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라은

by 홍경

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치킨버거 세트를, 김라은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김라은의 옆엔 기내용 캐리어가 세워져 있었고, 제주의 봄 날씨에 맞춰 서울의 계절색보다 조금 얇은 니트와 실크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입도 대지 않고 섬세하게 정리된 네일 아트의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고 있던 김라은이 문득 생각난 듯 류에게 말했다.

"고등학생 되니까 제법 어른스럽네."

류의 대답은 듣지 않고 라은이 이어 물었다.

"그런데 할 말 있다며. 할 말이 뭐야?”

베어 문 햄버거를 다급히 씹어 삼키며 류가 입을 열었다.

“엄마, 형이….”

류가 라은의 눈치를 보며 말을 멈추더니 빨대를 입에 물고 콜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라은은 미간을 좁혀 네일 아트와 큐티클의 결점을 찾으려는 듯 한동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라은은 차분히 류를 바라보지 않고 날카롭게 말했다.

“형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엄마, 우리 담쌤 여잔데 아무래도 아는 사이 같아요. 담쌤 이름을 듣더니 엄청 놀라서, 담쌤 나이도 묻고, 그리고도 학교생활은 어떻냐 하면서 내 학교 일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그 여자 나이가 몇 살인데?”

“둘이 친구던데. 그러니까, 나이가 같다고요.”

“그리고?”

“그게 다예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잘해. 그리고 이상한 거 있으면 꼭 말하고!”

“네.”

라은이 연한 분홍색에 자잘한 꽃이 인쇄된 봉투를 꺼내 류에게 건넸다. 익숙한 듯 류는 봉투를 두 손으로 집어든 후 꾸벅 인사하며 어눌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자신의 생모가 있다는 사실을 류가 알게 된 것은 제주에서 서울로 이사한 직후였다.

류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이한은 제주를 떠나 서울에 집을 구했다. 이사를 하고 한 달에 걸쳐 이삿짐 정리를 마쳤을 때 김라은이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찾아왔다.

류의 유치원 하원 시간이 가까웠지만 그전에 돌려보내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현관문을 열어둔 채 김라은을 들어오게 했다. 구두를 벗고 몇 걸음 들어선 라은을 바라보며 마주 선 이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말하는 것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내가.”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묻잖아!”

“이한! 개명을 했던데, 그런 식으로 나를 따돌릴 수 없는 건 알 테고, 이케이를 지우고 싶었나?”

"내 일에 상관 마."

“말씨가 참, 그래? 여전히. 그렇게 싫어? 내가?”

“그러게. 그러니 이젠 여기는, 이 집엔 다시 오지 않았으면 하는데.”

“못 올 곳인가 여기가?”

“네가 올 곳은 아니지, 여기가!”

“손님에게 물 한 잔 주는 게 예의 아닐까?”

“집에 컵이 없네, 보다시피.”

컵이라도 찾는 듯 라은이 집안을 훑더니 물었다.

“그런데 류는 왜 없어?”

“류를 네가 왜 찾는데.”

“내 아들 류를 내가 찾아야지, 누가 찾을까?”

이한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며 라은을 밀쳐냈다.

“가! 가라고! 꼴도 보기 싫으니까!”

신발도 신지 못한 라은이 아파트 현관까지 밀리며 소리쳤다.

“내 아들 류 데리고 와! 내 아들 어딨는지 말하라고! 내가 너 보러 왔겠냐? 내가 류 엄만데, 무슨 짓을 해도 안될걸? 엄마하고 아들을 어떻게 떼어 놓을 건데?”

이한이 기내용 캐리어를 세게 던지듯 밀며 라은에게 다가서다 뒤에서 멍하니 보고 있는 류를 발견했다. 라은이 이한의 시선을 따라 뒤돌아 류를 바라보았다. 류를 끌어안으며 라은이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네가 류구나! 내가 네 엄마야, 엄마. 보고 싶었어, 아가.”

라은에게 안긴 류가 영문을 모르겠는 듯 이한을 바라보았다. 이한은 라은에게 안긴 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늘어져 있던 류의 작은 팔이 조심스럽게 라은을 감쌌다.

라은이 류를 번쩍 안아 올리며 뒤돌아 이한을 바라보았다. 라은의 눈가에 눈물은 없었고 오히려 그녀의 방긋 웃는 모습을 본 이한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이한이 류를 라은에게서 떼어내 바닥에 서게 한 후 말했다.

"류야 집에 잠깐 들어가서 기다려. 형은 여기서 얘기만 하고 금방 들어갈게."

류가 이한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라은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이한이 현관문을 닫고 라은에게 말했다.

"달라질 것은 없어."

"달라질 게 뭐 있나? 나도 알아."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원하는 거? 너?"

"헛소리하지 말고."

"그 말 진짜 오랜만에 듣는다. 추억 돋네! 내가 진짜 갖고 싶은 게 있는데 그건 천천히 알게 될 거야. 우리에겐 다행히 시간이 많거든. 이한!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망쳐도 너는 결국 이케이야. 그건 그렇고, 거기 내 구두 좀 꺼내줄래?"

이한이 현관문을 열고 라은의 힐을 집어 들어 라은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이 흡족한 듯 라은이 빙긋 웃으며 이한의 한 팔을 잡고 힐에 발을 꽂아 넣었다. 라은의 손에 잡힌 팔을 빼지 않고 견디는 이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내용 케리어를 끌며 복도 끝으로 걸어가는 라은이 사라질 때까지 이한은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지켜보았다. 아직 낮이었고 별안간 비 냄새가 나더니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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