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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Jun 17. 2021

가짜 지식이 아이들을 살찌울 때 벌어지는 일들

자존감과 위로에 목마른 갈증사회

ᆢ ᆢ

유튜브와 부의 축적에 집착하는 중독사회

ᆢ ᆢ

풍요 속의 빈곤이 개념화된 비교사회

ᆢ ᆢ

그래서 여러모로 피곤이 일상화된 피로사회

ᆢ ᆢ

어쩔 수 없이 펼쳐진 우리의 일상이다.


(여기서 가짜 지식은 주관적 개념으로 "우리의 삶에 인문학적으로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과 정보 꾸러미"로 정의한다.)



거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 읽는 아빠에게 슬슬 눈치 보며 접근하는 아들의 한마디.

"아빠, 그거 알아???"(이 문장이 나오면 무슨 퀴즈 프로에 출현한 느낌이 든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그런 씨알데없는거 보거나 듣지 말고 잠이나 자라~~~"(아빠의 요 대답을 듣고는  모종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유유히 사라지는 아들. 여전히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다.)

"너. 또 게임 유튜브 보는 거 아니지."(아들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 질러 보지만. 이미 아들의 방문은 굳게 닫힌 뒤여서 알 수 없는 의문의 1패.)


우리 집 셋째인 큰아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를 다행이라 생각한다. 자주 큰소리가 나고 언어적 폭력이 십자포화의 잔혹성을 보일지라도 아들과 아빠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다. 아들이 아빠 속을 긁고 아빠는 아들의 성장점을 자극하는 다소 지적(?)인 대화가 주된 소재이긴 하지만. 그러함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제법 흥미진진한 주제와 소재 속에 진행된다. 물론 대화 주제 중 1970년대 같은 금지어도 있다. 성적표, 장래희망, 인내심, 문학, 아빠 때는 ᆢ 아빠가 아무리 시대를 초월하는 얘기를 해도. 아들의 반응은 크게 변화가 없다. 그저 꼰대의 얘기처럼 들렸을까.


어른들의 세상에서도 아이들의 세상에서도 진실과 거짓, 진짜와 가짜가 존재한다. 특히나 팩트 체크가 어렵고 정보의 비대칭성을 이유로 인터넷상에 진위 불명의 지식과 정보가 공존한다.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를 핑계로 진실과 가치평가는 생략되거나 불분명해진다. 소문이 만들어낸 전문(傳聞) 정보라 할지라도 사실 여부에 따른 책임소재도 묻지 않는다. 넘쳐나는 먹방들과 온갖 정보의 블랙홀. 미식과 탐식 사이를 오가는 유튜브 채널은 우리의 유한한 시간을 차곡차곡 갉아먹고 만다.


지금은 유튜브와 SNS 전성시대. 알찬 콘텐츠도 많지만, 돈벌이나 인기를 위한 정체불명의 내용이 활개를 친다. 지식의 범주는 정치 경제(재테크), 음식과 술, 스포츠와 성적인 흥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검증은 어디까지나 시청하는 소비자의 몫이다. 아니면 말고식의 근거 없는 정보나 삶에 큰 도움 안 되는 단편적인 지식이 조회수라는 날개를 달기도 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극과 호기심,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무차별적으로 지식과 정보를 흡수한다. 몸에 대한 다이어트는 이미 상품화되어 수많은 해결책이 난무하지만, 과잉 정보의 흡수에 대한 해결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런 의도를 가진 정보마저도 과잉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헤매다 사라진다.


지식의 기준점이 다양성이라는 애매모호한 차원에서 판단 불가의 저세상으로 빠져든 형상이다. 그래서인지 아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정보꾸러미를 내밀어 아빠의 상식을 시험하곤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문학에서 벗어난 주제들. 뜬금포 같은 내용을 아빠가 알 수 있을까. 한때 "걸어 다니는 사전(walking dictionary)"이 유행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빠들의 추억 속에서만 살고 있는 한물간 존재다. 아들의 기준에 의하면 아빠는 시대에 덜떨어진 존재 정도로 취급된다.



살아있는 지식이란 무엇일까? 

진짜 지식과 가짜 지식의 경계는 모호하다. 팩트와 진실을 전제로 나뉠 것이 분명하지만. 그 사실을 액면 그대로 전달받을 길이 없다면  구분 자체를 바라는 것이 과도한 욕심일 수도 있겠다.


실용적인 지식이란 무엇일까?

실용과 비실용의 경계는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됨을 실용이라고 부르면 의미 있겠지만. 이러한 정의 또한 인간의 다양한 욕망과 기호의 층위 속에서 길을 잃을게 뻔하다.


진실됨에도 무용한 지식이 있고, 진실성이 불명확함에도 유용한 정보도 있을 수 있다. 양자의 경계에 불문율이 있다면 후자가 전자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할까?


세상과 인간에 대한 수업이 필요한데 인간에 대한 관심도 인간사회에 대한 흥미도 없는 이들에게는 이 또한 허튼 얘기에 불과하다. 흥미 위주의 자극적이고 비실용적(?)인 정보가 범람한 우리의 현실. 아이들이 특별한 필터링 없이 위험정보에 노출될 가능성은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방치되어 있다. 오늘 밤에도 아이들은 수많은 게임과 먹방, 연예인들의 일상 노출 유튜브의 바닷속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기관이 주도하는(혹은 기준을 정하는) 검열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무엇보다 중요한 기본적인 권리 아니던가. 문제는 어디까지 언제까지 아이들의 손에 방치할 것인가가 아닐까. 아이들 스스로 옳고 그름이나 진실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할까. 아니면 부모와 상식의 이름으로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을 말하는 것이 타당할까. 이 역시 해를 구하기 어려운 수학 문제다.


누군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진짜 지식이거나 실용적인 정보만 존재할까. 우리 배웠던 많은 것들은 우리의 삶에 도움에 되고 인간적으로 살아가는데 양분이 되고 있을까. 이 또한 대답이 어려운 철학 문제다.



우리의 교육 현실을 돌아보면. 국영수 위주의 성적 지향적인 교실 속에서 살아있는 교육과 실용적인 교육의 준별은 어렵다. 더더욱 무엇이 교육의 옳은 방향인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교육철학적 차원과 교육현장의 상황이 그러할진대. 생각이 커가는 아이들에게 기준과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각종 유튜브에서 검증되지도 확인되지도 않는 사실과 주장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무익하거나 유해한 정보를 거를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없다>가 현실적인 답이다.


어른들마저 자극적이고 시간 때우기용 채널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까. 더 안타깝지만 <없다>가 현실적인 답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몰이해는 분명 뛰는 가슴과 살아있는 지식의 결여로부터 온다. 밸런스를 상실한 편견과 과도한 자기애는 이러한 결핍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갈수록 복잡다단해지는 우리 사회는 가치 분별은 어려워지고 중독성향은 강화된다. 살아있지 않거나 실용적이지 못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 <가짜 지식>은 호기심 충족을 제외하고는 순기능이 별로 없지 않을까.(물론 시간을 제대로 죽여주는 기능은 그 무엇보다 월등하다.)


목마름이 심하다고 바닷물을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되듯이 지적인 갈증 때문에 아무 정보나 접해서는 안될 것이다. 유튜브나 각종 SNS의 결합과 연계기능, 호기심과 심리적 방어기제의 충족이라는 장점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유튜브가 만든 허상의 판타지와 부동산 공화국이 불러일으킨 영끌의 대열 속에서 어른들이나 아이들 모두 심리적 허기를 느낀다. 어른들은 부동산의 부재에서 아이들은 성적의 부재에서 배고픔의 절정을 느낀다.


우리의 21세기는 끊임없는 경쟁이 요구되고, 자의 반 타의 반 누군가와 비교해야 하고, 물적 자산의 축적과 자신의 스펙을 위해 영혼까지 끌어모아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많은 순간 고유의 캐릭터와 평정심을 상실하고 피로해질 수밖에 없다. 자존감은 저절로 낮아지고 무언가 위로는 필요하고. 다시 유튜브의 세상 속으로 전진할 수밖에...


탁구와 기타 연주 유튜브를 즐겨보는 아빠 뒤에서 또다시 아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번에는 무엇을 물어볼까. 심리적 허기에 이어 혈압까지 상승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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