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을 때가 많다. 영화 속의 스토리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까닭이다. 상상력의 총체로서 영화의 자존감은 좌표를 망각한 현실에 의해 가끔 훼손당한다. 특히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역사 속에서 자주 현실은 영화 같고, 영화 속 상상력은 그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역사적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불편한 과거는 청산되지 않는다. 더불어 특정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상처 입은 개인의 분노는 대부분 해소되지 않는다. 때문에우리는 근본적이면서 회의적인 몇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개인의 분노와 역사는 화해 가능할까? 역사 속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개인의 단죄는 어떤 평가를 가질까? 과거의 뜻밖의 진실과 조우한 개인의 선택에 대한 법적인 판단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분노의 윤리학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던지는 영화가 있다.
<콜리니 케이스. THE COLLINI CASE >
사건의 발단을 보여주는 스틸컷이다. 주인공인 콜리니는 존경받는 대기업 회장인 한스 마이어를 찾아간다. 역사적 진실과 대면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누군가의 죽음이 있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DER FALL COLLINI(페르디난드 폰 시라흐)>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독일의 건실한 대기업 회장(한스 마이어)이 특급호텔의 객실에서 살해된다. 살인자(파브리치오 콜리니, 프랑코 네로)는 사건 자체와 자신이 범인임을 자백하고 현장 인근에서 체포된다. 살인도구는 권총이다. 범인은 철저히 묵비권을 행사하고 범행 동기는 미궁 속으로 흘러간다.하지만 동기 없는 살인은 없는 법.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살인자인 콜리니는 왜 침묵하고, 살인의 동기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콜리니의 분노를 뒤집어보면 "한스 마이어는 왜 살해당했을까"에 대답이 될 것이다. 한스 마이어의 과거를 살펴보면 살인 동기가 보일지도 모르겠다.
콜리니의 재판은 반드시 변호인이 필요한 상황이어서 국선변호인이 선임된다. 이제 3개월 된 신참 변호사인 그의 이름은 카스피어 라이넨(엘리아스 므바렉)이다. 라이넨은 변호를 맡게 되자 뜻밖의 사실과 마주한다. 피해자인 한스 마이어가 자신의 후원자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여인의 할아버지인 까닭이다.
라이넨은 콜리니를 변호하고자 하나 콜리니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해서일까. 콜리니 역을 맡은 프랑코 네로의 눈빛과 표정은 비교불가의 명품 연기다.
변호를 포기하라는 마이어 측의 요구에 라이넨은 변호인으로서 양심과 자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후원해준 은혜 사이에서 갈등한다. 자신을 친자식처럼 아껴주던 한스 마이어를 죽인 콜리니를 변호하려던 라이덴은 인간적인 딜레마 속에서 괴로워하나, 우여곡절 끝에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로서의 소임을 다하기로 한다.
라이넨은 재판과정에서 살해도구인 낯익은 권총을 알아보고, 1944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콜리니 가족의 사건 속으로 파고든다.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이탈리아 몬테카티니까지 가서 과거의 인물들로부터 콜리니 가족의 비극사를 듣게 된다. 한스 마이어와 콜리니 가족의 비극이 얽힌 잔혹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를.
한스 마이어에게 숨겨진 과거는 무엇일까?
어린 콜리니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아버지가 학살되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고통스러워 한다. 예안-밥티스테 마이어(한스 마이어와 동일인)가 콜리니의 시선을 돌리고 있다.
그(당시는 예안-밥티스테 마이어)는 나치 정권의 친위대 장교로 전쟁(세계 2차 대전)에 참여한다. 이탈리아에서 독일군 2명이 저항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민간인 20명을 무작위로 선정해서 학살행위를 저지른다. 그 피해자 속에 콜리니의 아버지가 있었다. 전쟁의 참혹함은 이유도 없이 누군가를 죽이고 영문도 모른 체 누군가는 죽는다. 그렇다고 전쟁범죄나 민간인 살인행위가 어떠한 정당성도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어린 콜리니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처형 장면은 평생을 두고 그를 따라다닌다. 자신의 어리석은 행위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괴로워한다. 콜리니 측은 한스 마이어가 사법 처리될 수 있도록 당국에 형사 고소한다. 하지만 전쟁 중 살인죄의 종범 행위를 살인죄가 아닌 과실치사죄로 규정한 일명 <드러 법>에 의해 공소시효 경과로 처벌을 피하게 된다.
우리는 독일과 프랑스는 전범에 대한 청산을 잘하고 있는 국가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치 정권하의 부역자들에 대해서 전쟁 후의 독일 정부는 제대로 된 청산을 하지 못했음을 이 영화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누군가의 의도된 법령 개정에 의해 범죄 유형이 달라지거나 공소시효가 짧아져서 특정인들이 사법처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실제 <드러 법>에 의해 많은 전범들이 공소시효 경과로 처벌을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과거의 범죄행위를 현재의 법과 제도가 그들에게 면책권을 준 것이다. 과연 면죄부를 준 특정 법과 제도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독일뿐만 아니라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스 마이어가 자신의 신분을 세탁하고 살아가기 전에 자신의 범죄를 진실로 반성하고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면 스토리는 어떻게 변했을까. 신분이 바뀐 후의 삶은 건실하고 유력한 대기업의 회장으로서 존경받는 입지를 가졌지만, 끝내 그 자신을 괴롭힌 것은 전쟁 당시의 광기에 사로잡힌 살인이었다. 한스 마이어 그 자신도 전쟁의 휩쓸린 종범이자 피해자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용기있는 누군가는 그런 부역의 부당함에 저항하고 다른 길을 걷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논리로 항변하는 이들의 변명은 옹색하며 경청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왜 우리의 형사고소 사건이 기각된 것인가. 도대체 어떤 법이 우리 편일 수 있는가?"라고 법정에서 <드러 법>의 부당함을 외치던 콜리니의 처절한 눈빛과,
"우리에겐 현행법 이외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정의조차도..."라며 형식적 법치주의를 역설하던 상대편 교수의 뻔뻔한 모습에서 우리의 비겁한 현실이 낯익게 겹쳐진다.
종국 재판을 앞두고 콜리니는 스스로 목숨을 던지고, 재판은 종료된다.(어쩌면 우리 마음속에서는 다시 새로운 재판이 시작될지도 모르겠다.)여러모로 법은 인간의 얼굴을닮지 않았다.
문득, <콜리니 케이스>를 보면서 우리 영화 <26년>이 떠올랐다.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 2세 세사람이 함께 모였다. 그들은 연희동에 있는 전직 대통령 "그사람"을 향해 총을 겨눈다. 그들의 복수는 성공할 수 있을까?
5.18에 관한 재판과 각종 특별법이 제정된 후에도 제대로 된 단죄와 반성을 받아내지 못한 것을 보면, 독일이나 우리나라나 현실의 벽에 부딪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전두환 케이스>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영화 <26년>에서는 전직 대통령을 향해 복수의 일념을 불태우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의 관련자들이다. 5.18 민주화운동은 국민을 향해 군대를 동원하고 총부리를 들이대서 수많은 시민들의 생명을 앗아간 광주의 비극이다.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상상속의 스토리가 1980년 광주에서 실제 일어났던 것이다. 그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살인자를 단죄하고자 한 영화가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26년>이다.
모름지기 정치는 비탄에 빠진 자들을 위한 구도 행위여야 하고, 역사는 단순히 승자의 발자취의 기록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현실정치는 대부분 기득권자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존재하였고, 역사는 승자와 그들의 영광을 기록할 뿐이었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과 현실의 갭은 자주 <콜리니 케이스>나 <26년> 같은 비극을 낳는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영화 속의 역사보다 더 영화 같다. 진실은 끝내 말하지 못하고 역사의 죄인들은 참회하지 않는다. 단죄의 욕망은 처절하게 하늘을 향하지만, 하늘은 냉혹하고 무심하기만 하다. 부정과 수치의 과거는 청산되고 화해하며 용서해야 할 대상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청산되지도 화해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있다.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역사와 개인의 삶이다.
오늘의 현실이 다시 미래의 시간 속에서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도 뻔뻔함을 내보이는 개인들은 더 뻔뻔하게 하늘을 보고 살아간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가진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역사 속의 진실과 개인의 분노는 화해할 수 있을까?
역사 속에서 죄를 지은자의 가장 큰 참회는 과오에 대한 인정과 용서받으려는 용기다.개인의 역사에 대한 가장 큰 화해는 단죄를 넘어서서 한 개인을 용서하려는 용기다. 하지만 진정한 반성과 참회가 없는 용서는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 역사적 진실의 왜곡과 인간성이 퇴화된 괴물의 출현이라는 비극을.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 속에 뿌리내린 정치적 이념과 좌표의 편향 속에서 역사적 진실에 대한 균형 잡힌 판단이 가능할까. 자신들이 속한 조직의 이익과 신성 집단이라는 기득권에 쌓인 이들이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혹은 자신들의 뿌리가 되는 집단의 이익에 배치되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청산되지 못한 과거를 재산과 능력으로 물려받은 이들에게 역사적 진실의 발현이라는 임무는 원시적 불가능이라는 숙제일 수도 있겠다. 독일의 수치스러운 <드러법>은 지금도 여러 형태로 우리 사회 속에서 싹 트고 자라날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한스 마이어가 여러 명의 콜리니들에게 자신의 범죄를 참회하고 용서를 빌었다면 어떠했을까? 우리의 현실 속에서 5.18의 주범들이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역사와 피해자들에게 진심 어린 참회와 용서를 구했다면 어떠할까? 이러한 상상력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속에서 필요함에도 그들은 결코 용서와 구원을 얻지 못했다. 만약 영화 <26년>에서 응징자들의 단죄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을까. 비겁한 현실 속에서 영화 속에서나마 그런 사이다 같은 해방감을 맛보았다면 어떠했을까 싶다.
<콜리니 케이스>는 법정 스릴러의 형식을 가졌지만. 전쟁과 가족사의 비극, 법과 정의에 관한 얘기다. 더하여 개인의 분노와 이에 대한 사법적 판단의 정당성에 관한 물음표를 제공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다면, 1944년 이탈리아와 1980년 광주의 비극은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진행될 것이다.
어쩌면 역사적 범죄에 대한 최대한의 단죄는 어설픈 사법적 처리보다는 끝내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