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찹쌀떡처럼 말랑하게

by 홍경

얕은 취기가 집까지 걸어오면서 다 걷히고, 자려고 누웠을 때는 눈과 머리가 맑다. 이럴 거면 왜 술을 마시냐,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거실로 나가 한밤에 커피믹스 한 잔을 타고 블루투스 스피커에 음악을 흘린다. 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다. 전혀 잠이 오지 않는다.

우리 할머니가 말씀하셨지. 귀신의 시간인 축시-한시부터 세시까지-에 인간이 깨어 있거나 돌아다니면 못쓴다고. 할머니가 들려주신 다양한 ‘옛날 얘기’에서 귀신들은 인시가 가까워질 무렵 온 힘을 다해 인간을 해하려고 애썼었지. 촛불을 다 꺼버리고 허술한 창호지 문도 바람으로 날려버렸지. 인간은 귀신을 대적하느라 힘이 빠져가고 야속한 듯 간절히 수탉의 울음소리와 여명을 기다리며 버텼고. 꼬끼오, 닭이 우는 순간 게임은 종료! 그런데 그거 알아? 귀신들의 포악함과 흉측한 용모에 비해 그들이 출몰하는 이유가 너무 인간적이어서 가슴 아프다는 사실. 인간의 사연은 한을 낳고 한을 지닌 인간은 또 영체가 되어서도 인간의 곁을 맴돈다는 전개가 너무 슬펐어. 그래서 그때부터 귀신이 무섭지 않아 졌지. 만일 귀신이 내 눈에 보인다면 ‘산속에서 길을 잃은 지혜로운 선비’가 그랬던 것처럼 지레 공포에 떨지 않고 눈을 맞추며 그의 사연을 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귀신의 시간에 귀신을 생각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럽다. 벽에 걸린 케이의 그림을 보면서 케이를 떠올리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하다. 귀신의 시간이 지나고 인간의 시간이 돌아와 동이 틀 무렵 나는 잠이 든다.

잠든 후 꿈속. 액자에서 걸어 나온 케이를 만난다. 케이는 조금 우울하고 설레는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케이의 얼굴이 그늘에 갇혀 시커멓지만, 나는 그의 표정을 느낀다. 그의 표정뿐 아니라 마음도 느낀다. 캄캄한, 벽만 둘러 있는 방-방이라고 할 수 있나?- 가운데로 케이가 저벅저벅 걸어가 앉는다.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았고 난 그의 표정과 감정을 살핀다. 마침내 케이가 비열하게 웃는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저거 뭐야, 너 뭐야! 너 케이 아니지! 케이도 아닌 것이!’ 호통치며 내쫓고 싶지만 답답하게 말문이 막힌다. 갑자기 내 몸이 굳고 움직여지지 않는다. 케이의 비열한 하얀 이가 어느새 내 눈을 덮는다. 산더미만큼 커다란 케이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제 깨어나야 해!’ 케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고 소파에 누인 내 몸에 눌렸던 오른손을 조금 움직이며 꿈에서 깬다.

곧장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가 꿈을 적는 수첩에 빠른 글씨로 꿈을 적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케이와 비슷한, 케이는 아닌 놈이 방 가운데까지 나와 앉았다. 아무래도 이대로 있다간 실체도 없는 그놈에게 너무 많은 것을 잃을 듯하다. 정확히는 ‘그림이 걸린 벽만 있는 방’을 놈이 노리고 있다. 아직 지붕도 얹지 않은, 내가 오랫동안 어렵게 지키고 있는 개념의 방이란 말이다.

양치하며 거울을 본다. 괜찮지, 한심안? 정말 괜찮지, 그런 거지, 한심안? 칫솔질하며 슬쩍 웃어본다. 내가 나를 염려하며, 내가 나를 안심시킨다.

이미 시간은 오후 한 시에 가깝다. 간단히 국에 김치, 밥으로 허기를 채운다. 생강차를 마실 요량으로 정수기에서 온수를 받는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컵에 물을 받으며 늘 속으로 부르는 노래.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동글동글해지는 귀여운 노래.

차를 마시며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나, 케이 아닌데. 내 이름 알잖아.”

지난밤 보냈던 톡, ‘케이야, 나 심안이야.’란 말풍선에 답한 케이의 문장이다. 보낸 시간은 오전 6시 조금 넘어서. 케이의 답을 몇 번이고 속으로 읽는다. 읽을수록 마음에 작은 점이 점점 커지며 등이 부릉부릉 울린다. 기분 좋은 울림이다.

모든 것은 그때의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라던 추측과는 달리 문장의 온도를 정하지 못한다. 나는 이미 한없이 따뜻하게 케이를 위한 문장을 데웠다. 식히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들여 식힐 것인지 지금 따뜻하게 답할 것인지 고민한다. 류와 이한, 그리고 케이에 대한 서사와는 별개로 케이를 똑 떼어, 내 앞으로 데려온다. 차가운 이성은 조금 뒤로 미루자. 지금은 나를 위해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아, 오늘 매출은 좀 어때?” 메시지 전송 후 곧이어 “됐냐?”도 전송한다.

홀로 히죽대며 폰의 화면을 끈다.

케이는 나의 대답을 확인하지 않는다. 확인받지 못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쪼글쪼글해진다. 전송할 때 몸을 한껏 키웠던 자신감이 엄지손톱만 해진다. 좀처럼 침착해지지 않는 마음이다. 의식적으로 ‘소로의 월든’을 읽는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곧 따분해지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혼자 지내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나는 고독만큼 편안하고 좋은 친구를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더 외롭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서로의 새로운 가치를 얻을 여유가 없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서로의 길을 막기도 하고 서로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소로의 월든>, 송태영 글

소로가 말하고 있는 ‘혼자 지내는 법’과 ‘고독’은 흔한 그것이 아니다. 굳이 경계를 두어 표현하자면, 세속의 그것과는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소로는 산 중에 스스로 집을 짓고 홀로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가 숲으로 간 이유는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고 싶어서’이고, 집을 직접 지은 이유는 ‘집 짓는 즐거움을 목수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1845년의 소로가 2026년에도 그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산중에서 콩과 채소를 직접 길러 먹으며 살 수 있었을는지 궁금하다. 이 시대의 소로라면 제일 먼저 무엇을 던져 버렸을까? 스마트폰이겠지! 의심한 이유도 없이, 카톡의 사라지지 않는 ’ 1‘이 꼴 보기 싫어서라도 21층 아파트 밖으로 던졌을 것이다.

소로는 지성과 지혜가 있었고,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 사람만을 평생 가슴에 담았으며, 자국의 노예제도와 전쟁을 지켜보며 저항했다. 정부와 같은 거대 권력이 한 개인의 삶에 행하는 강요와 폭력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저항의 목소리나 행동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 부끄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당시 그가 세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아니었고 생전에 두 권의 책을 출간했지만 몇백 권 팔렸을 뿐이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리고 지킨 소로의 기록이 세대를 이어 전해져 지금의 내가 읽을 수 있음에 깊이 감탄한다.

정의와 선의를 지지하면서 자신의 이익이나 안위보다 우선시하며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한 보따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로처럼 나도 그만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가늠해 본다. 특별하지 않은 나의 영향력 따윈 따지지 않고, 나부터, 나로부터 우선 말이다.

소로를 읽으며 마음을 찹쌀떡처럼 말랑하게 만든다. 케이는 이제 이한으로 불러주겠다. 좀처럼 내키진 않지만 그게 좋을 것 같다. 케이라고 부르는 나는, 무례하게도 이한의 과거를 내 손에 쥔 채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미처럼 느껴진다. 이한이 개명한 어떤 계기가 있을 것이다. 케이란 이름이 모두 담지 못하거나 영역을 벗어난 삶이 있을 수 있다. 일단 그것을 존중해 주리라. 나를 위해서라도 일단은 다정한 현재의 대화가 필요하다. 이한의 과거는 그다음이다.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이한에게서 톡이 온다.

“오늘은 매출이 꽤 괜찮은걸? 심안이 때문인가?”

“오호! 그럼 맛있는 것도 좀 사주고 그래.”

“밥이야 네가 원하면 언제든 사주지.”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당연하지. 심안이 술 좋아해?”

“술 보다 난 사람을 좋아해.”

“난 사람보다 술을 좋아하는데. 어쨌든 술도 밥도 사줄게.”

“한아, 너 오늘은 퇴근하면 뭐 하니?”

“오늘은 러닝크루 하기로 했어.”

“러닝크루?”

“난 러닝한 지 오래됐는데?”

“좋은 취미다. 맘에 들어.”

“심안이 너도 크루?”

“아니, 아니. 난 모여서 하는 것은 별로.”

“여전하네, 한심안!”

“사람이 변하니? 사랑처럼 사람은 잘 변하지 않아.”

“사랑?”

“응, 사랑. 내가 아는 한 그래.”

“사랑은 잘 변하지.”

“너의 사랑은 그런가 보다?”

“심안이가 아니라면 아닌 거지. 사랑은 변하지 않아.”

“내 편 되어줘서 고마워.”

“연락해 줘서 고맙다, 심안아. 진심이야.”

이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왠지 기쁘고 설레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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