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력한 것이지만 내가 하지 않은 것과 같은, 취중의 카카오톡이나 MMS는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평소보다 정확한 편이다. 마치 한 번도 틀려본 적 없는, 그것에 집착하는 한 영혼이 내 몸에 잠시 깃들어 벌여놓은 일처럼 말이다. 지수쌤에게 나는 이 상황을 ‘지나가던 고양이가 잠시 내게 들어왔다’ 고 표현한다.
‘지나가던 고양이 영혼’이 입력한 문장의 단단한 형태는 실로 놀랍다. 완벽한 주어와 서술어의 짝지음과 중간에 어물쩍 물러서거나 어눌하게 논지를 흐리지 않는 분명함에 소름이 끼친다. 대개 토요일 아침에 술이 깨어 폰을 확인한 후 자책하며 후회하기 일쑤였지만 요즘은 다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 면도 있었구나,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침묵했었는데 표현되길 원했던 감정이었어, 무시당했을 때 물러섬으로 넘겼는데 맞서고 싶었구나, 이런 식으로 날 것의 속내를 가늠할 수 있다. 그렇게 속내를 인정할수록 취중 어조도 좀 옅어지고 송수신 회차도 줄어든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결국 취하지 않고, 다시 말해 ‘지나가던 고양이 영혼’의 힘을 빌지 않고도 이한에게 연락했다. 그 일로 인해 이한은 나와 같은 무게로 짐작되는 감정을 품고 있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고백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송신한 시간대인데 나는 그 순간 충동적이지 않았으나 이한은 내가 충동적으로 연락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한은 내가 민망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잠깐만! 먼저 연락한 것이 무엇이 어때서! 그것이 충동이든 심사숙고한 끝의 결과이든 무슨 차이임? 뭐라도 해야 살 것 같은 사람이 먼저 하자, 제발.) 어느새 마음이 쪼개져 속 시끄럽다. 커피 한 잔 마셔야겠다. 일어서서 마음에 드는 머그잔을 집어든다. 도톰하고 낮고 넓은 원기둥 모양, 고양이의 유연한 등처럼 굽혀 붙인 손잡이. 생각이 많아질 때는 일단 몸을 움직이는 게 도움이 되니까.
모래놀이에서의 승자는 모래성의 모래를 많이 가져가는 사람이 아니라 막대기를 쓰러뜨리지 않는 사람이다. 가운데 꽂아놓은 막대기가 쓰러지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스럽게 소량의 모래를 긁어 갈 것이다. ‘우리’는 둘 중 누군가 폭풍처럼 달려드는 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에 한 손 가득 모래를 긁어 가는 위험한 터프함 따윈 없을 테니까.
나를 위해 타로 카드를 펼치지 않지만, 오늘은 예외로 한다. 토요일 밤이고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하지 않던 짓을 하기 좋은 요일 아닌가.
마음을 차분히 하며 작은 소리로 조용히 세 번 주문한다.
"이한과 나의 관계 흐름을 보여주세요."
타로카드를 잘 섞어 반원 모양으로 부드럽게 늘여놓은 후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세 장의 카드만 뽑는다. 마음에 파장이 일며 뭉근히 뻐근하다. 나와 타로의 괘는 잘 연결되어 있다.
과거 Ten of Swords, 현재 The Hanged Man, 미래 The Emperor.
(해석) 과거는 서로에 의한 상처로 돌이킬 수 없게 아팠고, 현재는 선택적 멈춤의 상태이며, 미래에는 관계의 단단함은 있겠으나 감정 표현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와 이한의 관계는 누가 많이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먼저 솔직해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가 솔직해진다 해도 그 끝이 예견된다면 아무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세 개의 카드 중 사랑이나 마음의 의미를 가진 카드는 단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과거를 상징하는 카드는 한 남자가 등에 열 개의 칼을 꽂은 채 쓰러져 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고 칼 하나, 하나, 서사가 덧입혀져 완성의 10이 될 때까지 참았거나 모른 채로 당한 사람이다.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 타로 카드답게 영원한 끝이나 멈춤은 없다. 열 개의 칼에 꽂혀 쓰러진 남자 너머로 노랗게 밝게 빛나는 해가 떠오려 한다. 열 개의 칼에 꽂혀도 인간의 인생은 담담히 또 시작되고 흘러가는 법이다. 서브 카드를 뽑아볼까 하다 그만둔다.
카드에게 보낸 질문이 중의적이다. 알고 있다. 카드는 나와 이한을 구분하지 않고 뒤섞인 기운을 보여준다. 그래도 그쯤이면 충분하다. 어차피 기운은 이 순간에도 바뀌고 있고 계속 바뀔 것이다.
자정 무렵 스마트폰 벨소리, 이한이다. 나는 지체 없이 곧바로 응한다. 이한 역시 내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말을 흘린다.
“안아, 우리 매장 직원 뽑았어.”
“직원 뽑을 만큼 매출이 나오나 보네?”
“응, 요즘 고가의 제품 매출이 점점 늘고 있고 중저가는 원래 매출이 많았어.”
“나 ‘케이’ 가본 사람이잖아. 깨끗하고 아기자기하던데? 제품 분류도 잘 되어있고, 진열된 제품도 정말 마음에 들었어. 매출이 높을 만해. 잘 되는 곳은 다 이유가 있지.”
“그렇다면 정말 기분 좋은걸? 직원 덕에 내가 쉴 수 있는 날이 조금 더 늘었어. 그래서 말인데 심안아, 우리 월요일에 만나자.”
“응?”
“월요일에 보자고. 밥을 먹든 술을 먹든 하자, 안아.”
“어, 응, 그, 그래.”
이한이 소리 내어 웃는다. 옛 생각이나 나도 소리 내어 따라 웃는다.
“밤도 깊은데 내가 뭐 하나 읽어 줄게. 끊지 말고 잘 들어봐.”
이한이 서둘러 책장 넘기는 소리, 그리고 숨을 짧고 깊게 들이마신 후 읽기 시작한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어때?”
내가 밝게 웃으며 묻는다.
“뭐야?”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시가 귀엽지?”
“네가 내게 전화했으니까 저 마음이 내 마음인 거 맞지?”
“응, 정확해! 너의 마음이 내게 전해지는 그대로의 시여서 너에게 읽어줬지. 마침, 조금 전에 읽던 시집이었어.”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한걸!”
나와 이한이 함께 웃는다. 잠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지만 차분히 그에게 ‘굿 나이트’ 인사하며 끊는다.
이게 뭐야! 이런 거였어? 잠깐 맡겨두었던 마음 되돌려 받은 듯 따뜻하고 간지러운 기분이잖아! 소파에 그대로 부끄러운 듯 얼굴을 묻고 눕는다. 목소리, 목소리, 이한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를 재생한다. 엎드려 누운 채, 두 주먹을 머리 위로 뻗어 작은북 두드리듯 소파를 두드리며 수영하듯 발차기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속에서부터 몸 밖으로 뻗어 나오는 간지러움을 참을 수가 없다. 볼은 자꾸 달아오르고 아, 어떡하지, 너무 좋아!
스마트폰을 다시 집어 들다 그만둔다. 지수쌤도 잠들었을 시간이다.
한이와 더 많은 얘기를 나눴어야 했어. 아니야, 그 정도가 딱 좋아! 왜 이리 질척대?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몰라? 그동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잖아. 나, 지금 살아있다는 느낌이 충만해! 마음속에 밝은 노란색이 가득히 칠해졌어.
나는 양치하다 말고 칫솔을 입에 꽂은 채 어눌하게 중얼거린다.
"아오, 진짜 미쳤나 봐."
그러고는 쿡쿡 웃는다. 치약 거품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오며 작은 비누 풍선을 만든다. 무지개 빛을 띤 작고 투명한 비누 풍선이다. 그 한 알을 바라보며 고백하듯 말한다.
"나, 너 좋아해, 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