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불허의 시나리오

삶이란 요지경

by 흔한여신
어릴 땐 서른 넘으면 엄청난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요즘엔 나이를 먹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전에는 누가 몇 살이냐고 물으면 바로 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스스로도 숫자를 헤아리는데 시간이 걸린다.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가 싶을 뿐이다. 시간은 하릴없이 흐르는데 인생에 큰 변화는 딱히 없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겪고 더 성장하고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건만 늘 제자리걸음하는 기분이다. 한 2~3년 전 쯤엔 쳇바퀴를 도는 듯한 삶에서 벗어나보겠다고 발버둥을 쳤었는데 그렇게 새로운 도전에 성공했더라도 얼마 못 가 다시 쳇바퀴 굴레 속에 갇힌 기분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꿈꿨던 것만큼 대단한 어른이 되진 못했지만 내면은 깊이 성숙해졌다. 고통과 어려움을 더 잘 견뎌낼 수 있게 됐고 특히 요즘엔 세상을 좀더 따스한 시선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해 힘겨웠던 시기를 지나고 나니 주변에 소소하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생긴 덕분이다. 나쁜 인연은 많이 걸러졌고 좋은 인연은 차츰 더 생기고 있다. 그렇게 어두웠던 삶 한 켠에 빛이 들면서 부정적이던 생각도 긍정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그만큼 불치병처럼 앓던 우울증도 떨쳐냈고 고독함을 적당히 즐길 줄 아는 인간이 되었다.


꾸준한 성실함으로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https://www.linkedin.com/pulse/difference-between-adulting-being-adult-cecile-hemery


문득 살아온 궤적을 돌이켜보니 언제 이 길을 걷게 되었는지 새삼스럽다


전에 내게 발레란 공연으로써 '보는 것'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발레를 시작한 뒤 흠뻑 빠져 들면서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가 180도 바뀌었다. 처음엔 호기심이 전부였지만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마침 일이 여유로워 취미에 좀더 시간과 노력을 쏟을 수 있는 환경이었기에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런 열정을 이끌어줄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난 것은 운명이었을까. 그 전까지 무슨 회원권을 결제해도 기부하기 일쑤였던 내가 발레에 빠져들면서 참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만들어 냈다.


운동을 소위 극혐하던 내가 하루 3시간씩의 수업을 소화해내고 감히 도전할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토슈즈를 신기까지. 땀 흘리는 시간이 늘면서 몸이 전보다 튼튼해진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 힘든 순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생겼다. 불과 몇 년 전의 나였다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생각과 취향이 바뀐 것은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걸까. 확고한 취미가 생기면서 더 이상 다른 취미를 찾아 헤매는 일이 없어졌다. 수 없이 원데이 클래스를 찾아다니고 새로 도전할 무언가를 찾아 헤맨 것은 지금의 길에 이르기 위한 여정에 불과했던 것이었을까. 지금은 되레 공연보러 다니는 걸 꽤 귀찮아 한다.


https://thehanovertheatre.org/classes/adult-ballet-beginner-i-2425/


사진찍기는 흔히 많은 여자 애들이 그런 것처럼 소소한 취미에 불과했다. 전문 작가에게 촬영을 맡긴다는 것은 얼굴이 빼어난 미남미녀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라고 생각해 소극적이었다. 어쩌다 어렵사리 결정해 큰 맘 먹고 촬영을 맡겨도 망한 경우가 많아서 속상한 때가 많았다. 셀카를 찍을 때는 어떻게든 얼굴이 갸름해 보이게끔 노력을 하니 제법 괜찮아 보였는데 거울로 본 내 모습보다도 못한 결과물을 보고 있자니 착잡했다. 지난 작업물들은 현실의 나를 반도 담지 못했을 만큼 엉망이었다. 아마 카메라 앞에선 많은 뚝딱이들이 비슷한 심경을 느꼈으리라.


그런데 무슨 배짱이었는지 2년 쯤 전부터 제대로 작정하고 사진에 돈을 쏟아붇기 시작했다. 마음 고생을 좀 덜면서 살이 예쁘게 빠진 데다가 환경의 변화로 좀더 얼굴이 밝아진 게 한 몫 했다. 처음엔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쑥스러운 일이었고 남들의 시선도 무척 신경쓰였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포즈도 자연스럽고 표정도 그럭저럭 잘 짓는다. 주위에서 쳐다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동안 코칭인지 비난이었는지 알 수 없는 작가님들의 디렉팅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뚝딱이에서 탈출한지 오래다. 처음엔 카메라와 내외하느라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기도 했는데 이젠 좀 더 색다른 컨셉 같은 것을 생각해 보는 것에 소소한 재미를 느낀다.


그런 일환에서 최근에는 평생 도전해 본 적 없는 공주님 컨셉의 촬영을 진행했다. 장장 5시간이나 걸린 촬영이라 체력적으로 부담되긴 했지만 찍으면서 카메라와 정말 친해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발레에 이어 사진이라는 취미 역시 시간과 비용의 부담이 크지만 아마 꽤 오랫동안 애정할 것이라 어쩔 수 없다. 결과물을 볼 때마다 소요된 비용을 잊어버리고 만족감에 크게 젖어 헤헤 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전엔 꼴 보기도 싫던 얼굴이 이렇게 보고 싶어질 줄은 나도 몰랐다.


뭐든 하다 보면 늘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https://www.allure.com/story/how-to-take-good-selfies


몇몇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나의 본질이 있다


몇 해 전 얻었던 별명이 '골목대장'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능숙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그리고 그 비슷한 결에서 더 사랑스러운 별명이 작년에 하나 더 생겼다. 귀염동이의 '동이'다. 내가 바라는 만큼은 아닐지라도 꽤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고 매력적인 인물로 비춰지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가 컸던 만큼 다시 인간관계를 잘 맺는게 가능할까 싶었던 때가 있었는데 오히려 사람을 멀리하는 게 내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좀 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 남들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자아를 앞세우기보다 좋고나쁨을 선별하는 자아가 좀 더 전면에 나서고 있다. 웬만하면 충동적이기보다 충분히 심사숙고한 뒤 결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뚜렷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 몇 년 전 어느 선배가 했던 말은 완벽히 틀렸다는 것이다. 그 선배는 내게 오래 살아남고 싶으면 '벽지가 되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스스로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무렵 나도 수렁에 빠져 힘들어했기에 벗어나려면 그 말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큰 상처가 된 말이었지만 내 자신을 깎아서라도 지켜야 할 숙명으로 여겼다. 그 때부터 나는 나답게 사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답을 내렸다.


Esto quod es 네 자신이 돼라


타투로 몸에 새긴 문장이다.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영원히 뼈에 새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 신념은 옳았다. 본성 그대로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나 드디어 행복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삶의 여러 숙제들을 해결하지 못해서 문제지만 결국 나의 본질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억누르는 환경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나다워질 수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나만이 가진 빛과 색을 조화롭다 말한다. 내게 잘 어울린다 이야기한다. 어둠보다 빛이 어울리는 사람, 무채색보다 화려함이 어울리는 사람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보다 밝과 화사한 표정이 어울리는 사람. 나의 본질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눈부실 만큼 화려하진 않아도 나만이 가진 색으로 세상 어느 한 켠을 밝게 비추고 있다.


https://nafc.org/bhealth-blog/the-importance-of-living-in-the-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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