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몰래 하는 고백
사실 고백할 게 있다
별 대단한 것은 아니다.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은 건 오랜만에 심장이 요동칠 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정이 혼란스러울 때 나는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래는 습관이 있다. 반대로 말하면 마음이 크게 안정되어 있을 때는 글을 잘 쓰지 않는다. 아니, 잘 써지지가 않는다. 글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는 때는 분노와 슬픔이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가 설렘과 기대 같은 감정이 폭발하는 경우다. 주로 전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글에서 어떤 분노 게이지같은 게 느껴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감정에 한껏 휘둘리고 있으면서 글에선 괜찮은 척 점잖을 빼는 것이다. 이번의 경우엔 다행히 부정적인 감정이 원동력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주체하지 못할 만큼 누군가를 향해 넘쳐흐르는 설렘 때문이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다양한 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대개는 무난한 하루를 보내지만 때론 뜻하지 않는 변수를 맞이하기도 한다.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꽤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주 오랜만에 맞이한 정신없는 스케줄. 물론 속으론 욕이 튀어나왔어도 겉으론 부산히 움직이며 할 일들을 빠르게 잘 마무리했다. 조금씩 실수는 있었지만 금세 바로 잡을 수 있거나 경미한 부분이었다. 다만 이렇게 바쁜 적이 너무 오랜만이라 새삼스러웠는데 다시금 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주의 마지막 날이자 2월의 마지막 날, 끓어오르는 사진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촬영 예약을 해둔 상태였다. 전이었다면 여유롭게 사진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었겠지만 이번엔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눈앞에 떨어진 일들을 해치우느라 급급한 상황이었다.
그렇다 보니 감정이 메마른 상태였다. 머릿 속이 일로 가득차 있다가 한 순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니 멍해 있었지만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마치 또 다른 일을 하러 가는 것처럼. 무념무상인 채로 길을 떠나 놓고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무렵 긴장이 시작됐다. 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거였지, 참. 대인관계를 크게 어려워하진 않지만 처음 맺는 관계는 늘 어려운 법. 낯선 환경에 놓였다는 긴장감에 살짝 얼어붙고 있었는데 문 앞 복도에서 작가님인 것 같은 사람을 마주쳤다. 서로 말 없이 알아봤는데 머릿 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뭐야, 너무 잘생쁨이잖아. 내가 이런 얼굴이 취향이었던가 싶은 만남의 순간이었다.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가 추가된 것 같았다.
그 동안 사진을 좋아하긴 했어도 셔터 소리에 맞춰 마치 일하듯이 탁탁 포즈같은 것을 해내기 바빴지, 작가가 뭐 어떤 사람인지 같은 게 궁금한 적은 당연히 없었다. 그들도 나를 일로써 대했을 것이고 나도 똑같았다. 결과물을 잘 내야한다는 마음만 일치했을 뿐 나도 작가가 잘 디렉팅을 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입장이었고 작가 역시 고객 니즈에 맞게 최대한 작업하자는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협업같은 느낌이었다. 즉 그냥 친한 사람들과 어디 경치 좋은 곳 놀러가서 하하호호하는 것과 달리 촬영 과정이 일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일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기 위해 안달이 나 있었다. 다행히도 그런 작업 자체를 좋아해서 사진찍는 것이 하나의 취미생활이 되어 있었다.
그 날 촬영은 자주 멍한 상태였던 것 같다. 물론 전 날까지 매우 빡빡했던 일정때문에 고단함이 쌓여 있었을 것이나 내가 아닌 남에게 자꾸 집중하게 되는 게 문제였다. 내가 주인공이라는 사실도 까먹고 넋놓고 작가님 얼굴을 쳐다보고 왔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전에 작업하신 포트폴리오를 수차례 봤기 때문에 걱정 없이 결과물을 믿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그 날만큼은 모든 과정이 그저 일로만 느껴지지 않고 처음으로 사람이 보였다. 그 동안 여러 차례 다양한 사진작가와 만났지만 진심으로 상대방이 마음에 든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돈을 지불한 소비자의 입장인 동시에 잠시 만난 비즈니스 파트너 정도로 여겼던 게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촬영은 내게 결코 공주놀이 같은 게 아니었다. 내 인생의 어느 한 페이지를 기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특히 요즘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걸 주저한다
그 만큼 나는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라 거리가 좁혀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늘 있다. 그래서 성급하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다. 조금 다가섰다가도 불편한 지점을 발견하면 금세 뒤로 물러나는 편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경계심을 뚫고 감정이 앞서버렸다. 사람 대 사람으로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컸던 탓에 그 전까지의 생각은 송두리째 날려버리고 촬영이 끝난 뒤 작가에게 메일을 보냈다. 너무 좋았다 그리고 감사했다. 거기에 사적으로 친해지고 싶다는 사심을 가득 실었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하지 않았을 짓이다. 원래대로라면 스쳐지나갈 인연으로 가볍게 여기고 말았을 것인데 아주 오랜만에 욕심을 부렸다. 참 감정이란 알 수 없다. 어른이 되고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그 소용돌이를 제법 쉽게 잠재울 수 있게 되었지만, 이렇게 가끔 복병을 만난다.
충동적으로 보낸 메일에 다행히 긍정적인 답신이 왔다. 공과사를 구분하긴커녕 그걸 넘어달라는 제법 무례한 부탁이었는데도. 그 메일에 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누군가와 마음이 통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에 그 기쁨이 더 컸던 것 같다. 돌이켜 보건대 가까워지고 싶다는 사심은 아마도 촬영 내내 느꼈던 따스한 감정 때문이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무언의 의사표현이 있기에 알게 된다. 작가가 피사체에 대해 애정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서로가 그 과정을 일로써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사람과의 만남으로 여겼는지. 그에 대한 직접적인 대화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나는 다소 멍했던 탓에 말수가 적었지만 아마 상호간 인간적인 호감이 느껴졌던 것 같다.
메일에 설렘을 가득 담아 보냈는데, 마치 연예인을 만난 수줍은 팬처럼 정말 팬레터를 쓰는 기분이었다. 내 우상님 저를 부디 만나주세요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거절은 거절합니다.
한 차례 큰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그 여운이 남아있다. 더 이상의 밑도끝도 없는 주접은 그만해야할 것 같아 지금은 스스로 절제하고 있다. 과연 이 관계가 기대와 같이 흘러가게 될지 아니면 해프닝처럼 그냥 지나갈 우연인지 미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오랜만에 느낀 충동적인 설렘이 반갑기도 그리고 아찔하기도 해서 기록하고 싶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평소엔 그렇지 않다가도 파장이 제법 맞는 누군가를 만나면 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말이다. 그저 그렇게만 여겨오던 일이 색다른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됐다. 해야할 일을 잘 마쳤다는 뿌듯함 대신 저 사람과 또 만나고 싶다는 설렘을 얻을 줄이야.
한편 혼자인 시간을 길게 보내며 서로 다른 마음이 모이고 합쳐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깨달았다. 그런 만큼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기도 했다. 처음엔 좋은듯 하다가도 금세 꺾여버린 꽃처럼 시들어 버릴 수 있는 게 사람 사이니까. 그러니 앞으로도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며 살지 않을까 싶다.
쳇바퀴 같은 일상을 열심히 살다보면
덕후가 계 타는 날 꼭 온다고 믿으며
작가님, 우리 또 만나요. 꼭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