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나기로 한 월요일, 오늘이다.
만나기 전에 연락해야 할지 조금 고민한다. 나는 그러지 않는 편이지만 대개 그러는 것 같으므로. 고민하면서도 계속 미루다 결국 퇴근 시간이 된다.
이한과의 약속 시간은 세 시간 정도 남았고, 집에 돌아가 거실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본다. 시간이 선명하고 정직하게 흐른다.
'심안, 나 지금 이동해. 조금 있다 만나!'
이한의 문자를 확인하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컬이 있는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청바지에 연한 하늘색 셔츠를 넣어 입는다. 짙은 감색 아우터를 입고 작은 손가방에 컨버스를 신는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그는 슈트 차림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귓바퀴가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심안, 배고프지?”
“응, 아니? 난 괜찮은데 넌?”
“나는 아주 조금. 따뜻한 차 마시고 곧 나가자.”
“히비스커스 어때?”
“응, 좋아.”
붉고 시큼하고 따뜻한 액체를 얼마간 말없이 마신다. 마음이 조금 이완되며 포근해진다. 테이블 아래 검은색 구두의 이한이 발을 떨고 있다. 무의식 중에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그의 무릎에 내 손을 얹고 진정시키는 상상을 한다.
투명한 유리 찻잔은 내려놓으며 그가 말한다.
“새삼 얼굴 보니 또 묻고 싶어진다. 잘 지냈어?”
“새삼 물으니 새삼 대답할게. 한편으론 잘 지냈고 한편으로는 엉망이었어.”
기대했던 대답이었는지, 그 반대였는지 모르겠지만 이한이 내 얼굴을 살피며 대화를 잇는다.
“삶이 반듯하다가 구겨지다 그러는 거 아니겠어? 물론 계속 구겨지는 인간도 있지만. 너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인데, 내가 보기엔.”
“너 역시 내가 기억하는 너의 옛 모습을 아직 그대로 가지고 있어. 그래서 전혀 낯설지가 않아.”
“나는 네가 알던 그 케이가 아니야. 몸체에 영혼을 이식했다 할 수 있지.”
“네가 말했던 대로 누구나 계속해서 변하지 않을까? 흐름이고 방향으로써 인간이니까. 고정된 것이 안정감은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너는 나의 미래에, 나는 너의 과거에 마음을 두었었나 보다. 어쨌든 서로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다행이다.”
내가 진심을 담아 그를 보았고 이한이 떨던 발을 그대로 조용히 멈춘다.
근처 라멘 집에서 마제소바와 돈코츠라멘을 시킨다. 맥주 한 병을 두 개의 잔에 나누어 따른다.
“심안아, 남자 친구 없어?”
“응.”
“언제부터?”
“너 전학 간 뒤부터…는 아니고 임용되기 전에 사귀었었고 그 뒤론 없어. 너는?”
“여자 친구는 없고, 다른 것들은 좀 있어.”
‘다른 것들’이란 것의 의미를 순간 짐작해 본다. 주식? 부동산? 코인?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이한이 큭큭 소리를 내며 실없이 웃더니 맥주 한 병을 더 청한다. 주방을 향해 길게 둘러진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주황색 불빛에 머리를 묻고 저녁을 먹는다. 예상했던 설렘이나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익숙하고 당연한 분위기,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조금 혼돈스럽다.
긴 다리를 직각으로 접어 사선으로 나를 향해 앉은 이한의 무릎이 움직일 때마다 내 다리에 닿는다. 그럴 때마다 등이 부르릉 울린다. 문득 소주가 마시고 싶어져 소주를 주문한다. 가게 주인이 차가운 소주와 소주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놓아준다.
나는 그가 소주병 따는 모양을 지켜본다. 공주를 깨우는 시노(侍奴)의 손처럼 부드럽고 조용하게 병을 흔든 후 힘들이지 않고 병마개를 비튼다. 소주병을 흔들어 따는 방법은 수없이 많겠지만, 병이 비틀어지며 나는 소리도 모두 다르겠지만 이한의 것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술을 마시며 서로의 직장 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교사라는 게 직업으로만 인식하면 정말 대재앙이야.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교사는 한 인간의 인생에 많은 흔적을 남기는 존재라고 생각해. 그리고 또 그런 게 있다? 내가 아무리 진심을 다해 좋은 씨앗을 심어주려 해도 뱉어내는 놈들이 있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달까?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나. 끝없이 뱉어내던 놈들이 오히려 나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하드라. 신기하게도.”
“정말 좋은 말이다. 심안이를 선생님으로 만난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지. 넌 사람을 차별 없이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인 걸 내가 잘 알지.”
어느새 이한과 나의 무릎이 맞닿아 있다. 나도 그도 알지만 붙여 둔다. 약간의 어렴풋한, 기분 좋은 온기다.
“이한, 너는 사업을 어떻게 시작했어?”
“어쩌다 보니?”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돌아가신 거니?”
“아, 그거…”
그가 말끝을 흐리며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신다.
“가족 얘기, 불편하면 안 해도 돼. 불편했다면 미안하다.”
이한이 몸을 돌려 고쳐 앉는다. 옆얼굴이, 뭐랄까, 무척 외로워 보인다. 지나간 이한의 시간이 찰나에 내 마음에 와닿는다. 너무 깊이 묻힌 덩어리가 느껴져 나는 관심의 거리를 넓혀 조금 뒤로 물러서며 질문하지 않기로 한다.
“이한, 있잖아, 네가 그려준 스케치, 그거 나 아직 가지고 있다?”
“그렇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지, 인마!”
“넌 아직도 그림 그려?”
“예전처럼은 아니지. 요즘은 제품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곤 해. 지나가는 여자들의 머리카락 숱이나 길이, 형태, 색깔을 눈여겨보지. 스타일을 더 돋보이게 할 아이템은 매출이 안정적이어서 요즘은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아이템을 구상 중이야.”
“너, 그때, 실외 화장실 그린 수채화 진짜 엄청났었는데. 나는 그림에 있어 대상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그때 알았잖아! 그 그림 제목이 ‘내가 본 화장실’이었나?”
“응, 맞아. 우리 그때, 학교 교정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풍경화를 그렸지. 반 아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아 벚꽃이나 나무를 스케치하고 있을 때 나는 멀찍이 떨어져 실외 계단참에 앉았어. 딱히 뭘 그릴까, 따위 고민 없이 실외 화장실을 그렸어. 다음 날, 네가 아이들의 스케치북을 걷어 미술실로 옮길 때 나를 지목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너는 미술실에서 내 풍경화를 칠판 턱에 걸쳐 세운 후, 뒤로 대여섯 걸음 물러선 뒤 흡사 갤러리의 전문가라도 된 듯 왼팔을 접어 배꼽 앞에 붙이고 오른손으로 턱을 슥슥슥 문지르며 말했어. ‘히야~ 정말 대단하다! 아무것도 아닌 화장실을 이렇게 잘도 그려놓으니 느낌이 다르구나!’ 내가 그린 그림은, 모래색의 페인트가 칠해진 화장실 벽을 묽은 노랑과 주황으로 밑 색을 잡고 묽은 파랑, 보라, 초록으로 음영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해. 대충 그리지 않았지만, 열심히 그린 것도 아닌 그런 정도의 그림이었어. 사실 수채화는 색을 덧바르는 몇 가지 규칙이 있거든? 못 그린다고 하던 사람이 공식처럼 외워서 채색하면 얼추 봐 줄만 한 그림이 되거든. 특히 자연물, 그러니까 꽃이나 나무는 형태에 따라 어색해지거나 어긋나거나 하지 않아서 어떻게 그려도 잘 그린 것처럼 보이지. 너, 보라색은 무슨 색과 무슨 색을 더하면 만들어지는지 알아?”
“아니. 무슨 색인데?”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가 되물었다.
“파랑과 빨강! 이건 거의 감각의 영역인데, 넌 진짜 안 되겠다.”
“뭐야! 그렇게 말하니 기분 나쁘네. 얘가 술맛 돌게 만드는군!”
우리가 그렇게 마제소바와 돈코츠라멘을 절반쯤 남기고 마신 술은 소주 두 병과 맥주 두 병이다. 마셔도 취할 것 같지 않은 적은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사이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은 하나, 둘 나가고 우리만 남았다. 가게 주인은 노동요로 알맞은 음악으로 바꾸어 틀고 주방 청소를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눈치를 주어도 우리가 일어나지 않자 마침내 그는 이 음악을 재생한다, 015B의 이젠 안녕.
이한과 나는 계산을 하고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가게를 나오며 해맑게 합창한다.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