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걸음마 pt.1

나의 노동 연대기: 서투르지만 당차게 내디딘 걸음

by 흔한여신
인생에서 첫 걸음마를 뗀 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 근육이 붙지 않아 힘 없이 부들거리는 양 다리에 한껏 집중해 우뚝 선 순간, 그걸 지켜 본 부모님께는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까. 부모가 되어 본 일이 없어 그 감정의 깊이를 다 헤아리진 못하지만, 무척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


이미 걸음마를 뗀지가 한참 지나 이족보행에 익숙해진 지 오래되어 더 이상 놀라울 게 없는 걸음이지만 여전히 나의 행보는 멈추고 이어지는 중이다. 그 과정이 부모님에게 와닿기에 때론 희망이었고 때론 절망이기도 했지만 나는 끊임없이 나아갔다. 주저할 때도 있었고 방향을 몰라 우왕좌왕한 순간도 많았지만 어쨌든 나만의 발자취를 만들어왔다.



첫 출근길이 기억난다.


내 인생 역사상 첫 출근지는 여의도였다. 첫 알바자리가 웨딩홀 예식도우미였는데 일했던 예식장이 여의도에 있었다. 보통 예식장의 정규직원은 상주하는 예약실 직원들과 청소 직원이나 뷔페의 메인셰프 등 규모가 크지 않다. 하지만 하루에 수백명 이상 몰리는 행사의 진행을 위해서 필요한 인원은 더 많기 때문에 대부분 알바생을 기용하게 된다. 그리고 직접고용의 형태가 아니라 협력업체를 통해 구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이벤트 업체에서 올린 구직광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다.


예식장 알바를 눈여겨 봤던 건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내가 스물이던 당시 최저 시급은 4천원 대였는데 예식장 알바는 일당이 5~7만원 정도로 다른 알바 시급 대비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수입이 짭짤하리라는 판단 하에 외모(?)와 어린 나이를 무기로 알바를 시작하게 됐다.


photo by. Rojoy



손발이 달달 떨릴 정도로 추운
어느 겨울 날이었다.


첫 출근하는 날, 긴장을 잔뜩한 채로 패딩을 껴입고 길을 나섰다. 생애 최초로 돈을 벌러간다는 비장함이 더해져 발걸음이 씩씩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비스업종 특성상 '준수한 외모'가 요구되는지라 뭐라도 바르고 갔어야 했다. 화장품을 내 손으로 사 본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유튜브가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참고할 만한 게 없어서 뭘 사야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냥 엄마가 쓰는 화장품 아니면 샘플 같은 걸 썼다. 또 4cm 이상 되는 구두를 신고오라고 했는데 그것 또한 없어서 엄마 신발을 빌렸다.


발에 맞지 않는 구두에 어색한 화장. BB크림을 떡칠한 얼굴에 빨갛게 마구 칠한 입술. 거기에 들만한 가방이 없어 그냥 학교 다닐 때 보조가방으로 쓰던 천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갔다. 입술이 지워질 걸 대비한 립스틱이라든가 차고 건조한 공기에 피부가 틀 걸 대비한 어떤 화장품도 소지하지 않은 채였다. 그런 걸 몰랐으니깐. 그냥 오늘 하루 열심히 하겠다는 그런 마음의 준비가 전부였다. 그것만 가지고 가도 충분했을 그런 나이였다.


하루 동안 내게 주어진 임무는 '인사하기'였다. 보통 신출내기가 오면 맡기는 포지션이 안내데스크 업무다. 결혼식 특성상 어르신들의 방문이 많아 예식장이나 각종 편의시설의 위치를 안내할 역할이 필요하다. 또한 친절한 인사말로 예식장을 방문한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기용한다.


그런데 사실 이 포지션은 예식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게 아니라 보통 예식장 관리자의 요청에 의해 생기는 자리다. 과격하게 표현하면 소위 나이 많은 꼰대들은 '안내양'이 좀 있으면 좋겠다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탐탁지 않게 여긴 포지션이다. 특히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여닫히는 층 위치를 알리는 안내를 했을 때 역할 자체에 대한 불만이 엄청 컸다. 다만 현재에는 코로나로 인해 방문자 기록이 필수가 되면서 없어서는 안되는 포지션이 된 것 같다.


여하튼 역할이 미미한데다 실수해도 큰 문제가 없기 때문에 신참이었던 나는 안내원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고된 자리다. 안내데스크 위치는 홀 바깥에 자리하고 있는데다가 출입문과 가까워 기본적으로 춥다. 더욱이 예뻐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패딩도 입지 못해 코트를 입고 서있기 때문에 더 춥다. 그리고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하루종일 "안녕하십니까, 어서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방문객들에게 인사해야한다. 찾아오는 사람에게 안내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온종일 수백명을 상대로 목청을 돋우어야 한다.


첫 날 도착하니 그 날의 전체적인 예식을 책임지는 이벤트 업체 소속 매니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시에 따라 유니폼으로 환복을 마친 내가 살짝 상기된 채로 서 있는데 매니저가 대뜸 이런 얘기를 했다. "지난 주에 안내 역할을 했던 친구가 목소리가 작아서, 웨딩홀 대표님이 안좋아하셨어요. 목소리가 또 너무 작으면 저희 업체도 짤릴 수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 OO씨 역할이 엄청 중요해요."


첫 날부터 너무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이미지 출처: IWC 인천 웨딩홀 (본문과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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