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이 만드는 인간의 고유한 표상
계절의 변덕엔 까막눈이던 시절이었다.
잠시 불어온 따스한 바람에 봄이 왔는가보다 하고 서둘러 꽃망울을 피워냈던 참이었다. 해맑게 피어나 세상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몇 지나가는 이가 툭 하고 던진 예쁘단 말에 온통 신경이 곤두섰던 그런 때였다. 하지만 그때의 난 곧 불어닥칠 꽃샘추위를 모르고 수줍게 고개를 든 여린 꽃잎이었다. 냉혹한 바람이 여린 꽃잎 깊숙이 파고들자 두려움과 서러움에 오들오들 떨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어깨 한번 펴지 못하고 움츠러들어 고개를 파묻고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던 시절. 한편으론 가지런히 나무에 매달려 제 존재감을 막 보이던 때. 스무살이었다.
집, 학교 아니면 아르바이트. 별다른 외부활동을 하지 않아 이동반경이 단순했다. 또 경제활동과 학업에 치중하느라 여러 무리와 어울려 놀기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먹는 음식도 끼니를 때우는 정도에 불과했지 다양한 가짓수의 음식을 맛보는 일은 드물었다. 당시에 자주 먹었던 건 '봉구스 밥버거'. 학교 급식이나 엄마가 해준 반찬이 아는 음식의 전부였던 시절, 특별히 좋아한다고 꼽을 만한 음식은 없었다.
스무살이 넘어서 비로소 집밥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났던 나는 모든 게 낯설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화덕피자는 친구들과의 친목을 다지는 식사 자리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돋우는 데 제격이었지만 맛있다는 인상을 받진 못했다. 아메리카노는 입맛에 맞지 않았고 어디선가 귀동냥해 들었던 '카라멜 마키아토' 외엔 아는 메뉴가 없었다. 이와 같은 음식에 대한 무지함 때문에 나는 결정장애가 생겼다. 파스타집이든 커피숍에서든 뭘 골라야할지 늘 난감했다. 그래서 ‘아무거나’라는 선택지를 늘 입에 달고 다녔다. 맵거나 짜지 않은 거라면 괜찮았다. 'Best'라고 쓰인 작인 글씨는 유용한 나침판이었다. 취향을 알지 못하니 대다수가 시키는 메뉴에 편승하는 게 합리적 선택으로 보였다.
첫 소개팅 자리에서도 그랬다. “뭘 드실래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늘 그렇듯 상대에게 먼저 선택권을 넘겼다. 사실 배려하고자 함이 아니라 결정을 대리하고자 함이었으나 그럴듯하게 넘어갔다. 크림소스의 파스타와 피자. 무난한 메뉴 선정으로 소개팅은 잘 끝났다. 그렇게 만남이 이어져 남자친구가 된 그와 나는 본격적으로 많은 종류의 음식을 섭렵하게 되었다. 나와 달리 다양한 음식을 먹어 본 경험이 있던 그와 함께 새로운 장소를 찾아보는 일이 많아졌고 당연하게도 낯선 경험들이 쌓여갔다. 데이트 장소 물색은 그의 몫이었고 그는 다양한 경험이 부족한 내게 음식에 대한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날 간 일본식 덮밥집. 무슨 메뉴를 고를까 고민하다가 연어가 들어간 메뉴를 시켰다. 고등학교 때 얼핏 연어라는 소재로 된 문학작품을 들어본 게 기억이 났다. 얕은 생물학적 지식을 더해보자면 연어는 회귀본능이 있는 생물. 하지만 그 원리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는 정도. 식감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정도로 초면이었다. 집에서는 반찬으로 올라온 적 없던 생선. 이질감을 꿀꺽 삼키고 연어 한 점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비린내 없이 부드럽고 단맛이 났다. 눈 깜짝할 새 다 먹어치웠다. 그때부터였다. 연어를 좋아하게 된 게. 그다음부터는 어딜 가든 연어가 들어간 음식을 찾았다. 음식 고르는 일이 즐거워졌다. 처음으로 취향이 생겼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집 식탁에 활어회가 올라오는 날이면 항상 연어가 한 접시 같이 놓인다. 연어를 좋아하는 나를 고려한 구성이다. 연어를 좋아하게 되면서 활어회를 더 좋아하게 됐다. 날 것의 생선이 어떤 맛인지 점차 알게 된 것이다. 광어나 우럭에 잔뜩 묻힌 초장 맛으로 삼켰던 회가 이런 감칠맛이 나는구나 하는 걸 알게 된 건 음식에 취향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지금도 나는 내가 선호하는 것을 찾는 걸 즐긴다. 우연히 만나게 됐든 혹은 작정하고 탐색해 보든 좋아한다는 마음이 섰다면 그걸로도 큰 기쁨이고 수확이란 걸 알고 있다. 그렇게 새로움을 마주하는 일에 더 과감해졌다.
한때 나는 차가운 바람이 뿜어내는 한기에 힘없이 늘어지던 작은 꽃잎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바람에 향을 실어 보내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는 어엿한 꽃이 되었다. 한 해 두 해 끊임없이 피어나면서 더 아름다운 자태로 강한 향기를 내뿜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매해의 계절이 남긴 흔적과 더불어 자라난 한 송이의 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