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엘리트 공무원들의 도덕성은 어떨까?

드라마 <빈센조>가 허구에 그치기를 바라며

by 지성파파
"유능하면 부패해도 된다."(빈센조의 대화중에서)

우리 대부분의 헛웃음을 불러오는 저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른 도덕적 차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일 테다. 법과 상식을 뛰어넘는 자기들만의 도덕률.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이끌어가는 사회는 어떨까?


TV 드라마를 즐겨 보지는 않지만 <빈센조>의 예고 광고가 어느 날 눈에 들어왔다.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주연배우인 송중기나 드라마 출연자가 아닌 강력한 줄거리였다. 짧은 티저광고 같은 소개였지만. 이탈리아 마피아 측 변호사인 콘실리에리(마피아 패밀리 보스의 고문)가 한국에 돌아와 부패한 권력집단과 맞선다는 얘기는 솔깃했다. 드라마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예측불허의 상상이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제로인 까닭이었다.


모든 권력은 돈으로 향하고 돈에 의해 만들어진다. 드라마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다. 자본주의 세력과 검찰이나 경찰 등의 법집행기관의 커넥션은 드라마보다 훨씬 재밌는 스토리를 만들어내곤 한다. 때문에 우리 영화가 팬들의 관심을 덜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그 프로가 티브이에서 허무하게 사라진 까닭일 수도 있다.


<빈센조>에서는 바벨이라는 기업집단, 남동부검찰청, 일부 경찰, 법무법인 우상이 등장한다. 이들의 찰떡 결합은 돈이라는 마약을 공급받는 끈끈한 혈연집단처럼 연결된다. 그들의 욕망은 돈으로 평가되고, 그들의 야망은 돈으로 조직화된다. 그들의 금단현상은 모두 돈에서 시작되고, 그들의 비참한 최후도 돈으로 귀결된다. 부조리한 욕망이 그리는 바벨탑의 판타지가 신기루처럼 왔다 사라진다.


드라마의 시작은 황당했으나 그들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묵직했다. 드라마 전개는 불편하면서도 청량감을 주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 엘리트 집단의 정의롭지 못함을 꼬집고, 교묘하게 은폐된 그들의 부패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러 회를 거치면서 현실에서 우리를 당혹게 했던 여러 사건이 데자뷔 되었다. 뻥튀기 속에 알찬 견과류가 들어있는 느낌이었다.


특별한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범죄.

자신들의 부패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먹이사슬을 만들어가는 부패집단의 욕망.

권한을 권력으로 착각하고, 부정한 권한 행사를 부정의라 여기지 않는 그들의 도덕적 기준.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드라마 속에서는 부정한 기업가의 사주를 받은 법무법인에 의해 모든 것이 기획되고 실행된다. 법무법인이 의뢰인인 기업집단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머리와 손발을 제공한다. 여기에 전관예우라는 양념이 빠지면 서운한 법. 한때 유능한 검사였던 변호사가 어김없이 등장해 거악으로 향하는 키를 잡는다. 법기술자인 검사나 형사들은 이들의 충실한 하수인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야말로 부패집단의 일반화와 부조리의 일상화를 만들어낸다.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작가의 고충(?)으로 보이지만, 보는 내내 우리의 현실과 드라마를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빈센조>의 전개는 만화 스토리와 같다. 스토리나 상황의 개연성보다는 권선징악을 쾌도난마식으로 명징하게 드러낸다. 현대 범죄소설의 섬세한 심리적 묘사나 전개와 거리를 두고 고전소설의 징악법을 따른다. 현행법 체계하의 사법시스템이 불신을 받아서 일까. 빈센조는 때로는 악인보다 더 가혹한 처벌수단을 통해 징벌한다. 동해복수법을 전제로 한 함무라비 재판정을 소환한 걸까. 빈센조의 해결 방식은 "눈에는 눈, 귀에는 귀"라는 분명한 해법을 따른다.


빈센조는 마치 박봉성의 만화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속의 주인공 캐릭터와 같다. 일반인이 흉내 낼 수 없는 강력한 육체적 힘과 고도의 지능을 무기화하는 것을 보면. 부드러운 외모 속에 강력한 카리스마와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잔인함까지 숨기고 있다. 이 같은 캐릭터의 등장은 사법기관이나 법집행기관의 정당한 일처리를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부터 온다. 법치주의 하에서 사적 제재는 분명 문제가 되겠지만, 법집행기관의 부조리와 불신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귀결일 수도 있겠다.




"자신에게 유능하고 타인에게 무능하다."(빈센조의 대화중에서 )

자신들의 이익에 충실하고 국가나 시민들의 공익에 무관심하다. 이런 문장으로 바꿀 수 있겠다. 우리 사회에 여기에 부합하는 이들이 얼마나 존재할까. 늘 아전인수하는 일부 정치인들과 이들에게 협조하며 기생하는 권력기관의 일부 하수인들, 영혼을 털려버린 일부 공무원들.


우리의 현실은 자칫하면 '동굴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나 우물에서 하늘 보기'와 같을 수 있다. 미시적 고찰과 거시적 통찰을 갖지 못한다면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식은 물론 사회 시스템과 구성원의 부조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밥벌이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개인적인 문제로부터 사회적 범주에 이르기까지 시야를 넓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엘리트 계층의 다양한 비위와 부패를 경험한 바 있다. 또한 제대로 된 법적 처벌과 단죄가 이루어지지 않았던(혹은 실패했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정치적 범죄에 대한 법적인 처벌의 회피와 관용,

기업범죄에 대한 부실한 수사와 관대한 법적 처벌,

법집행기관의 선택적 정의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빈센조에서 보여준 마피아식 정의구현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을까?


정치적 좌표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고, 수사기관의 의도에 따라 범죄와 범죄자가 만들어지는 현실은 영화 속의 장면이 아니었다. 이는 수십 년 전 우리의 모습이었고, 오늘도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선의의 내부고발자가 가해자로부터 보복을 당하고도 단순 사고로 위장되는 장면도 낯설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가 서구적 범죄 스릴러나 미스터리 작품을 많이 접한 탓일까.


메시지에 반박할 수 없을 때 메신저를 공격한다는 법기술자들의 음모에 농락당한 과거의 경험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비록 빈센조와 같은 상황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설사 우리 눈앞에 저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정의에 대한 개념의 혼동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응징당한 거악에 대한 동정심은 없을 것이다.


극 중 빈센조에 의하면 이탈리아 마피아들이 대한민국을 무서워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암흑가를 주름잡는 조폭들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전혀 아니다. 그들의 조직은 훨씬 유구한 역사와 잔혹성과 강력한 무력을 가졌기 때문에 동방의 조폭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검사와 판사와 정치인을 막론하고 그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 집단이 없는 것을 보면. 우리의 동네 조폭과 이탈리아 마피아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면 왜일까?


마피아 변호사가 말하기를. 한국에는 이탈리아 마피아와 같은 강력한 세력이 여럿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 엘리트 집단의 추악한 속내를 비꼬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는 모피아(기획재정부 마피아), 세피아(국세청 마피아), 법피아(법조계 마피아) 각종 피아 등등. 소위 엘리트 집단의 직역 이기주의를 마피아의 세력과 같이 비유한 결과다. 나름 고개가 끄덕여진다. 국민의 권익이나 사회적 공익보다는 자신들의 조직생존과 성장을 위해 사회가 부여한 권한을 행사해왔다면 그들은 이미 마피아일 수밖에 없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상대는 말로만 정의를 부르짖는 정치인, 정부 관료들이에요."(빈센조의 대화중에서)

우리 국민들이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상대와 빈센조가 말하는 상대는 일치한다. 허울뿐인 정의를 말하는 이들은 견고하고 광활한 악 앞에서 나약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정의는 어떤 악당도 이길 수 없으며, 어떠한 악의 유혹도 뿌리칠 수 없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인 액튼경(John Dalberg-Acton)의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문장은 진리에 가깝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렇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말하는 우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법의 가면과 가식을 뒤집어쓴 위선 집단이 사회 중추에 있을 때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부패하게 되어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향상과 부의 축적에 집착하고 선민의식이라는 방패에 쌓여있다. 흔히들 공익의 수호자, 민의의 대변인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우리 주위에 살아가고 있다.


실체적 정의는 부르짖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정치인이나 정부관료를 막론하고 개인들의 정의는 나약하고 공허하다. 대중의 지지나 법제도의 뒷받침이 없는 정의는 허무한 구호에 머무를 수 있다. 시민들의 삶 속에서 상식의 이름으로 구현될 때 참된 정의구현이 가능할 것이다. 정당성 없는 정부나 권력자일수록 그들만의 정의 실현에 집착하고 대중의 정의에는 무심하다. 힘 있는 자 편에 서있는 우리들만의 정의는 화려한 독버섯과 같다.


정의의 여신(Justitia)이 가진 저울과 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혹여나 자신을 신성화하고 자기편을 제외한 나머지에게는 위험한 제스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정의의 여신은 왜 눈을 가리고 있을까? 편견을 갖지 않으려는 의도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눈가림이 또 다른 편견의 시작이거나 애당초 자신의 편에 있는 이들의 부정을 보지 않으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는 신성스럽지 못한 생각도 해본다.


비뚤어진 엘리트 의식에 의하면.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듯이. "성공한 부정부패 또한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도 가능할 것이다. 혹여라도 그들의 도덕성이 남달라서 자신들의 부정부패는 그 자리에서 나오는 혜택 정도로 폄하할지도 모르겠다.


확증편향이 생활화된 소수 엘리트 공무원들로부터 인한 가장 큰 피해는 적폐나 농단의 이름으로 온다. 정당한 자격은 없고 공부 능력만 가진 이들이 시험을 통해 법비(法匪)가 되는 현실에서 소수의 권한 집중과 권력남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법기술자와 음흉한 자본세력에 대해 법과 주먹을 통해 통쾌하게 응징한 드라마 <빈센조>. 답답한 세상살이에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작가와 연기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청산되지 않는 우리의 역사나 거대악에 협조하고 생계형(?) 범죄에 민감한 검찰이나 경찰 조직을 보면. 드라마속 빈센조식의 처단이 꼭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은 혼자만의 착각일까.


어쩌면 우리는 <빈센조> 드라마 같은 현실을 바라지 않지만. 만약 그런 악의 무리가 존재한다면 드라마의 마지막 같은 결말을 바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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