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하게 사실적인*

by 홍경

케이에 대한 궁금증을 품고 이대로 있는 것이 맞는지 내가 나를 나무란다. 한편에서는 남의 사생활을 알아서 뭣하냐고 그대로 있으라고 한다. 나무라는 편과 두둔하는 편으로 나뉘어 두 마음이 겨루고 있다. ‘나’는 중립이다. 회피나 보류가 아니다. 판단을 마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두렵다.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상자처럼, 열었다고도 혹은 닫았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두고 싶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결국은 열어야 할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상자’인 것이다.

학교에서 친한 동료, 지수쌤과 나누는 모든 대화가 의식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흘러내린다. 좀처럼 그녀의 말에 집중하지 못한다. 그녀와 커피를 마시면서도 온도와 향과 맛을 느끼지만 그뿐이다. 나의 삶 전체가 내게 스며들지 못하고 흘러내리고 있다.

무엇보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극한의 공포는 아직 내게 당도하지 않았다. 불안함 속에 녀석의 출현을 예견하려 애쓴다. 이 증상은 케이가 나를 떠난 직후 생긴 것이므로 케이가 내게 돌아오며 사라진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동안 살아온 내 세계가 15도 정도 기운 것 같다.

새로 읽기 시작한 두툼한 책에 집중한다. 아무리 세계가 기울었다 해도 읽을 책이 있다면 멀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 장을 넘겨보다 갑자기 떠오르는 케이의 모습에 소리 내어 한숨을 쉰다. 이한의 얼굴을 이미 보았지만, 마음에 떠오르는 모습은 소년의 케이다. 지금의 이한은 내가 알던 소년 케이가 아니다. 하지만 이한이 케이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벽에 걸린 그림-케이가 그려준 나-을 본다. 나를 향한 케이의 다정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 다정함은 언제나 변함없이 나와 그를 잇고 있다. 케이 역시 나와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너무나 확실하고 확정적인 사실이어서 확인해 볼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한과 케이 간극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른다. 케이가 어떻게 이한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이것을 바로 보지 않은 채 내가 망설였다는 것을 의식한다.

류의 어머니란 사람이 나타나면서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다. 최악의 수, 이안이 류의 아버지라는 악수(惡手, bad move)를 생각했다. 악수 앞에서 크게 요동치는 몸의 울림을 느꼈다. 내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혼미해졌다.

지수쌤과 이자카야에서 청하를 마신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매주 평범한 금요일에 함께하는 술친구가 되었다. 자정을 넘기진 않지만, 취기가 눅진히 들러붙도록 충분히 마신다. 늘 안주는 지수쌤이 좋아하는 연어. 차갑게 식힌 청하를 한 모금 삼킨다. 청하의 능능하고 부드러운 맛을 느끼며 내가 말한다.

“소주를 마실걸 그랬나? 그렇잖아도 요즘 모든 게 너무 능능하고 밍밍해서 답이 없는데.”

“왜요, 쌤?”

“이게 너무 애매하고 모호해서 취하지 않고는 말하기가 그래.”

“쌤, 우리 소주 마실까요?”

“그래, 지수쌤. 각 1병씩 할까?”

지수쌤은 키오스크로 소주 2병을 주문한다. 점원이 소주 2병과 소주잔 2개를 테이블에 놓은 후 주방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소주 한 병씩 집어 들어 각자 병을 흔든 후 뚜껑을 비틀어 연다. 각자의 잔에 손수 첫 잔을 따른다. 나는 잔을 중간보다 조금 위로, 지수쌤은 한 잔 가득 채운다. 술잔을 가볍게 들어 올려 서로 맞댄 후 한 호흡에 마신다. 첫 잔은 함께, 나머지는 각자 자유롭게 첨잔 하며 마신다. 한 병을 모두 비울 때까지 상대의 병에 남은 술의 수위를 보아가며 속도를 조절한다. 한 병을 모두 비우는 시간은 얼추 서로 맞는다.

각자 한 병을 비울 때까지 대화다운 대화는 거의 없고 연어나 매운 과자를 집어 먹거나 시시콜콜한, 하나마나한 얘기들을 소곤댄다. 한 병을 다 마시고 두 병을 다시 주문한다.

각자 다시 병마개를 비틀고 잔을 채운다. 첫 잔을 맞부딪힌 후 한 호흡에 마시고 다시 빈 잔에 소주를 조금 따른다.

“지수쌤, 내가 맨날 얘기하던 사람 있잖아…”

“중학교 때 그 친구?”

“응. 그 사람을 만났어. 그런데 그게 좀 복잡해.”

“왜요, 그 사람 결혼했어요? 아니면 돌싱?”

“그 사람에게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동생이 있거든? 그런데 그 동생의 친모라는 사람이 나타났어.”

“어, 뭐야, 그럼 친구분 아버님과 내연녀 사이의 배다른 형제?”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친모라는 사람이 말하길, 법적으로 조부모 자식이지만, 이란 말을 했든. 그렇다면 법적으로 부모인 분들이 조부모란 거잖아.”

“아… 그렇네요.”

지수쌤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명탐정이라도 된 듯 상황에 대해 집중한다.

“지수쌤, 나는 그게 두려워. 그 사람의 동생이 그의 아이일까 봐. 사실, 진짜 궁금한 건 그다음이야. 그의 자식이라면 그렇게 출생신고를 하지 못한 이유가 뭘까?”

“음… 사연 있어 보이네요, 엄청.”

“사연 있어 보이지, 맞아.”

“쌤, 그럼,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확인해 보는 게 쉽지 않아. 왜냐하면 내게 지분이 없어. 아니다. 지분이 아니고 명분이 없어, 명분이.”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뱉고 소주 한 잔을 들이켠 후 말한다.

“지수쌤, 그 사람 동생이 우리 반 류야.”

지수쌤은 너무 놀라 나를 본다. 호들갑스럽게 자신의 양손을 교차해 양팔을 문지르며 말한다.

“아, 소름! 무슨 그런 일이 있어요? 사람 인연 진짜 무섭네요.”

“류가 스마트 패드 던져서 깨 먹었었잖아? 그 일로 어찌어찌 알게 됐어. 그 사람이 개명했더라고. 내 이름만큼이나 그 사람 이름도 흔한 이름은 아니었는데, 그 이름 그대로 썼다면 더 일찍 알았겠지.”

“류가 친구분 아들이면 어떻게 해요? 그렇게 쌤이 마음을 쓰고 그리워하고, 그 긴 시간을 끌어안고 살아왔는데. 너무 속상하네요.”

지수쌤은 취기 때문인지 눈물을 글썽인다. 붉어진 눈을 보니 나도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지수쌤이 소주를 들이켜고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쌤, 그런데 친모란 사람은 어떻게 만났어요?”

“갑자기 전화가 왔어. 자기가 류의 친모라면서 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 달라고. 류가 친모라는 사람과 함께 있다가 엄마 맞다고 말해주더라고.”

“와! 진짜 헷갈린다. 이런 경우 친모라는 사람이 류의 학부모라 할 수 있어요?”

“지수쌤도 알잖아. 가족관계증명서를 기준으로 한다는 거. 요즘은 이혼, 재혼, 한부모 이런 상황도 많고 무조건 가족관계증명서를 기준으로 한다는 게 현실적이지 않긴 해.”

“쌤의 친구분에게 류와 류의 친모에 대해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친모라는 사람이 학부모의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친구분과 친모라는 분과는 어떤 관계인지.”

“확인하면 되는데, 물어보면 되는데, 그게 잘 안돼. 아, 정말 그게 잘 안돼.”

그렇게 우린 각자 소주 2병을 비웠다. 지수쌤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면 검지를 세운다. 둘이 한 병을 나눠 마시자는 사인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냉장고에서 막 꺼내온 소주병이 무척 차갑다. 서로 병을 주고받으며 상대의 잔에 술을 따른다. 술 한 병을 둘 이상의 사람이 나누어 마신다는 것은 무척 성가신 일이다. 2인3각처럼 계속해서 상대와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 약간의 성가심으로 정이 쌓인다고나 할까?

지수쌤은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이제 취기가 가득이라는 신호.

“심안쌤, 이제 그만, 그 사람 잊어요. 그 사람 사연 있어 보여요. 난 사연 있어 보이는 사람 싫드라. 각자의 삶이 다 사연 덩어리인데 거기에 뭘 더 얹어요. 아, 정말, 난 반대야 반대.”

나는 말없이 내 잔에 술을 따라 마신다. 지수쌤이 다시 같은 말을 한다.

“그 사람 잊어요. 그 사람 사연 있어 보여. 난 사연 있어 보이는 사람 싫드라. 잊어요, 그 사람. 아니면 그동안 너밖에 없었다고, 사귀자고 고백이라도 해요, 속이라도 시원하게!”

누군가에게 속 얘기를 한다는 것은 허탈한 일이다. 얘기하고 나면 후련하다고들 하던데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지수쌤에게 털어놓는다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리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다. 말하고 나니 현실성 없던 예측들이 잔인하게 사실적인 형태로 시연된다. 초록색 소주병 다섯 개와 파란색 청하 한 병이 지수쌤의 어둔한 팔짓에 맞아 쓰러지며 바닥에 떨어진다. 깨지거나 구르거나 떵그렁 떵그렁 시끄럽다. 자정 무렵,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술기운에 할 수 있는 건 뭐다? 고백. 후회할 확률 몇 퍼센트다? 100%.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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