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양심과 청렴의 두 얼굴은 수치를 모른다
한때 국가고등고시에 "국민윤리"라는 과목으로 수험생들의 도덕 지식을 평가한 적이 있었다.
특정 정권 때까지 존재하고 그 뒤로 사라진 것을 보면,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불편한 의심이 든다.
입맛에 맞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를 걸러주는 통과의례.
한 개인이 가진 현재와 미래의 양심이나 도덕성을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지만. 그 당시 고시 합격한 상당수가 현재 공직(선출직 포함)에 있고, 그들 중 일부는 각종 비리 혐의로 꾸준히 신문기사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 시험은 원하는 인재 선발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협소한 지식의 암기상태를 확인하는 국가고시에 너무 큰 기대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들만의 제한 경쟁을 무한경쟁으로 착각하고, 그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선민의식을 가진 오만한 승자들(물론 일부의 얘기다. 합격자 중 상당수는 국가발전과 시민들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지 않았을까!). 승자독식의 오류 속에서 그들의 양심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을까. 그 협량(狹量)들이 국가인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낸 정책과 법의 잣대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상식이 배신당하고 기망당했을까. 그들에게 국가운영이라는 중책을 맡기고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던 시민들의 뒤통수는 안녕했을까?
당장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결론을 쉽게 도출할 수 있다. 태생적 기득권과 법 기술자들의 교묘한 술수에 의한 사회적 성취는 상대적 박탈감의 수준을 넘어섰다. 특정 대학 졸업장과 공직에의 등용문이 신분을 만들고 그들만의 카르텔이 그들만의 도덕률에 의해 운용될 때 대부분의 시민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 또한 그들의 문법과 독법에 의하면 능력주의의 일환으로 여겨질 것이지만.
거대악은 쉽게 보이지 않고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것과 같다. 따라서 소소한 부정에 대해서는 명확한 판단기준이 존재하지만,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비리에 있어서는 기준이 분명치 않은 역설이 존재한다. 이른바 청탁금지법의 존재와 카네이션, 떡 선물 사건은 우리 사회의 청렴에 대한 시각을 분명히 보여준다. 작고 사소한 것에는 민감하고 크고 보이지 않는 것에는 둔감한 이중적인 시선. 우리 사회의 불행한 민낯이다.
흔히 말하는 이중인격은 개인이 두 개 이상의 인성을 가졌음을 말한다. 이러한 정의규정은 개인의 양심이나 도덕적 기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다. 이중 양심이나 차별적 기준의 도덕. 정의론이나 도덕률은 철학의 영역이나, 자기 분열적 양심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이론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왜 동서양의 고전(古典)에서 그토록 철인정치(哲人政治)와 수신제가(修身齊家)를 부르짖었는지 이제는 알겠다.
보통의 시민들이 양면적인 양심을 가진 것도 문제가 될 터이지만, 국가의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이 차별적 기준의 도덕성을 갖는 것은 결코 소시민적 문제가 아니다. 그들에게 부여된 공적인 권한은 오롯이 민주주의와 시민의 기본권을 위함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사적인 이익과 소집단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권한이 남용되었던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 검사들을 위한 99만 원짜리 유흥주점 할인권(어떤 금액이든지 무조건 99만 원으로 파격 할인 예정)
* 힘 있는 자들을 위한 선택적 불기소와 지연 수사 자유이용권(일반 시민들은 절대로 구입 불가)
* 네 편은 혐오와 부조리, 내편은 상식과 공정이라는 망국적 착각권(기탑재 옵션으로 판매 및 양도 불가)
이중적 기준을 적용한 예를 들자면 하룻밤도 모자랄 것이다. 그들이 반대급부로 가져간 사회적 명예나 경제적 부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국회에서, 행정부(특히 검찰청)에서, 사법부에서, 이들을 비상식적으로 돕는 일부 언론에서 욕망하며 그려가는 세상을 보면 더욱 그렇다. 상식적인 경로를 이탈한 그들만의 성취 욕망이 만들어낸 거대한 비리사슬을 쫓다 보면 우리의 현실은 어떤 영화보다도 더 극적인 스토리를 보여준다. 흥미진진한 실사판 <한국 정치 스토리> 때문에 넷플릭스 이용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음은 그 절대적인 반증이다.
이쯤에서 누구나 궁금해하는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다.
양심이나 도덕이 신분이나 경제적 부에 따라 여러 개가 존재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의 양심과 취업 초년생과 말단 공무원의 그것이 다를 수 있을까. 변두리에 전세로 살아가는 이와 강남 3구에 여러 채 아파트를 가진 이의 도덕이 다를 수 있을까?
물론 여기서의 양심은 직업적 양심을 제외한 개인적 양심의 영역을 말한다. 양심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다. 여기에는 양심의 개별성이라는 철학적 숙제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상식적 수준의 양심은 분명하고 일도양단(一刀兩斷)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가져야 할 것이다).
심리학자인 융(Carl Gustav Jung)은 외적 인격인 <페르소나>와 내적 인격인 <아니마>의 역동적 결합에 의해 개인의 성숙과 자기실현을 가져온다고 한다. 다만 이는 이상적인 추론일 뿐 현실 속의 사회나 개인의 인격 속에는 여전히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그로 인해 우리는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이기심과 집단의식의 화학적 결합으로 인한 자기 분열과 사회적 불안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계속적 자기 분열 상태의 청렴의 기준을 갖는 것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내외적 성숙을 저해하는 나쁜 양심일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다. 국가나 사회적 위기를 직역이기주의의 기회로 여기고 국민적 권익을 사적 이익의 자양분으로 삼는 좀비들이 창궐하는 세상. 이보다 더 흥미로운 영화 주제가 또 있을까.(영화제작자나 소설가들이 보다 현실적인 주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자기부정적 역사관과 가치관, 분열적 도덕관을 가진 이들이 우리 사회의 중심에 서있을 때 우리는 병적인 피로사회의 부작용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양심(良心)이라고 말하지만, 저들은 양심(兩心)이라는 선택적 용어를 선택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선택적 정의를 부르짖고, 선택적 청렴을 얘기할 때 그 자신과 사회는 깊이 병들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이중적 양심을 가진 불량 공직자들이 바라는 우민(愚民, 현대화된 용어는 “개돼지”)이 결코 아니다. 상식의 결여와 몰염치한 도덕이 길러낸 괴물들의 세상에서 그들만의 인물론이 아쉬운 까닭이다. 하물며 그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우리를 위한다고 선언할 때 우리는 명백한 허언임을 안다. 늘 그러하였듯이.
이제는 잘 돌아보고 살펴봐야 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설치는 이들을.
그들이 말하는 공정과 정의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그들이 어떤 양심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그들의 분열된 청렴의식이 우리 사회와 선량한 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 물론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공직자들의 양심과 청렴은 상식과 정의에 부합할 것이다. 다행인 것은 우리 사회에는 부패 없는 사회를 염원하는 깨어있는 시민과 여러 시민단체, 한국투명성기구와 같은 비정부기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직적이고 고질적인 부정과 비리에 맞섰던 전 경기도교육청 김거성 감사관과 오종민 사무관 같은 이들이 등대와 소금으로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