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가까이 사는 가깝지 않은 사이

by 흔한여신
모르는 이웃을 마주쳤다.


잠시 산책을 나섰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1층 현관에 도착해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던 내 앞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와 그의 엄마였다. 아마도 새로 이사 온 세대인듯 했다. 하지만 인기척에도 아이의 엄마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앞만 응시하고 있는 엄마와 달리 어린 딸래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이며 '안녕'이라고 인사를 했다. 그런 내 움직임에 놀랐는지 아이는 고개를 쌩하니 돌렸다. 그러나 이내 제 엄마 품에 파묻힌 채로 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런 내내 아이의 엄마는 내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린 뒤 안으로 들어가면서 겨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일단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당황한 것인지 그냥 무시를 한 것인지 그녀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며 나도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먼저 내릴 층에 도착한 내가 내리고 다시 문이 닫혔다. '이제는 아이 엄마가 아이한테 어른을 봤으면 인사해야지 하는 말조차도 꺼내지 않고 대뜸 경계부터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문득 내 어릴 적이 생각났다.


출처 뉴스줌


어릴 때엔 모두가 친구이자 한 가족이었다.


이웃의 존재가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던 시절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육아에 참여했던 시절. 옆집 아이들은 모두 내 친한 친구, 언니, 오빠, 동생이었다. 집에만 갇혀 있기 한창 심심할 나이. 두 살 터울의 친동생과는 하루이틀 놀다보면 금세 싸우기 일쑤였다. 또 인형같은 걸 가지고 비슷한 역할 놀이만 반복하는 게 지겨워 바깥에서 뜀박질하러 나가곤 했다. 구멍가게라도 가서 군것질 거리를 집어와야 만족스러웠다. 놀자고 부를 때 특별한 방법은 없었다. 그냥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다보면 한 두명쯤 집 밖으로 나온 친구들을 만났다. 그러면 그 아이들과 놀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이 더 모여들며 무리를 이루었다.


그 시절엔 동네 아이들이 한데 모여 술래잡기와 같은 놀이를 했고 나이가 있는 아이들이 더 어린 아이들에게 여러 놀이를 가르쳐주었다. 서로의 부모님이나 형제자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놀다가 서로의 집에 드나들기도 했다. 남의 집에서 밥 한 끼 얻어먹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놀다가 다쳐서 다른 집에서 후시딘 같은 걸 바르고 집에 들어간 때도 있었고, 동네 오빠네 집에 놀러갔다가 로봇 장난감을 부수고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아끼던 장난감이 부서져 화가 난 그 오빠는 며칠 동안 나와 말도 안했었다. 며칠 뒤 가족들끼리 다같이 노래방 가서 함께 놀면서 겨우 화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천진난만했던 나는 어릴적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보고듣고 배우며 자랐다.


https://www.theelementsofliving.com/building-bonds-neighbors/amp/


하지만 오늘날엔 서로를 알아 볼 여유가 없다.


이웃 주민들은 제 일에 쫓기느라 서로의 존재에 대해 무심하다. 이사온 집에서 이웃에 시루떡을 돌리는 문화도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이사비용도 만만찮고 이웃과 썩 가까이 지낼 것도 아닌데 거추장스럽다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거주문화가 저층 빌라나 주택에서 고층의 아파트로 바뀌면서 더 많은 세대가 이웃해 살게 되었지만 서로에 대해 더 모르고 지낸다. 특히 지금은 개인의 사생활보호가 더 중시되는 데다가 범죄의 표적이 될 우려 때문에 이웃에게 내 집 대문을 개방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격차와 상관없이 서로 잘 어울려 지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속한 층위에 따라 사람들 간 경계가 뚜렷하다. 서로 의지하며 공존하는 사이가 아니라 타인의 접근을 경계하는 사이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층간소음'으로 인한 이웃 간 불화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될 만큼 심각한 문제가 되었고 그 외 담배연기 관련된 다툼과 같이 생활환경에서 일어나는 이웃 간 문제가 산재해 있다. 한편 거주 환경에 따른 구분으로 마치 사람에 대한 등급을 매기는 것과 같은 현상도 발생했다. 임대아파트 사는 이를 지칭하는 '휴거지, 빌거지, 엘사'와 같은 말들. 학교에서 이런 차별적 용어가 공공연하게 쓰였다고 하니 참담한 서열화 현상이다.


https://www.realtor.com/advice/buy/how-our-neighbors-ruined-our-lives/


한 마디로 정말 세상이 각박해졌다.


나 역시 돌이켜 보면 아침부터 집을 나서고 저녁이 되야 돌아오는 일과가 반복되다 보니 위아래층 세대에 누가 사는지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서로 집에 오가는 시간이 달라 마주칠 일도 별로 없는 데다가 마주쳐도 인사할 의지조차 없다. 더군다나 문이 꼭 닫힌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서로 이웃해 지낼 뿐 진정한 의미에서 '이웃'이라고 할 수가 없다. 눈 쌓인 공용 도로를 쓰는 데에도 앞장 서는 사람 하나 없는 현실이 말해준다. 서로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무관심하고 오히려 경계하는 사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공동생활에 대한 책임조차 서로에게 전가하면서 자신이 져야 할 땅한 부담도 회피하려 한다는 것을.


그런 생각들로 머릿 속이 뒤엉키고 나니 다시 내 유년시절이 그리워졌다. 어쩌면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말을 거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던 이유는 어릴 때부터 그들과 의사소통하는 게 익숙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더 서로에게 벽이 생기는 우리가 안녕한 삶을 사는 게 맞을까. 서로에게 안부조차 묻지 않는 이웃들과 거리두기하는 지금의 세태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런 반면 온라인 속 관계들은 시끌벅적하다. 그곳에서만큼은 낯선 이들도 쉽게 친구가 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서로에 대한 관심이 폭발한다. 물론 그런 관계가 과연 진정한 유대감과 행복감을 심어줄지 알 수 없지만.




요즘 많은 사람들이 문자 소통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오히려 전화로 소통하는 게 두렵고 겁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문자가 목소리로 전하는 감정을 온전히 대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나는 여전히 전화가 더 좋다. 이웃에 인사를 먼저 건네는 게 어색하더라도 어릴 적 배운 대로 꼬박꼬박 고개를 숙이는 일이 나는 더 익숙하다.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배우고 자랐으니. 상대의 반응과 상관없이 내 할 도리를 하는 걸 잊지 않는 게 내겐 더 중요하다.


어쩌면 나도 옛날 사람,
꼰대일지도 모르겠다.



https://charterforcompassion.org/shareable-community-ideas/how-to-be-a-good-neighbo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