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의 나

by 홍경

나에게는 곤란한 주사(酒邪/술 마신 뒤에 버릇으로 하는 못된 언행)가 있다. 술에 취하면 거짓의 마음을 나누고 싶어지는 것 같다. 누군가와 장문의 카톡을 나누거나 자정이 넘은 시간, 주로 동기들 대상으로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곤 한다. 아침에 깨어나 카톡을 확인하면 늘 괴롭다. 하면 안 됐을 말이나 할 이유가 없는 말들을 진심이 느껴지도록 격정적으로, 매우 진솔하게 늘어놓는 것이다.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사람에게 사랑했던 것처럼 굴거나 매우 신뢰하는 사람에게 의심스럽다는 둥 심술을 부린다. 드물게 통화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매우, 매우 위험하다. 나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의 대화가 대부분이고 상대는 그 후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흔하다. 술에서 깨어나면 전날의 상대를 차단하거나 술 취한 내가 다시 허튼짓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지만, 그 버릇이 발동하면 영락없이 또 다른 상대를 찾아낸다. 취중진담이라고? 전혀 그렇지 않은 인간이 여기 있다. 취하면 진심인 것처럼 거짓을 연기할 수 있는 인간이 바로 나다.

지수쌤을 데려다주고 반대 방향의 집을 향해 걷는다. 밤공기는 제법 차고 밀도가 높다. 신선하게 느껴진다. 살짝 달아오른 얼굴에 찬 기운이 닿는 게 그리 싫진 않다. 음악을 들으며 걷는 것이 내키지 않을 만큼 차분한 밤이다.

긴 시간 동안 쌓아온 내 마음속의 그를 지키기 위해 현실의 그를 봉인하듯 두고 보는 것이 답답하다. 하지만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부서질 것 같아 선뜻 무엇도 할 수 없다. 이한이 먼저 연락해 준다면, 그렇다면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으로선 그렇다.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것은 왠지 큰 위험이 감지된다. 적어도 내가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은 있어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우울하지 않으려 애쓴다. 사실, 우울할 일도 아니다. 왠지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마음이다. 사랑에도 시효가 있다면 어떤 연유로 말끔히 종료되는 걸까? 시작,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을 텐데. 우리에겐 아직 시작이 선명하지 않다. 진행 중인가, 하면 그것도 서로 확인된 바 없다. 이 관계는 아무것도 아닌 채로 돌덩이처럼 무겁게 나를 내리누른다. 이한은 이 관계가 괜찮을까? 이한에게 나는 어떤 무게감을 지닐까? 하여간 나는 이한을 모른다. 이한이 나를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지수쌤과의 술자리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 피드에 누군가 ‘좋아요’를 누르고 DM을 보내온다. 급할 일도 없는데 마음을 묶어둘 요량으로 멈추어 서서 DM을 연다.

“요다 님, 오늘도 술스타그램인가요?”

요다는 내 인스타그램 아이디이자 별명이고, 상대의 별명은 니체다. 니체는 내가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맞팔해 준 잊을 수 없는 상대다. 기업의 해외 영업 업무를 맡고 있고 글 쓰기를 좋아해 자비로 책을 몇 권 출간하기도 했다.

“네, 오늘은 소주를 마셨답니다. 연어와.”

“오늘 날씨가 차서 소주 좋죠.”

“따뜻한 사케를 마시기에는 아직 덜 춥고.”

“오늘 같은 날씨엔 야외 포차에서 소주에 닭발이죠.”

“캬캬캬캬캬.”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고, 나이도, 가족관계도, 그 무엇도 서로 알지 못한 채, 취향이나 다수의 피드를 통해 알게 되는 소소한 사생활의 단편으로 얕고, 의미 있는 선의의 관계를 맺는다. 얕은 관계에서만 가능한 휘발성 관심과 말단에서 멈추는 위로가 깊은 관계의 그것보다 나을 때가 있다. 어차피 요다와 니체는 그 너머의 더한 무엇이 없다. 그것이 주는 안정감을 어디에 비할 것인가!

“니체 너는 요즘 술 안 마셔?”

니체에게 의도적으로 반말을 하는 이유는 친근감을 표현하고 싶어서다. 니체가 알든 모르든 평소 댓글이나 DM에서 쓰던 경어를 이렇게-술 한 잔 했을 경우-문득 바꾸어 반말한다. 무엇보다 대충 어림해 보았을 때 니체는 나보다 서너 살 아래다.

“네, 얼마 전 러닝하면서 발바닥에 염증이 왔는데 나을 때까지는 조심하려고요.”

“아이구, 나을 때까지 술은 마시면 안되긋다.”

“요다 님, 궁금한 게 있는데, 요다 님 직업이 뭐예요? 인스타에 요다 님 개인정보가 원체 없어서 인친들 사이에서 요다 님 직업을 무척 궁금해해요. 물론 직업뿐 아니라 나이도 궁금해하긴 해요.”

“나이는 니체, 너보다 훨씬 많고, 직업은 공익을 위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

으스대며 내가 말하자 니체가 답한다.

“아, 공익을 위한 직업이면 요원이시구나?”

“응, 그렇다고 해.”

“요다 님은 아직 미혼이시죠?”

“하, 궁금한 게 참 많네?”

“그렇죠 뭐. 워낙 피드에서도 그렇고 공개된 것이 적으니까.”

“궁금한 게 있을 때가 좋지. 다 알고 나면 뭐, 별 게 없어. 인간의 삶이란 게 다 그렇지.”

니체는 오늘도 요다의 부스러기 정보를 줍는다. 내가 요다라는 아이디로 인스타그램을 가입하고 처음 올린 피드는 니체의 명언 한 구절이었다. 그 피드에 처음 ‘좋아요’를 누른 사람 아이디가 ‘__Nietzsche1844__’, 니체였고 요다는 그를 첫 팔로잉 했으며 니체는 요다를 맞팔해 주었다. 요다에겐 니체가 인스타그램의 개찰구 같은 존재다. ‘좋아요’ 숫자 1, 팔로잉 숫자 1, 팔로워 숫자 1의 상태를 나는 캡처해 두었다. 시작을 의미하는 1은 정말이지 언 마음을 한없이 따뜻하게 만들어 사르륵 녹여준다.

내가 심란하게 취해 있을 때 신통하게도 니체는 글자로 말을 걸곤 한다. 세상에는 마음을 잇는 네트워크가 있는 게 분명하다. 꼭 깊은 사이가 아니어도 어느 결에 연결을 마친 사람들 간에는 마음을 공유한다고 믿게 된다, 놀랍게도.

물론 그렇지 않은 영역도 있다. 성역과 같은 이한은 제외한다. 이한은 내 모든 평범한 범주와 예상을 벗어난다. 내가 정의하지 못한 유일한 단어, 이한.

집 근처 편의점에서 홍차 음료를 산다. 차갑고 붉은 차를 들이켜며 어둠 속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본다. 한시가 조금 넘었다. 깨어 있는 사람이 소수인 시간이다. 불 꺼진 집이 켜진 집보다 많은 시간. 모두 다 묻어 두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애틋하다. 그들은 밤새 잠든 후 저마다의 꿈을 지켜보며 잊거나 기억할 것이다. 의미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말이다.

우리 반 아이들을 보면 우리의 삶에 별것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하긴, 나도 어렸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은 어느 선까지는 필요하다.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서면 삶에 의미 따윈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다. 삶 자체에 어떤 거대한 의미가 있겠나? 그냥 살아가는 것, 그러면서 본디 자기의 본모를 왜곡 없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다인 것을…. 결국은 그냥 사는 것이다.

맑아진 눈으로 카카오톡을 누르고 이한의 이름에 손가락을 댄다. 1:1 채팅 창을 연 후 텅 빈 대화창과 메시지 입력창을 바라본다.

“안녕. 나 심안이야.”

입력했다 지운다.

“케이야, 나 심안이야.”

이번엔 지우지 않고 입력 버튼을 누른다.

풍선 아래 숫자 1을 꺼림칙한 눈으로 바라본다. 이 숫자 1이야말로 시작을 의미하는 1이길 바란다. 종말을 의미하는 1이 아니길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마음이 단단히 얼어붙는다. 웬만해선 녹지 않을 차가움이다. 스마트폰의 화면을 끄고 가방에 넣은 후 집으로 걷는다.

왠지 모르게 패배자의 기분이다. 이 게임에 심판이 있다면 나는 바로 판정패다. 승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 없지만 이한에게 카톡을 보낸 것은 너무 경솔했다고 나를 나무란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속으로 말을 뱉는다. 빌어먹을, 속으로 또 뱉어낸다. 이러니 좀 낫다. 고상한 언어는 지금의 나에게 맞지 않다. 괜히 발부리에 걸리는 빈 생수병을 걷어찬다. 어둠의 고요를 깨며 플라스틱 빈 병이 덜그럭거리며 구른다. 또 좀 낫군, 기분이.

반듯하게 서 있는 나무에게 시비를 걸고 싶어진다. 봄이면 하얀 꽃을 물고 향기를 여기저기 퍼뜨리는 키 낮은 치자나무를 괴롭히고 싶다.

아파트 정원의 연못에 머리를 박고 서 있다. 얼굴에 피가 몰린다. 차디찬 물속에 멈추어 떠 있는 비단잉어를 본다. 움직임 없는 비단잉어의 뜨거운 심장이 느껴진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온기가 있다. 피가 흐르는 동물들은 모두 체온이란 게 있다. 이한이 내게 답할 때의 문장에 체온만큼의, 미지근하게라도 온기가 서려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준다면 내가 덜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나는 이한을 맞이할 언어의 온도조차 정하지 않았다. 차가울 것인지, 따뜻할 것인지 혹은 미지근할 것인지.

최악의 수가 사실이라 확인되었을 때 이한을 놓아줄 것인지, 이한의 곁에 설 여지가 있는지도 모호하다. 이한과 연인이 되고 싶은 건지, 친구도 괜찮은 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놓아줄 것인지 내 마음이지만 내가 모른다. 모든 것은 그때의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언제나 선택의 순간에 눈썹에 힘을 주고 확신에 차서 담담히 결정했었다. 결단력을 지닌 나의 명연기에 언제나 스스로 안도하곤 했던 것이다. 내가 100%의 나를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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