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찾아올 ‘화양연화’를 기다리며
한 동안 봄볕이 참 따뜻했다.
3월치곤 푹한 날씨였다. 이르게 찾아온 봄 날씨에 겨울옷과 겨울침구를 정리할 때가 벌써 다가왔구나 싶었다. 겨우내 황량하던 들판에도 조금씩 초록빛 생기가 감돌고 있었고 나무엔 꽃망울이 움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움츠러들었던 봉오리마다 예쁜 꽃이 피었다. 회색빛으로 가득하던 도시 군데군데 노란빛, 핑크빛 꽃잎이 눈에 띄었다. 어두운 비구름에 가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날씨에도 꽃들은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비록 내 마음엔 여전히 시린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바깥 세상엔 온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다시, 봄이 찾아왔다.
3년 전 이맘 때 쯤. 나는 아직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노량진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얼굴엔 온통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했다. 졸업 후 이렇다 할 만한 신분도 소속도 없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만이 가득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만 이름이 지워진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번 봄엔 좋은 소식이 생기려나. 올해도 내게 기회는 오지 않는 걸까.' 하는 걱정들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그 때 나는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도 알 수 없는 서러움에 복받쳐 소리 없이 울곤 했다. 눈물 방울이 떨어져 문제집이 젖으면 또 그걸 닦아내며 문제를 풀었고 우울한 감정을 애써 삭이며 인강을 들었다.
그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버티던 그 해 봄,
나는 드디어 기다렸던 소식을 접하게 됐다.
첫 출발은 산뜻했고 모든 게 봄 날씨처럼 따사로웠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을 맞게된 후 나는 앞으로 영원히 봄날 속에 살아가게 될 거라 생각했다. 때론 황사가 오거나 비가 내리고 태풍이 올 수도 있단 걸 알고 있었지만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서도 결국 내 봄날은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드디어 소속이 생겼고 직업이 생겼으니까. 비록 내가 전부터 꿈 꿔왔던 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 단계 고비를 넘어섰으니 스스로가 기특했다. 또 행복은 내 마음먹기 달린 일이니 잠시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금방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주변엔 나를 어여삐 여기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 나는 주어진 일에 열정을 불태우려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선배가 내게 '벽지처럼 살아야한다'는 조언을 건넸고, 나는 그의 말대로 내면의 관심이나 욕구 같은 걸 잠재우려고 노력했다. 사회생활은 원래 그렇게 '할말이 많아도 하지 않는 것'이라 여기며 조직 내 질서와 분위기에 순응하려 했다.
팀을 위해 누군가 나서야 하는 순간에도 '내가 굳이 희생할 필요는 없지'라며 애써 손들고 싶은 마음을 눌렀고 그저 '착실히 일하는 기계'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 분명 처음에 느꼈던 행복한 감정이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다. 모두들 ‘좋은 게 하나 없다’면서 자기 회사를 욕하고 노비처럼 사는 제 인생에 한숨 짓지만 그걸 버티고 또 다른 소소한 즐거움을 찾으며 살아가니까, 나 역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공허함이 커져갔다. 그를 상쇄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지만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끝없는 갈증을 느끼며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행복이란 게 무엇인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누구나 초심을 잃고 흔들리는 때가 오는 것이라 생각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내가 아직도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일에만 매몰되지 않으려 이런저런 취미생활도 병행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내 가슴 속 답답함을 해결하진 못했다. 채워지지 않는 불안함이 더욱 거세졌다.
지금 나의 계절은 겨울에 멈춰 있다.
잠시 찾아왔던 봄은 빠르게 지나고 여름의 푸르름과 가을의 고즈넉한 정취를 즐길 새도 없이 겨울을 맞은 것 같다. 실제의 계절은 그렇지 않지만 내 마음 속의 하늘은 낮보다 밤이 여전히 길다. 밝은 태양빛 아래 눈을 감고 있으면 부드러운 바람의 촉감과 향긋한 꽃내음이 느껴질 것만 같은데 내 마음엔 좀처럼 따뜻한 볕이 들질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마음 속에 깃든 불안함에 대해 차마 말하지 못한 채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다가 하루가 끝난다. 여러 무리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땐 남들 못지 않게 웃음을 잘 터뜨리곤 하지만 혼자 있는 동안엔 깊은 고독 속에 갇혀있다.
문득 10년 뒤에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이것저것 질문하는 대신 떠오른 얘기가 '행복하니?'라는 질문이었다. 진정으로 웃고 지내는 게 맞는지, 그냥 허허실실로 남들 얘기가 맞장구치면서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내는 건 아닌지. 그걸 묻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지금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 하는 생각을 했다. 참 어려운 질문이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 그것보다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있을까. 그런데 겉보기에 평탄해보이는 삶에도 분명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고충이 숨어 있다. 그건 건강과 관련된 문제일 수도, 금전적인 어려움일 수도, 예기치 못하게 겪은 불행일 수도 있다.
결국 행복을 잃어버린 채로 살 순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가만히 내면을 성찰하는 것만으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취미활동이 내 삶의 주된 동력이 될 순 없었다. 경제적인 이유에서든 신분이나 위치에 대한 불안함이든 적성이 맞느냐 하는 문제든, 나를 괴롭히는 문제의 근원에 맞서야 했다.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영영 잃어버린 것만 같았던 지난 꿈을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봄은 짧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다.
지난 봄은 이미 과거의 일이다. 봄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계절은 끊임없이 변한다. 한 때 나는 춥고 시린 겨울 바람을 이겨내고 봄을 맞이했고 내 마음 속엔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있었다. 지금 내 인생의 계절이 겨울이라고 한다면 언젠가 꽃망울이 움틀 계절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추위로 얼어붙은 땅 아래에 생명의 씨앗이 잠들어 있을테니. 그 씨앗이 발아하기 전까지 나는 황량하게 변해버린 나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니 스스로 정성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다.
결국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맺기까지, 그 아름다운 계절이 다시 돌아올 때 까지 나는 농부의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내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 드디어 눈물이 그치고 긴 겨울이 끝나는 날이 오면, 간절히 기다려왔던 그 순간이 오면, 다시금 내 나무엔 꽃이 피고 초록잎이 자라날 것이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나는 지금의 겨울을 버텨내야 한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마음 속에 수많은 고민이 있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믿어야 했기에
더욱 깨닫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서른 살의 봄, 따뜻한 실제의 계절과 달리 인생의 계절은 차가웠던 순간
한 동안 우울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을 꿈 꾸던 것과 달리 허드렛일에 치여 사는 것만 같은 내 자신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인생의 영원한 봄을 꿈꾸던 내가 너무 연약했던 탓일까, 마음이 무너져 내리면서 신체 건강에도 적신호가 들어왔다. 그렇게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달래며 나는 내가 가진 어둠의 민낯과 잠시 마주했다. 그리고 알게됐다. 차갑고 묵직한 어둠 속에도 희미하나마 빛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단순히 공허함을 달래는 데 급급하기보다 '내가 행복하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 먹었다.
살다보면 그런 순간들이 있다.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마치 갑자기 깨달음을 얻는 수도승처럼 '지금 이 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벼락처럼 심장을 내리치는 순간.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계절이 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는 어떤 순간.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건 마치 불꽃놀이와도 같은 것.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깜박이는 찰나마저 아까운 순간. 청춘, 또는 화양연화.
-from. 네이버 블로그 "두**" 님의 글 중
우연히 어느 날 덕질을 하며 이것저것을 누르다가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방문했던 블로그에서 위와 같은 글을 발견했다. 애초에 블로그의 게시글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찾으려고 검색하다 본 글의 첫 시작이 저런 내용이었다. 글 쓰는 이로써 가슴이 울컥한 문장이었다. 인생의 아름다웠던 그 순간을 저보다 더 심장 떨리게 표현한 게 있을까 싶어 사진에 대한 걸 잊고 저 부분만 달랑 저장해두고 나왔다. 언젠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 저 글을 보며 그 행복감을 만끽해야지 라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인생에서 여러 차례 봄을 맞이하겠지만, 아직 내게 화양연화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언젠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적인 순간이 내게 오겠지. 그 순간이 오면 가장 기쁘고 환한 얼굴로 그 빛나는 때를 행복하게 맞이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내일도 꿋꿋하고 씩씩하게 하루를 살아내리라, 다짐했다. 언젠가 맞이할 그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