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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Dec 27. 2021

드라마 <설강화> 논란이 불편한 이유가 있었다

창작의 자유의 한계는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계해야 할 역사(혹은 역사적 사실)가 있다.


첫째는 미화된 역사다. 승자들의 역사다. 부풀려지고 과장된다. 주로 난세와 영웅이 등장한다.


둘째는 왜곡된 역사다. 부끄러운 이들의 역사가 이에 속한다. 전혀 다른 사실로 바뀐다. 난세가 아님에도 자기 부정과 분열적 영웅이 등장한다.


셋째는 역사의식 없는 이들이 말하는 역사다. 동시대를 살면서도 무관심과 방관으로 일관하는 이들의 역사다. 이들은 사실을 외면하고 상황에 수동적으로 부역한다.


넷째는 자신들이 역사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말하는 역사다. 역사적 사실 속에서 주인공 역할을 자처하는 이들의 역사다. 이들은 영웅은 아니지만 나름의 서사 속에서 훈장을 달고 열매를 나눠 먹는다.


우리가 이들을 경계해야 함에도 이들 모두가 현재의 우리 속에 존재한다. 그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최근 드라마 <설강화>가 뜨거운 감자다. 논란의 포커스는 역사왜곡. 아직 진행 중인 작품이어서 제작자와 일반 시청자, 비평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제작자나 작가의 의중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노출된 일부를 보고 전체를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대중에 공개된 스토리에 의하면 왜곡된 역사적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창작물은 역사 속의 사실과 허구를 주된 소재로 사용한다. 완전히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 때문일까. 익숙하다 보니 완전한 가공의 세계보다 더 그려내기 쉽고, 독자나 시청자의 관심이나 공감을 이끌어내기 쉬워서일까. 시대극을 보다 보면 계속적으로 다르게 각색되어 작품화되는 시대와 인물들이 많다. 그런 연유로 우리 문화계의 작품들도 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를 다룬다. 근대사는 일제 치하여서 역사적 주체성을 그려내기 어렵고, 현대사는 산증인들이 도처에 존재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많아서 가능한 피하고 있다.

 

설강화의 연출가나 작가는 이 논란이 억울할 수도 있다. 스토리의 본말이 공개되기도 전에 이런 의문과 논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하지만 창작의 주체 입장에서 얼마든지 이런 의혹과 논란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창작의 범주에서 보면 얼마든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허구의 스토리와 소망스러운 시대상까지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굳이 민감하면서도 피해자들이 다수 존재하는 시대상을 선택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적을 수밖에 없다.(어쩌면 대부분이 아는 1987년을 교묘한 시각으로 조망하고픈 욕망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우리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1970~1990년을 살아온 이들에게 1987년은 어떤 시대였을까? 군사정권과 군사쿠데타 정권이 줄을 이어 암흑시대를 제공했던 시절 아니던가. 집권자들과 그 부역자들이 구국의 화신이 되고 선량한 시민과 단체가 간첩이나 이적집단으로 매도되었던 시절 아니었던가. 그 시절의 부역자들을 정의의 사도로 미화하고, 간첩(?)을 민주화 인사로 오해받을 수 있게 만드는 서사는 역사적 현장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인류사회의 여러 시공간에서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고 날조되었다. 히틀러의 나치 정부에서 우리의 제3~5 공화국의 군사정부에서 만들어진 사실이 역사가 되고 선의로 포장된 악의가 시대적 인식이 되었다. 열등 민족이나 빨갱이로 낙인 된 이들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권력집단의 편의에 의해 부역하지 않고 저항하는 이들을 향한 악의적 시선이 평범한 이들의 의식 속에 그리 박힌 것이다.


역사적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는 있다. 다만 그 속에 이소스(pathos)와 비통함이 녹아있어야 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존중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전개 내용만을 위해 특정 상황을 희화화하는 것은 창작이 아닌 조롱이 될 수 있다. 드라마는 드라마로 영화는 영화대로 보는 게 맞지만, 그것은 정도의 문제일 뿐 한계를 넘어선 작품의 일탈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창작의 자유와 제작의 독립성은 중요한 기본권이다. 그 한계도 양심의 자유와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기에 창작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고 그 한계 또한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무한계에 가까워야 한다. 그 첫째는 인간의 존엄성이고 둘째는 올바른 역사 인식이다. 창작의 자유라는 이유로 이 두 가지를 훼손하면 그 결과물은 예술작품으로서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역사란 그 사실의 "존재"를 아는 것이 앎이 아니다. 그 시대적 상황과 사건의 당위성, 시간의 불가역성을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역사적 사실과 그 실체를 안다고 할 수 있다. 더하여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해야 비로소 역사의 진면목을 아는 것이다. 단지 시대적 로맨스라는 드라마적 재미를 위해 팩트를 무시하고 역사적 상황을 재설정하는 것은 이미 표현의 자유를 이탈한 것이다.


창작의 자유는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왜곡이 의도적이라면 비열한 역사인식을 변명해야 하고

왜곡이 무지였다면 저열한 지적 인식을 자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범한 시민을 간첩으로 몰아 수십 년씩 감옥에 가두거나, 벌건 한낮에 400여 생명이 물속에 잠긴 비극을 그저 교통사고쯤으로 치부하는 치욕적 무능과 무지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얼마 되지 않은 우리의 역사적 사실이다.


왜곡이 무서운 이유는...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도적 왜곡과 비판기능을 상실한 언론이 우리 역사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확정된 과거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있지만 악의적 의도가 개입되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문에 반역사적 인식을 창작의 자유라는 기치 아래 숨기는 것은 가장 비겁한 짓이 될 수도 있다.


역사의식이 희박한 이들이 왜곡된 역사를 만나면 그 사회는 위험에 빠진다. 또한 스스로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미화할 때 그 사회는 독선에 빠진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이 이들 사이 어디쯤에 위치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보다 한세대 이전의 패악적 사실과 부역자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실 그 자체를 그대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시간대나 그 장소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창작의 자유는 역사의 상처나 시대적 고통을 넘어설 수는 없다.

적어도 역사적 진실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겸손해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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