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동 연대기: 사회초년생 딱지를 뗀다는 것
그 옛날엔 겨울인데도 오전부터 오후까지 예식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웨딩업계는 약 십 년이란 세월 동안 스몰웨딩 트렌드, 비혼주의의 확산과 오포세대의 등장의 여파로 인한 성혼 수의 감소 그리고 최근에는 코로나에 이르기까지 업계에 불어닥친 한파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비를 넘어야 했다. 때문에 비정규직마저도 벌이가 괜찮았던 예전과 달리 많은 업체들의 잇따라 폐업하며 그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전에는 서울을 기준으로 동네마다 하나씩은 볼 수 있었는데 반해 이제는 동네 어귀에선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하루에도 몇 십개씩 구인광고가 올라왔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수요량에 비해 구직자가 더 몰리는 일자리가 되었다.
첫 신고식
사장의 마음에 들어야 잘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미션을 받고 난 뒤 나는 한껏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그 나이라서 할 수 있었지만, 하루종일 목청껏 인사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야속하게도 목이 쉴 법한 가여운 알바생에게 물 한 모금 챙겨주지 않았다. 점심 때가 지나고 나서야 겨우 물 한 잔을 받았던 것 같다. 갈증에 대한 욕구조차 잊을 정도로 나는 긴장했었고 그게 뭐라고 최선을 다했다. 아마도 내 뒤에서 관리자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내가 쓸 만한 아이인지 평가했을 것이다.
구두 신어본 게 처음이라 하루종일 신고 서 있으니 발이 너무 아파왔다. 나중에는 발이 퉁퉁 부어서 통증이 더 심해졌고 결국 맨발로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서 있었다.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예식 총괄 매니저가 안쓰러웠는지 자신의 신발을 신으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맞지 않은 구두 위에 올라 하루종일을 버텼다. 마지막 예식이 시작된 이후엔 오가는 사람들이 적어 비로소 한숨 돌릴 틈이 주어졌다. 다 끝나고 난 뒤에 매니저가 흰 봉투 하나를 쥐어 주었다. 일당 6만 5천원. 처음 내 노동으로 얻은 소득이었다. 처음으로 밥벌이를 했다는 생각에 마냥 뿌듯했다.
다음 날에도 여전히 안내 포지션을 맡았다. 하지만 토요일보다 예식 건수가 적은 데다가 메인 안내데스크가 아니라 건물 뒤쪽의 안내데스크 쪽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의 이동이 많지 않아 위치를 묻는 사람도 거의 없어 전날에 비해 일은 수월했다. 하지만 나는 눈에 띄지 않은 곳에서도 내 할 도리를 간과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자리를 옮긴 건 전날 고생했던 나에 대한 매니저의 배려였다. 무사히 이틀 간의 알바를 마친 뒤 10만 5천원을 벌었다.
성실한 모습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덕분에 그 다음주엔 다른 포지션을 맡게 되었다. 예식 중 손님들께 차를 대접하는 일이었다. 호텔식 예식을 흉내 낸 예식장이라 하객석엔 둥근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고 음식 대신 차를 제공했다. 아무래도 물이 가득 담긴 주전자라 무게가 꽤 나갔던데다가 좁은 의자 틈새를 지나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겨울이라 따뜻한 차를 담았는데 주전자가 워낙 뜨거워 종종 데이곤 했다. 여기저기서 쉴새없이 종이컵을 내밀며 리필을 요청했다. 예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틈도 없이 물을 채우랴 정신이 없었다. 여전히 예식 진행이라는 메인 업무에서는 배제된 채로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한 달 쯤 지나 웨딩홀 알바가 익숙해질 무렵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 동안 미주알고주알 얘기할 또래가 없어 살짝 외롭던 참이었다. 항공학과에 재학할 예정이라던 그 아이는 늘씬하고 눈에 띌 만큼 예쁜 미모에 '예도' 포지션을 맡고 있었다. ‘예도’는 예식도우미 역할인데 보통 얼굴마담들을 내세워 꽃가루를 뿌리거나 신랑신부 행진 때 축포를 쏘는 등의 예식 중 이벤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지금은 그런 뻔하고 작위적인 이벤트 대신에 친구들 또는 지인들이 준비하는 게 대세가 됐지만 그 때는 그게 자연스러웠다.
그 친구는 다른 웨딩홀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웨딩홀마다 일 하는 분위기도 다르고 여기보다 더 좋은 곳도 있다고 했다. 한 달 넘도록 주말마다 여의도로 출퇴근하던 나는 그 애의 얘기에 귀가 쫑긋했다. 차 주전자에 물을 채우는 일이 지겹던 차라 옮길 마음을 먹었고 이벤트 업체에 이야기해서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얘기했다. 그렇게 나는 여의도 생활을 관두고 다른 웨딩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