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 석양이 화려한 저녁, 실내는 이미 어둡다. 나는 낮부터 내내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진동, 이한이다. 몸을 일으켜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나의 말에 그가 곧 대답하지 않고 잠시 망설인다.
“선생님, 저, 류의 형입니다.”
“네,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류의 학교생활에 대해 궁금하신 점 있으신가요?”
사뭇 사무적인 내 어투에 그가 무언가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며 천천히 말한다.
“괜찮으시면 만나 뵙고 말씀 나누었으면 합니다.”
“학부형과 학교가 아닌 곳에서의 면담은 지양하고 있습니다. 통화로 하시면 좋겠는데요.”
“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한은 자신과 상대의 의사가 엇갈릴 때 사과하는 버릇이 있다. 그는 상대의 감정을 필요 이상으로 살피며 새기는 사람인 것 같다.
“제가 먼저 알려드려야 할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류가 학습용 스마트 패드를 파손했어요.”
“아, 네, 누가 다치지는 않았나요?”
“네, 다치지는 않았지만, 학습용 단말기를 파손한 경우, 수리비의 20%를 변상해야 합니다.”
“변상하겠습니다.”
“변상에 관한 사항은 문자를 통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는 그.
“네, 고맙습니다. 선생님, 류가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나요?”
“류는 좋은 학생이에요. 관계도 원만한 편이고요. 다른 학생들처럼 아직 진로에 대한 탐색이 진행 중인데 특기가 많아서 수능이 목적이라면 괜찮지만, 음악, 미술 계통이라면 입시 준비를 결정해야 하는 마지막 시기입니다.”
생각이 많은 듯 무거운 공기를 견디며 이한이 말한다.
“류가 학교의 얘기를 집에서는 잘하지 않습니다.”
“그건 류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대부분 남학생이 그렇습니다. 꼭 필요한 전달 사항도 전하지 않는다는 걸 교사들은 알고 있어요.”
“그렇군요.”
“그 부분은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안내 사항 문자 보내주시면 확인 후 처리하겠습니다.”
“네, 그럼, 이후에도 궁금하신 점이나 제게 전하실 말씀 있으시면 이 연락처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네, 고맙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이한과의 통화를 마치고 어두운 허공에 숨을 뱉으며 멍하니 앉아 있다.
'또 뵙겠습니다.' 학부형이 닫는 인사로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요즘 학부형과 담임은 그렇게 긴밀하거나 자주 접촉하는 관계가 아니다. 특유의 친근함이 어색하다. 확인한 바에 의하면 형제의 나이 차가 크다. 열일곱 살 차이.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딱딱한 갑옷을 입게 된다. 자신의 본디 내면을 잠시 유보하고 다른 이차적인 자아를 끌어올린다. 바질페스토에 올리브유를 부어 상하지 않게 보존하듯이 본디 실현되어야 할 자신 욕구에 현실의 과제를 덮어 잠시 유보하곤 하는데 우리는 그런 모습을 희생이라 부른다. 이한이 부모님을 대신해 지키고 있는 동생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생 역시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이한과의 통화를 마치고 신기하게도 마음이 안정되며 식욕이 오른다. 삶은 달걀과 간장을 올린 데친 두부와 사과와 땅콩버터를 먹고, 청소하고, 108배를 한다. 정남향의 어둠을 향해 1배, 이한의 붉어진 귓바퀴를 향해 1배, 세상의 모든 형태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평안하길 바라며 다시 1배, 반복, 반복.
마음이 요동치면 나는 숨을 잘 쉬지 못한다. 죽을 것만 같은 극한 공포와 함께 얇은 막에 덮인 듯 버둥댄다. 이 증상은 아주 오래되었고 대처 방법은 알지만 벗어날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내가 중학생일 때 처음 시작되었고 발작적으로 일어났다가 자연 소멸한다. 거의 비슷한 시기부터 나는 계속 같은 꿈을 꾸고 있다. 꿈의 전개는 대개 비슷하다. 상황이나 환경이 조금 바뀔 뿐이다.
내가 꾸는 대개의 꿈은 이렇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시험실에 이르는 계단을 오른다. 공중에 똬리를 틀고 있는 계단인데 아무리 올라도 좀처럼 줄지 않는 계단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허둥대며 계단을 오른다. 입이 마르고 속이 탄다. 어렵게 복도에 닿았을 때는 신기하게도 시험이 시작된 후이다. 시험실의 문이 닫혔고 복도에는 나 홀로 서 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시험실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도 돌봄이나 인정받지 못하고 홀로다. 누가 뭐라 할 것도 같은 마음에 조용히 홀로 시험실 안을 훔쳐보며 변명을 찾는다. 더 이상 애가 타는 조바심은 없지만, 시험실 안에 속하지 못한 낙오자가 되어 실망하고 만다. 어느 땐 계단이 무너져 내려 시험실 복도에도 도착하지 못하는가 하면, 시험실 복도에 시간 맞게 도착하더라도 필기구가 없거나, 가방이 없어지거나, 시험실을 찾지 못해 복도에서 헤맨다. 결국 어떤 꿈에서도 시험실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언제나 문 닫힌 시험실 밖, 복도에 나만 남겨진다. 항상 누가 뭐라 할 것도 같은 마음에 조용히 홀로 시험실 안을 훔쳐보며 실망한다. 애가 타다 결국 실망하는 이 꿈은 아직도 계속 꾸고 있다.
마음의 요동이나 반복되는 꿈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싶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좋다고 하는 명상이나 108배, 요가 혹은 마음공부를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 좀처럼 벗기 힘든 옷처럼 갇혀있긴 하지만 틈새로 숨통이 트이긴 한다. 어찌 보면 목숨줄 같은 행위이다.
씻고 누웠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머리핀 쇼핑백을 연다. 입구를 오므린 테이프를 뜯으니 안에서 지방시, ‘젠틀맨 소사이어티 오 드 퍼퓸’의 향이 퍼져 나온다. 처음엔 남성의 슈트가 향으로 구현되고 미들노트 이후 베이스 노트에 이르면 달콤하기 그지없는 향을 뿜어낸다.
내가 고른 리본 머리핀과 작은 빨간색 곰 인형 가방 장식이 들어있다. 지난해, 고가의 바비인형 장식을 깜찍한 백에 달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학교 아이들은 가방에 온갖 작은 인형과 장식을 10개도 넘게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지금도 그러는 아이들이 눈에 띄지만 예전만은 못하다. 마지막으로 작은 카드를 꺼낸다.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작고 붉은 봉투에 들어있다. 머리핀 품질 보증서인가? 작은 카드를 펼쳐보니 손글씨로 무언가 적혀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당신의 이름입니다.
-K-
나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처럼 정수리 부근이 얼얼하다. 뇌의 반이 타버린 듯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카드의 손글씨는 나를 이끌어 중학교 1학년 2반 교실에 데려다 놓는다.
새 학기, 서먹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반 아이들과 선생님들 사이에서 단박에 ‘핵인싸’가 되었다. 나의 이름 ‘한심안’이 ‘한심한’으로 불릴 때 그것은 웃음 벨이었다. 등교하는 매일 기대되고 신났다. 마음에 드는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것도 좋았지만 그것보다 날 들뜨게 한 진짜 이유는 케이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케이는 운동, 피아노,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공부는 그리 잘하지 못했지만,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정말 많았다.
나와 케이가 처음 말을 나눈 것은 4월이 되기 전 미술실이었다. 미술 수업 후 미술실에 두고 온 책을 가지러 갔을 때 케이는 홀로 미술실에 남아 무언가 열심히 스케치하고 있었다. 내가 책을 들고 나오며 케이에게 말을 걸었다.
“케이! 너 다음 수업 준비 안 해? 이러다 혼난다. 종 친다고.”
케이가 스케치북에 4B연필을 어슷하게 빗금 긋기를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심안, 한심안! 너, 나 걱정해?”
케이가 놀랍도록 정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의 등줄기가 부릉부릉 울렸다.
“그럼, 걱정하지, 안 하냐?”
케이가 스케치북에서 시선을 떼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너도 나 좋아해?”
나는 케이에게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게 사실이어서 딱히 아니라고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케이는 주섬주섬 스케치북과 필통을 챙기더니 부딪힐 듯 나를 지나쳐 교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도 케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케이가 뒤를 살짝 돌아보며 또 씩 웃었다. 케이는 좋겠다. 웃기만 해도 판판하고 반짝반짝해 보이니까. 반짝이는 케이가 교실 문 앞에서 멈춰 서며 내게 말했다.
“한심안!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조심하게 돼서 좋더라. 사람 이름을 또박또박 신중하게 부르다 보면 소중히 느껴져.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말은 너의 이름이야.”
손에 든, 향이 나는 카드를 다시 확인하듯 읽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당신의 이름입니다.'
사실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문장이다. 중1 때 케이에게 들었던 문장은 세상에 둘도 없이 설레고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었지만 카드에 적힌 문장은 시쳇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내 작은 조각들을 맞춰보려 노력한다.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고 머릿속에 방향지시등이 켜진다.
틱톡-틱톡-틱톡-틱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