 조금 빠졌고, 눈이 조금 깊어졌다. 그의 필력은 저 눈의 깊이만큼 익어갈 것이다.
아빠가 그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자네 책을 몇 권 읽었어. 등단도 빠른 편인데 부지런히 책을 냈더군. 앞으로도 좋은 글을 많이 써줘. 와줘서 고맙네.”
아빠의 둥글고 큰 눈이 약간 충혈되었고 그는 말없이 아버지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아버님 시집도 제가 무척 좋아합니다. 심안이와 소리 내서 함께 읽곤 했어요.”
“나야 뭐, 선생질하면서 글 쓰는 걸 좋아하니까 그냥 무턱대고 쓴 글이고, 자네는 문창과 출신 아닌가!”
글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의 글 얘기는 이후로도 한참 이어졌다.
아빠가 엄마에게 안주를 더 청하고 분위기가 바뀌자, 그가 아빠에게 물었다.
“심안이 이름 아버님께서 지으셨어요?”
“응, 그랬지. 어렵게 얻은 귀한 아이라 내가 고민을 많이 했어. 아이 사주에 물이 많았고 사람들의 깊은 마음을 잘 헤아렸으면 해서 심안이라 지어줬지. 그런데 지는 고달플지 모르겠어. 이름으로 장난치는 통에.”
“심안이는 오히려 더 좋았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잘 기억한다고 그래서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가 나를 바라보며 다정히 웃었다.
우리 가족과 그의 이별을 마치고 집에서 나왔다. 그는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에 대해 천천히 품을 들여 설명했다. 나는 그의 작품과 문체를 좋아했-었-다. 충분히 얘기할 수 있도록 느긋하게 천천히 걸었다. 그의 모든 것이 이렇게 완벽히 나와 분리되어 이물감이 든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무 감정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고 감각마저 사라진 때, 마음이 하는 조화가 생경했다. 그와 함께일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옳은 느낌이랄까? 나는 이렇게 케이를 품은 나로서 홀로여야 했고, 그는 나와 상관없는 삶 속에 오롯이 담겨 있어야 했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그가 작품에 대한 설명을 마쳤을 때 내가 이어 물었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말해.”
“평소 내가 오빠에게 애걸복걸하며 정말 힘들게 했었잖아. 늘 같이 있자고 숨도 쉬지 못하게 하고. 그리고 그땐 오빠 다른 사람도 있었잖아, 양다리, 그렇지?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오빠가 좋아할 줄 알았어. 그런데 왜 그렇게 힘들어했어? 오빠에게 나는 언제 없어져도 상관없는 사람 아니었어?”
“아니. 언제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었지. 잃을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네가 헤어지자고 하니까 말 그대로 세상이 흘러내렸어. 그 끔찍한 느낌은 잊을 수가 없어. 그건 아직도 그래. 너는 정말 나와 헤어졌어?”
나는 밝게 웃으며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응. 우린 이제 서로 자유로워, 나도, 오빠도. 우리는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야.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 믿을 수 없겠지만 환생한다 해도 다시 만날 것 같지 않아.”
“그래? 그럼 나도 미련 없이 편해져야겠다. 환생해도 다시 만나지 않도록 너를 놓아줄게.”
그의 배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의 친구이자 그의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이별을 고했다. 통화를 한 뒤 폰의 연락처에서 번호를 삭제했다. 그렇게 그의 가족과 이별했다.
그와 헤어진 이후 몇 명의 남자 친구와 인연이 더 있었다. 매번 케이를 넘어서는, 나의 상대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내 마음속의 케이는 다정함의 상징이었고 영웅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현실 남자 친구는 보이지 않는 절대 강자를 경쟁자로 두는 격이었고 그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고 마는 패배자였다. 그들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나를 잃었다.
평소처럼 차분히 하루를 보낸다. 술렁이려는 마음을 계속해서 누른다. 케이와 나는 서두르거나 성급히 미래를 계획하지 않아야 하는 관계임을 직감한다. 통화 이후 침묵의 한 달이 지난다. 나에겐 사형수의 삶처럼 하루를 보내는 것이 짙고 무겁다. 케이 역시 아무 움직임이 없다. 서로 각자의 영역에 담겨 꼼짝하지 않고 있다.
케이와 나의 관계는 붙잡지 않아도 되고,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약속하지 않아도 된다. 자기 삶의 중심이 자기 안에 있고, 관계로 공허를 채우지 않고, 감정으로 도망치지 않고, 의미를 과잉 생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게 맞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