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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Jul 20. 2021

당신은 누군가의 "보조배터리"입니까?

하루 종일 민원(거래처)과 다양한 업무에 쫓긴 엄마(아빠)가 집에 들어선다. 일명 잘 익은 파김치 모드로. 오전에는 정신 차리느라 오후에는 짜증을 달래느라 쓰디쓴 커피를 여러 잔 마셨다. 카페인 덕분에 머리는 맑아졌지만, 당 떨어지기 일보직전의 초초함이 오후 시간을 갉아먹었다. 그놈의 바이러스 때문에 즐거워야 할 점심시간마저도 마냥 숨죽이고 때우는 시간으로 전락했다. 집에 오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오늘 저녁 반찬은 무엇을 해야 할까. 가족들을 위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야 할 텐데... 여러 생각이 소용돌이치며 지나간다.


저질 체력으로 온종일 시달리다 보니 힘도 의욕도 사라진 저녁 7시.... 보약이라도 한재 먹어야 되나 하면서도. 아이들 학원비와 아파트 대출이자를 생각하면 언감생심. 번호키를 누르는 순간까지도 패잔병 같은 발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는 뜨거운 여름의 하루. 언젠가부터 알 수 없는 열화가 치밀기도 했는데, 혹시 갱년기?


현관에 또랑또랑 눈망울을 굴리며 엄마를 향해 두 팔을 벌리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위에 누나들과 형이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품 밖의 자식들, 엄마를 위한 현관 맞이는 오롯이 막내인 초등학생의 몫이다. 활짝 미소를 보이는 아이를 보자마자, 엄마의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진다. 엄마 아빠의 고함량 비타민. 언제 우리 막내가 이렇게 컸는지. 묵직하지만 아이를 안아 든 두 팔에는 새로운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엄마가 가져온 하루 동안의 노고와 고통이 이토록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 신비한 경험이... 집 앞 현관문에서조차도 방전된 상태였는데 아이와 눈빛이 연결된 순간 초고속 충전이 돼버린 더 신비한 상황을... 수많은 엄마들은 경험했을 것이다. 


동네 마트에서 두부와 콩나물을 집어 들고서도 저녁 메뉴를 고민했던 복잡한 머릿속은 가족들이 좋아하는 몇 가지 식단으로 순간 업데이트된다. "대충 먹자"에서 "가능하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만들어보자"로 마음가짐이 바뀌고, 하나하나를 만들어내는 손놀림도 빨라진다. 가족으로 인한 재충전의 시간이 없었다면 이런 장면은 그저 상상 속에 머무를 것이다.


음식을 할 동안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가수 <스텔라 장>의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이라는 노래가 들린다. 경쾌한 리듬이 절로 미소와 흥을 만들어낸다. 못된 근심 걱정 또한 마음속을 초스피드로 스쳐 지나가버렸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필수품으로 등극한 최신 스마트폰에는 배터리가 내장되어 있다.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에도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해주는 배터리 기능이 내재되어 있다. 스마트폰이 가끔씩 방전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정신적 육체적 허기가 느껴지는 때가 있다. 스마트폰과 우리 인간의 차이가 있다면, 전자의 경우 방전되더라도 다시 채우면 전혀 문제가 없지만, 후자의 경우 다양한 후유증이 남는다는 거다.


월급이 통장을 스쳐지나고, 해도 해도 줄지 않는 업무에 시달리고, 거래처와 민원인의 클레임은 계속되고, 몹쓸 코로나는 더 가깝게 다가오고, 거리두기가 가족들의 마음속에도 진행되고, 구차한 과거와 손절해도 비굴한 미래가 다가오고... 왜 현명한 누군가가 "인간의 삶을 사면초가의 연속"라고 말하지 않았는지 별 쓸데없는 망상도 하게 되고. 이럴 때 우리는 비자발적인 번아웃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누구든지 번아웃이라는 불리는 육체적 심리적 방전을 피할 수가 없다.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지 아닌지만 다를 뿐. 문제는 그 단계에 다다르기 전에 방전을 예방하거나 미리 충전하거나 하는 다른 수단이 있지 않을까. 자발적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면 좋겠지만. 신체 에너지의 역학구조상 미리 살펴 보충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많다. 우리 몸과 마음의 방전 정도를 나타내는 그래프나 자각할 수 있는 도구가 전무한 까닭이다. 따라서 우리의 번아웃 여부는 '부존재가 존재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많은 이들이 고유의 배터리를 완전히 방전시키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나 자신에게는 없는 타인들의 보조배터리의 영향이 아닐까.(물론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를 위한 보조배터리는 없지만, 타인들을 위한 보조배터리는 내재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정현종 시인의 <섬>시구처럼 하나의 섬일지라도 다양한 신경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네트워크다. 흔히 인간관계로 불리는 이 네트워크 때문에 인간의 삶은 불완전하면서도 영속성을 지니며 살아간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자. 가족이든지 중요한 타인이든지 누군가 나의 체온과 열정을 보충해주는 존재가 반드시 있다. 내 자신의 마모를 더디게 해 주고,  내 상처를 덜 덧나게 해주는 따뜻한 손길이 있다. 타인의 고통과 처지를 배려해주고 응원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결국 영원한 내편뿐만 아니라 어쩌다 내편인 중요한 타인들이 보내주는 응원과 격려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살리고 고갈된 에너지를 보충해준다. 전형적인 이해타산적 이익집단(Gesellschaft, 페르디난트 퇴니에스)인 밥벌이 조직의 냉정한 이기심 속에서도 서로에게 빛을 발하는 이타심이 있다. 제 아무리 삭막한 조직에도 친구 이상의 호의를 베푸는 동료와 선후배가 있고, 생면부지의 대중이 모이는 대중교통과 길거리에서도 뜻밖의 선의를 베풀 줄 아는 이타적인 존재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가 누군가의 완전한 방전을 막아주고 재충전하는 소소한 계기를 만들어주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장르가 무얼까 고민했다. 로맨스와 스릴러, 코미디가 버무려진 휴먼 드라마 ᆢ그 속에 엄마들과 지키고 싶은 아이들이 있었다.

높은 시청율로 유명했던 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속에서 이런 대화 장면이 흘러갔다. 주인공 동백(공효진 역)이 하는 가게인 까멜리아(술집 겸 밥집)에서 동백을 도와주던 향미(손담비 역)가 동백의 아들인 8살 필구(김강훈 역) 하교시키다가 이런 말을 했다.


 "필구야, 너는 우리 집 보조배터리잖아."


필구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엄마인 동백을 엄마이게 하고, 이모인 향미를 이모답게 해 주고, 속죄하는 할머니를 헌신적인 할머니라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동안 고아로 어렵게 자라나 술집을 전전하여 사람들을 불신하고 살아왔던 향미에게 동백의 가족은 향미 자신의 가족이 되었고, 필구는 향미에게 아들이나 조카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얘기다. 어린 필구를 중심으로 해서 가족이  재생성되고 구성원이 늘어나면서 휴먼 드라마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끝가지 애정과 헌신을 통해 사랑하는 이를 지키려는 황용식(강하늘 역)과 정숙(이정은 역), 곽덕순(고두심 역)등 주요 인물들과 그 밖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명품 조연들의 역할이 있었음은 당연하다.


보조배터리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시구절이 있다. 안도현 시인의 시 <너에게 묻는다>의 구절.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한 번이라도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겠지만, 시인은 연탄재에 빗대어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이익 사회의 차가움에 경종을 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능력주의와 개인주의로 충만한 사회, 개인보다는 조직이 먼저인 사회, 감성보다 이성이 대접받는 사회, 따뜻함보다 냉정함이 더 우월한 사회에 대해 시인은 무언가 할 말이 많았던 것이다. 시인은 우리가 서로에 기대고 위로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서로 위로해주고 버팀목이 되는 존재가 되는 법에 대해 묻고 답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혼자만의 생각이다.


주배터리를 내장하고 살아가면서도 많은 이들이 자신의 방전 시기나 충전 방법을 모른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상태와 충전의 필요성에 대한 고민은 더더욱 없을 수밖에. 하여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같은 역할은 고사하고 스스로도 번아웃되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의 보조배터리의 역할이 없었다면, 누군가의 발에 차이는 연탄재 같은 숨은 열정이 없었다면. 혹여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진 충전 불가능한 존재로 남겨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주배터리는 방전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타인들을 위한 보조배터리는 언제든지 사용 가능하도록 빵빵하게 채워놓을 필요가 있다. 이 하루가 서로에게 번아웃되지 않게끔. 그래야 우리의 삶이 늘 "꽃이 필 무렵"에 다가서서 꽃길을 걷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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