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자세

명언이 주는 그 울림

by 흔한여신
세상에는 역경과 고난을 견딜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좋은 말들이 너무나도 많다.


예로부터 내려오고 현대에 와서 더욱 변주되어 쓰이는, 소위 말해 ‘주옥같은 말’들이 때때로 힘겨운 순간들을 버티게 해주고 신나는 순간들을 아름답게 꾸며준다. 요즘엔 인터넷에서 흥하는 말들이 많지만 예전에는 책의 어느 구절에서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 같은 대중매체에서 등장한 울림이나 임팩트가 있는 대사가 하나의 유행어를 만들며 작품의 주제 의식을 대변하기도 한다. 좋은 글귀에서 좋은 영감을 얻어지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는 만큼 나는 항상 좋아하는 문구를 곁에 가까이 두는 버릇이 있다.


때는 고등학교 시절.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대개 겪는 통과의례, 대학수학능력시험. 초중고의 의무교육을 이미 거쳐왔건만 사회로 나아가기 전 또 밟아야 하는 코스가 되어버린 대학 생활을 앞둔 십 대의 마지막 순간. 그해에 가까이하며 좋아했던 문구는 “Beautiful struggle”이었다. 하루종일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실상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지만, 나는 수험생활에 이보다 어울리는 수식어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어디에서 스치듯 본 뒤로 나는 내 독서대에 이 문구를 써 붙여 놓고 그 고군분투의 시간마저 아름다웠더라고 기억하고 싶었다. 미래의 더 큰 목표를 위해 많은 것을 참아가며 버티는 시간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의미로 나는 이 문구를 좋아했다.


시간이 지나 다시 취업 준비를 위한 수험생 모드에 돌입했을 때 나는 종종 그만두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어릴 때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더라도 ‘포기는 배추를 셀 때 쓰는 말이지’라며 웃어넘길 수 있었는데 연일 날아드는 불합격 통지는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쓰라림이었다. 내가 만들어가야 하는 미래가 까마득하게 느껴져 한없이 불안했던 이십 대 중반, 가장 가까이했던 문구는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것이었다.


인생은 끊임없는 갈림길에서 내리는 선택의 결과물인데 나는 종종 왜 내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인가를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길에서 도망친다 한들 더 좋은 선택지가 남았다고 보긴 어렵다는 것 또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기 힘든 실망스러운 순간을 버티기 위해 이 글귀를 곁에 두었다. 온전한 마무리 없이 중도에 돌아서지 않기 위해, 묵묵히 내가 선택한 길을 걷기 위해.


그리고 지금까지의 시간 속에서 가장 큰 버팀목이 되었던 말은 의외로 격언이나 속담 혹은 어딘가에서 떠도는 좋은 글귀가 아니었다.

I had a downturn in last year

이 말을 2014년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이 내뱉었는지 모른다. 처음엔 용기가 나지 않았던 고백이었다. 슬럼프에 이은 우울증. 남들은 한창 대학생활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을 시기에 나는 가장 큰 고독과 추위에 떨고 있었다. 며칠 동안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자주 심장이 쿵쾅거렸으며 알 수 없는 충동이 들었다. 그런 병세는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아졌고 그렇게 1년이란 시간 동안 서서히 주변의 도움을 받아 나는 회복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움츠러든 지 1년 만에 세상에 털어놓았던 나의 얘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I had a downturn in last year.”


어둠 속에 더 빛을 발하는 전등처럼, photo by. 흔한여신


당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느라 영어로 말할 기회가 많아서 자주 썼던 표현이다. 이전의 나는 위선과 허세를 싫어했음에도 그를 모방하려 애썼다.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기보다 내 모습을 꾸며 말하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위태로웠던 시기에 비로소 나는 내 모습에 대해 진솔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힘들다는 얘기가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지만 용기를 냈다. 밝은 모습으로 위장한 겉과 달리 속은 많은 게 무너져 있는 상황이었다. 꾸밈없는 모습으로 내 얘기를 할 때에 더 밝은 얼굴이 된다는 것도 그 때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결국 시간이 흘러 나는 더 이상 과거의 어두운 면을 감추고 숨기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이면을 저만이 홀로 알고 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의 슬픔과 고통을 이야기하는 순간 나의 단면은 더 풍부한 입체가 된다. 어두운 터널 밖을 비로소 나온 내가 솔직한 나를 내비치며 새로운 지지대를 만났을 때, 나는 입버릇처럼 이 말을 꺼내곤 했다.

“I had a downturn in last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