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죽 튀어나온 마음에 대한 위로

따뜻한 한 마디가 절실한 코로나 블루의 시대

by 흔한여신

일을 하다보면 가끔 상대의 무례함을 견뎌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1

"규정상 이런 서류를 확인하도록 되어 있어서요. 제출하셔야 합니다."
"또 뭘 준비하라고요? 뭐 이렇게 달라는 게 많아요?"


#2

"제출하셨던 서류랑 지금 말씀하신 내용이 많이 다른데, 왜 그런거죠?"
"허 참. 모르세요? 지금 다 어려운거? 영업하지 말라잖아요. 그러니 그렇게 된 거죠."


#3

"죄송하지만 규정상 지급대상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안내한대로 했을 뿐인데, 왜 내 책임이라는 거야? 난 잘못한 거 없으니 책임져!"


일하면서 실제로 들었던 말들이다. 하루에 꼭 한 번 이상 이와 비슷한 실랑이가 벌어지곤 한다.



주변의 지인들과는 거리두기 정책때문에
서로 소통할 일이 줄었는데
일과 관련해 모르는 상대와의 소통량은 오히려 늘어났다.


모든 의사소통이 원활했으면 좋겠건만 서로 기대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쉽지 않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친절함을 잃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하지만 별반 소용이 없는 때도 있다. 내게 전화하는 이들 중 어떤 이는 일이 잘못된 게 다 네탓이라며 생떼를 쓰기도 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거기 앉아있느냐고 호구조사를 하기도 한다. 공무원이란 직업을 선택한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기에 애써 담담하게 반응하지만 가끔은 끓어오르는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다.


나를 비롯한 선배들 그리고 동료들이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다. 그런 한편으로 외부에서 오는 충격은 직원 간 연대하는 힘이 된다. 누군가가 수화기를 붙들고 상대방과 힘겨운 전화를 이어나가고 있으면 어느 새 모두가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무슨 일인지 주변에 속삭여 물어보고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마침내 전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면 모두들 그에게 달려가 온갖 위로의 말을 쏟아낸다. 업무상 판단 실수 같은 일이 아닌 이상 자잘못을 따지는 게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뱉어낸 비수가 그의 마음에 꽂혀 고통받지 않도록 우리는 서로에게 119 구급대원이 되어 준다. 빨리 응급 처치를 하지 않는다면 동료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실함이 퍽 박혀 있다.


출처 트위터 thingandthink


마음처럼 일이 잘 되지 않는 날, 그리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 삐죽하게 나간 말들은 반드시 화살이 되어 되돌아왔다.


베테랑처럼 어떤 순간에도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때론 성질머리가 뻗치기도 한다. 작년 가을에도 그런 날이 있었다.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상처가 새겨진 날이었다. 함부로 입에서 튀어나간 말이 불씨가 되었다. 똑같은 설명을 반복하는 데 지쳐 있었던 나는 계속해서 잘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방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그에겐 그게 나와 첫 전화통화였지만 그 날 나에겐 이미 수십 명의 상대방이 존재했었다. 차라리 잠시 한숨 돌릴 타이밍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아득바득 일을 다 끝내겠다며 앉아 있었다. 결국 탈이 났다.


나의 무례함에 상대는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분명 스스로 잘못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감정이 고조되어 있어 절제심을 잃은 상태였다. 때문에 사과를 할 수 없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상대도 화를 이기지 못하고 내 일터를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큰 목소리로 내 성급했던 처신에 대해 지적했다. 죄송하단 말을 끝내 하지 않고 고집을 피운 나를 나무랐다.


동료들은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나 대신 고개를 숙였고 여전히 사과할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결국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한 바탕이 소동이 있은 후 그 모습을 모두 지켜 본 선배는 식사자리에서 밥 먹는 내내 굽힐 줄 알아야 여기서 살아남는거라고 끝없이 잔소리를 늘어놨다. 그 말에 나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밥알을 우걱우걱 삼켰다.


photo by. Jundori


그 뒤로 내 존재가치에 대해서 오래도록 생각했다.


'슈퍼 히어로가 되지는 못할망정 남에게 구박받는 인생은 살지 말아야지, 언제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남에게 욕먹는 일은 없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런 내 인생은 실패인걸까. 그런 생각에 한 동안 휩싸여 있었다.


"젊은 아가씨가 말이야,
세상 사는 법을 잘 모르네.
내가 그런 것 같아서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알았어요?"


화를 참기 위해, 수련자의 마음으로 입었다는 도복 차림의 아저씨는 내게 이런 말을 남겼다. 정신이 차려지는 한 마디였다기보단 정신이 아득해지는 한 마디였다. 내게 내뱉고 싶은 말을 하고 갔으니 그는 아마 속이 후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내 마음에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단절한 채로 갇힌 세상에서 홀로 공부와 씨름하기를 선택했던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워질 정도로 말이다.




그 날 이후 프로답지 못한 행동으로 내 자신과 상대방에게 괜한 폐를 끼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다. 여전히 몸과 마음이 지친 날엔 목소리 톤에 날카로움이 배어있곤 하지만 전에 비해 많이 차분해졌다. 또 최근에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블루'를 겪고 있는데다가 더 나아가 행동에 생긴 제약 때문에 '코로나 레드'까지 생겼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래서 나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이 겪는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텐데 나는 그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 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내 모난 구석이 들통나기 전에 그런 나를 먼저 알아보고 되려 위로해준 이가 있었다.


며칠 전의 일이다. 남들은 점심식사를 하러 간 시간, 나는 홀로 남아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상담시간을 단축해야 다른 방문객들의 대기시간이 줄어들었다. 곧 내 점심식사 시간도 다가왔다. 때문에 나는 마음이 매우 급했다. 앞의 일들을 빠르게 해치우고 어느 새 남은 인원은 한 명이었다. 머뭇거리며 서류를 꺼내 보였던 그는 이미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지원제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무슨 서류가 왜 필요한지 잘 이해하지 못해 벙쪄 있는 상태였다.


차근차근 설명하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느껴졌다. 결국 랩하듯이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불안하게 요동치던 마음이 상대의 말에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저, 주무관님. 말씀 많이 하셔서 답답하신 거 이해합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이라서요, 잘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말씀해주시면 열심히 따라가 볼게요."


날카롭게 삐죽 튀어나와 있던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다. 당황한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지금껏 일하면서 들어본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로 낯선 따뜻함이었다.


"말이 빨라서 죄송합니다. 다시 설명해드릴게요."


그 순간 나는 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알기 쉽게 설명하려 애썼고 결국 성공했다. 돌아가는 순간까지 예의를 차리는 걸 잊지 않았던 그 덕분에 나는 내 부족함을 다시금 반성했고 남은 하루를 무난히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눈이 펑펑 내렸던 어제 오후. 5시가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전화가 빗발치던 터라 다른 상대방과 전화 중에 어느 사업장과 문자로 연락을 주고 받고 있었다. 필요한 용건을 전달하고 다른 일에 몰두하려던 때였다. 사업장에서 마지막으로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눈이 많이 내리네요. 주무관님 퇴근길 조심하세요.



창밖엔 차가운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는데
내 마음엔 훈풍이 불어닥쳤다.


외롭고 서러운 하루엔 이런 따뜻함이 필요하다. 밖에 나가지 못해,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해, 평범했던 일상이 지워져버린 탓에 괴로운 하루엔 이런 위로가 절실하다. 내 안녕함만이 최우선이 아니기에, 남의 안부도 챙길 줄 아는 사람들이 전하는 애정어린 말 한마디가 나에겐 너무 필요하다. 아니 사실 우리 모두에게 간절한 일이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따뜻함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한편 그런 진심 어린 마음이 많아지기를 늘 바라고 있다.


덕분에 내 하루가 따뜻해 / 고맙다는 말 꼭 전하고 싶었어 / 내게 해줬던 그 말 돌려주고 싶었어
- 따뜻한 겨울(Our Season), 종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