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이

by 홍경

2학년 복도, “야! 이케이가 김라은이랑…” 누군가 소리치며 달려갔다.

학교는 케이와 김라은에 관한 소문으로 술렁였다. 같은 학년이지만 반이 다른, 케이와는 아무 접점이 없던 김라은이 케이에게 접근한 것은 고1, 학기 초 무렵부터였다.

제주로 전학한 이후 없는 사람처럼 지내온 케이에 비해 라은은 그 세계의 중심이었다. 외향적이고 거침없으며 자신감 충만한 라은은 모두의 호감을 흡수했다. 제주로 전학하기 전 케이의 모습과 흡사했다.

휴지통을 비우는 케이를 멀리서 바라보던 라은이 가까이 다가와 명찰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이케이. 이름이 특이하네?”

케이는 양쪽 볼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휴지통 바닥에 붙은 종이를 떼어 내려 애썼다. 라은이 팔짱을 끼며 케이를 바라보고 섰다. 케이가 귀찮다는 듯 휴지통을 톡톡 두드리며 심드렁히 물었다.

“혼잣말이야, 묻는 말이야?”

“어떻게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잣말을 하겠니? 묻는 거지, 당연히.”

“자기 이름 특이하다는 사람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대답은 됐고. 너, 내 남자 친구 해라.”

“싫은데.”

“난 너 맘에 드는데.”

“나, 여자 친구 있는데?”

“있다고? 없다던데, 애들이?”

“있어.”

“다른 학교?”

케이가 말없이 짜증 난 표정으로 휴지통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 종이를 손으로 떼어낸 후 라은의 눈을 쏘아보았다. 라은이 흠칫 놀라 한걸음 물러섰다. 그는 라은의 동그랗게 맑고 예쁜 눈에서 섬세히 경사를 이루는 코끝까지 훑어보았다. 확인을 마친 듯 케이 특유의 싱긋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여자 친구, 여기 안 살아. 어린애들 사이는 이사 가면 끝나는 거 아닌가?”

긴장하던 라은의 표정이 말갛게 흩어지며 밝아졌다.

“그래? 그럼 우리, 사귀는 거다?”

케이는 수업 시간 외에는 미술실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라은은 선 긋기조차 서툴지만 스케치북을 들고 케이와 함께 했다.

함께 있긴 하지만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케이의 곁에서 쉼 없이 조잘대던 라은이 어느 날 물었다.

“케이야 너 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도 그림 잘 그렸어?”

“아니.”

“걔는 뭘 잘했어, 그럼?”

“걔 아니고 심, 안. 심안이야, 이름.”

“안이….”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라은은 지름이 작은 우산을 펼쳐 케이와 둘 사이에 우산을 높이 들어 올려 하늘을 가렸다. 라은이 비를 피해 케이에게 몸을 조금 붙이자, 케이는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눌러쓰고는 우산 밖으로 빠져나갔다. 우산의 반지름만큼 떨어져 케이가 비를 맞고 걸었다. 라은은 우산 속에서 고개를 숙인 채 발등을 바라보며 걸었다. 산지천이 보일 때쯤 비가 그쳤다. 우산을 털어 접으며 라은이 말했다.

“아, 진짜 날씨…”

“안이는 글쓰기를 잘했어.”

라은은 잠자코 들으며 우산을 돌돌 말아 똑딱이를 채웠다. 케이가 말을 이었다.

“정말 글을 잘 썼어. 체육, 음악, 미술 빼고 다 잘한 것 같아. 나는 그 반대지만. 심안이는 이름처럼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 너무 잘 읽어서 불편할 정도로.”

가벼운 비에 씻긴 산지천이 도심을 가르며 흐르고 있었고 라은은 물속에 우두커니 섰는 왜가리를 바라보았다.

“왜 이사 왔어?”

“어른의 일이지.”

“남의 얘기는 곧잘 하면서 네 얘긴 왜 안 해?”

“내 얘기하는 거 재미없잖아.”

“나는 너의 얘기를 듣고 싶지, 당연히. 네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처음이라 난 어째도 좋아.”

얕은 물에 발을 담그고 눈감고 서 있던 왜가리가 물가에 어느새 나타난 노랑할미새의 방해로 의식이 돌아왔는지 몇 걸음 움직이다 본디 모습으로 자리 잡고 멈춰 섰다.

“이런 얘기도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너무 어린 사랑은 쉽게 죽어. 약하기 짝이 없거든. 생각해 보면 그렇게 화낼 일도, 실망할 일도 아니었는데 그땐 모든 게 참기 힘들고, 다 뱉어냈어. 마음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어.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인데 그게 전부인 것처럼 말해버렸어. 한마디로, 나는, 그저 애새끼였을 뿐이야. 내가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우린 더 단단해졌을 텐데.”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라은은 우산을, 케이는 모자를 쓰고 조금 떨어져 함께 걸었다.

갑작스레 비가 내리려는지 먹구름이 하늘을 덮을 때 서서히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가 케이의 집 마당에 내려앉았다. 식도암이었던 어머니는 미라처럼 마른 몸으로 방이 아닌 마루에 눕혀져 있었다. 아침부터, 방은 답답하다며 마루에서 바람을 쐬고 싶다고 성화여서 케이와 아버지는 어머니를 마루에 눕혔었다. 후덥지근한 제주의 바람이 마루를 쓸어내고 그녀는 힘겹게 쇳소리로 거듭, 거듭 물을 청했다.

“목이, 말라, 물, 좀, 줘. 여보, 나, 목, 말라, 케이야, 엄마, 물 좀…”

어머니가 케이를 향해 고개를 힘겹게 돌리려 하지만 돌리지 못했다. 케이는 괴로운 듯 마당 너머 돌담을 바라보았다. 곁에서 어머니를 지키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부르며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살아있었어도 죽은 사람 같았던 어머니가 숨을 거뒀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자 아버지는 흐느껴 울었고, 바람에 흔들리던 빨랫줄의 어머니 옷가지들이 내리기 시작한 비에 젖고 있었다.

케이는 조용히 일어나 마루에서 마당으로 나가 연분홍 바탕에 자잘한 보라꽃이 그려진 어머니의 옷을 걷었다. 보드랍고 얇은 감촉의 옷을 손에 쥐고 마루를 바라보며 울었다.

'심안아 우리 엄마 죽었다.'


어머니의 무덤은 봉긋한 봉분에 집의 담처럼 네모로 돌을 낮게 쌓아 둘러쳐졌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묻고 그 앞에 제를 올리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무덤가에 술 대신 물을 조심스럽게 뿌려주며 그는 다정히 말했다.

“해수야, 목 많이 말랐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목마름 없는 곳에서 나, 기다려. 고생 많았어."

검은 정장 상복을 입은 케이는 어머니 무덤 근처 밭두렁에 철퍽 앉아 있었다. 그 곁에 서있던 라은의 손에는 보랏빛 순비기나무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흰 양말을 신은 맨다리의 라은은 신부처럼 케이 어머니의 무덤가로 조심히 걸어가 그녀에게 헌화했고, 그때 케이가 먼 수평선을 향해 울부짖었다.

"엄마! 나! 걱정하지 마! 아빠도! 걱정하지 마! 열심히 살게! 목마르게 해서! 정말, 미안해!"


케이와 아버지는 어머니의 남은 유품을 천천히 시간 들여 정리했다. 아버지의 담담함에 비해 케이는 어머니의 손길이 닿았던 물품들을 만질 때마다 자꾸 눈물을 흘렸다. 물건 하나, 하나를 잊지 않으려는 듯 소중히 어루만지다 상자에 넣었다.

케이가 어머니의 사진을 정리하며 흑백 사진과 컬러 사진 몇 장을 자신의 문고본 책에 끼워두었다. 그리고 그중 제일 젊은 모습의 어머니 사진을 보며 스케치를 시작했다.

스케치 평면의 선에서 면의 음영을 입히며 입체감을 만들어 냈을 때 케이는 당황했다. 어머니의 젊은 얼굴과 심안의 얼굴이 무척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녀들은 서로 체형과 머릿결과 이목구비가 놀랍도록 비슷했다. 언어를 구사하는 방식, 책을 읽을 때 집중하는 모습, 싫은 것을 피할 때의 표정, 음색마저 흡사했었다.

케이는 오래되어 빛바랜 어머니의 사진이 흐리기도 하거니와 마음에 새겨놓은 심안의 얼굴 탓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릴수록 어머니와 심안의 얼굴이 뒤엉켜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원형이 되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면 케이는 어머니가 눕혀져 있던 마루, 그곳에 앉아 흔들리는 빨랫줄을 바라보며 젊은 시절 어머니이기도 하고 심안이기도 한 그 누군가를 그리워했다.

월요일 연재
이전 11화김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