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지배하려는 자

by 홍경

주말의 낯선 시간대 낯선 번호의 전화, 살짝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누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주말에 전화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류의 엄만데요…”

여자는 이어 말한다.

“불쑥 죄송합니다.”

나는 몹시 혼란스럽다. 류의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라 자신을 소개하는 목소리는 너무나 젊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내 또래의 음색과 억양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싶지만, 말없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답한다.

“이류 학생의 어머니시라는 말씀이세요?”

“네, 선생님, 류가 법적으로 조부모님 자식이긴 하지만 실제로 제가 엄마입니다.”

“그 부분은 사실 확인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류가 지금 저와 있어요. 바꿔드릴게요, 잠시만요…”

곧 류의 목소리가 들린다.

“선생님, 여보세요?”

나는 재차 혼란스럽다. 아무 말 없는 내게 류가 말한다.

“선생님, 이 사람 우리 엄마 맞아요. 다시 엄마 바꿔드릴게요.”

신종 보이스피싱인가? 류의 목소리가 맞았나? 갑자기 엄마라는 사람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류의 형은 형이 아닌 무엇이지?

전화기로 또랑또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넘어온다.

“선생님,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이 번호로 연락하세요. 류 초등학교 때부터 제가 곁에서 챙기고 있어요.”

“네, 아니, 죄송한데, 류의 보호자분도 전화 주시는 분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아, 네. 그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복잡한 가정사 때문에 류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늘 걱정됩니다.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 사람이라… 여자는 케이를 그 사람이라 부른다. 머릿속이 복잡한 나는 무기력한 AI처럼 대답한다.

“죄송하지만, 사실 확인은 다시 해보겠습니다. 지금 선생님께 뭐라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 이해 부탁드립니다.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나는 의식적으로 ‘류의 어머니’가 아니라 대개의 민원인을 부를 때 사용하는 흔한 호칭 ‘선생님’을 사용하여 선을 긋는다.

잠시 허공을 향해 앉아 있다. 무채색의 마음과 표정으로 러닝복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제법 바람이 선선하다. 이 계절 낮의 얼굴은 여름의 빛을 띠지만 공기는 이미 차갑게 식었다. 때는 그늘에 섰을 때 본모습을 드러낸다. 여름의 그늘이 반갑고 안온한 시원함을 주었다면 지금의 그늘은 불안한 서늘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고 무엇도 어림잡아 개념화하고 싶지 않다. 한로로의 입춘이 귀에 흐른다. 노래에 맞추어 걷기 시작한다.

이탈하면 나는 죽는다고 본능적으로 나의 그림자가 내게 속삭인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있고 싶다. 무엇도 상관없이 살고 싶다. 간절히 그런 생각으로 걷는다. 한로로가 이어 감미롭게 속삭인다. ‘이 벅찬 봄날이 시들 때 한 번만 나를 돌아봐요…’

교실에 들어갈 때,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류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류의 생모가 나타났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담임으로서 공지 사항은 학부형에게 알리면 된다. 케이, 아니 학부형 이한에 관해서도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기로 한다. 이탈하면 죽는다고 다시 한번 그림자가 내게 경고한다. 나는 그림자의 말을 깊이 새긴다. 그러면서 마음이 일렁일 때 찾아오는 호흡곤란을 떠올린다. 아직 제 차례가 아닌 것처럼 녀석은 아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생경한 느낌이다. 평소라면 녀석이 몇 번이고 찾아와 극한의 공포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을 터이다. 하지만 녀석의 기척을 느낄 수가 없다. 하나를 얻으니 하나를 잃은 셈인가? 어처구니가 없군.

내가 이한을 찾지 않듯이 이한 역시-나와 다른 세계에 갇혀 있음이 분명하다-나를 찾지 않는다.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현재 상황에 안도하며 잠든 후 꿈을 꾼다.

나는 내 또래의 단발머리 여자와 함께 여행 중이다. 단발머리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내게 이곳이 구채구라 알려준다. 나는 비겁하게도 속엣말로 반발한다. 단발머리, 여기는 구채구가 아니라 청의 호수다. 너는 청의 호수를 가보지 않았지? 물론 나도 구채구는 가보지 않았어. 하지만 청의 호수는 지난여름에 다녀왔거든. 그래서 확실히 알아.

단발머리는 나보다 앞장서며 이것저것 참견하고, 아는 체를 해댄다. 나는 왠지 단발머리를 못마땅해하면서도 따라다닌다. 단발머리가 멀찍이 떨어져 물속에 서 있는 사내에게 말을 건다. 둘이 시시덕대며 얘길 나누더니 나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사내와 함께 이동한다. 내가 경계하며 따라간 곳은 사내의 집이다. 검은 칠이 된 송판을 이어 붙여 만든 조악한 집으로 군데군데 틈이 많아 비는커녕 바람도 막지 못할 것 같다. 단발머리는 제 집인 듯 욕실이란 곳으로 가서 씻는 소리가 들린다. 한 공간에 어색하게도 사내와 내가 마주 보고 서 있다. 사내가 나를 힐끗 보더니 몸을 돌려 허술한 문고리의 자물쇠를 단단히 잠근다. 그가 내게 허튼짓을 할 것 같다. 나는 긴장하며 실내의 집기를 살핀다. 내 예감대로 사내는 나를 덮치려는 듯 억세게 다가선다. 내가 식탁 앞에 놓였던 의자를 집어 들어 사내를 내리찍는다. 무척 통쾌한 기분이다. 갑자기 사내를 죽일 수도 있을 만큼 복수심과 용기가 끓어오른다. 하지만 순간 판단한다. 나의 상대는 사내가 아니라 단발머리다. 바닥에 뒹굴던 사내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내가 차분히 명령한다. 쟤, 데리고 와. 사내가 겁에 질려 단발머리에게 뛰어간다.

이쯤에서 잠이 깬다. 시간은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었다. 구채구가 어디지? 내가 모르는 곳이 꿈에서 언급되었다. 나는 재빨리 전기등을 켜고, 머리맡에 두었던 꿈을 적는 수첩에 상세히 적는다. 이렇게 꿈을 수첩에 적은 지는 오래되었다. 중학생 때쯤부터 해온 것으로 일상의 일기장보다 꿈을 적는 수첩의 수가 더 많다. 꿈을 적다 보면 알게 된다. 일상의 일기는 제한된 의식의 기록일 뿐이지만 꿈을 적는 수첩은 광범위하고 상징적인,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록이란 것을.

꿈을 지배하는 것이 나의 목표지만 현실의 내가 완성된 만큼만 지배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미완성의 존재이며 꿈을 완벽히 지배할 수 없다. 나의 불완전함은 꿈속에서 여러 상황과 인물로 모습을 드러내고 꿈을 꾸는 동안 견디며 깨닫기를 강요한다. 비단 이런 상황은 꿈속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현실 속에서도 간간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때마다 견딜 수 없는 불쾌감과 불안함을 느낀다.

구채구를 검색한다. 있다. 놀랍게도 실존하는 곳이다. 내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던가? 기억해 내려 애쓰지만 역시 아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이 꿈에 펼쳐졌었다. 무엇보다 사내를 의자로 내려치던 순간의 통쾌함이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사내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내리꽂은 말 또한 너무 통쾌하다. 내가 의식적으로는 잘하지 않는, 어쩌면 꺼리다 못해 못하고 마는 행동양식이다. 내키지 않아도 감수하며 상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제 살을 파먹던 나다. 이렇게 스스로의 요구를 무시하며 이어가야 하는 인연 따윈 없다. 오늘의 꿈을 적는 수첩의 하단에 이어 적는다.

1. 나는 더 이상 무력한 자아가 아니다.

2. 나는 경계를 침범당하는 위치에 머물지 않는다.

3. 나는 억눌린 공격성을 의식적으로 성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단계에 ‘마침내’ 도달했다.

왜 이한을 향해 이토록 단단한 갑옷을 준비하지? 내 그림자가 내게 묻고 있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질문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은 어두운, 네 시가 다 되어 다시 잠든다. 얕은 잠 속에서 얕고 선명한 꿈을 꾼다. 나는 빨간 실타래의 실을 끝없이 풀고 있고 그 실의 시작점은 이한의 상징물이며 적열 전구의 불꽃처럼 깊고 깊은 중심부로부터 빛나고 있다. 실을 풀어내는 꿈속의 내 심경은 만 갈래로 갈라져 있다. 설레는가 하면 두렵고 고통스러운가 하면 달콤하다. 이렇게 한 사람이 여러 심상의 얼굴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음성으로서의 어느 존재가 내게 묻는다. 그를 오랜 시간 동안 상상으로 빚어왔기 때문이지라고 나는 응한다.

아침에 양치하며 무채색의 얼굴을 하려 노력한다. 내 안에서는 끝도 없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생성해 내고 있다. 이렇게 속이 시끄러워서야 원, 살겠나….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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