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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Nov 12. 2021

나의 평범한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운명이 될 수도 있다

가끔씩 공무원의 일처리에 관한 미담이 뉴스거리가 된다.(물론 일부 공무원들과 그들의 업무가 동네북이 된지는 오래 전의 일이다.)


어쩌면 공무원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운명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 공무원이 다른 이들과 동일한 업무처리를 했더라도 최소한 비난받을 여지는 없지 않을까.

 

누군가의 불행을 예방할 수 있는 경우는 공무원 개인이 직무를 좀 더 꼼꼼하게 살피는 습관과 사소한 의문이라도 함부로 흘러 보내지 않는 동물적 감각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매일 반복되는 업무를 처리하는 수많은 공무원들에게 이 같은 수고를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훈훈한 미담은 반복되지 않는다.



2008년, 서울 00법원에서의 일이다. 오전 업무를 끝내고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누군가 찾아왔다고 직원이 면담을 요청했다. 업무 관련 문의 때문일지 아니면 항의성 방문인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접수 안내 데스크로 나갔다. 깔끔한 옷차림의 중년 여성이 다소 들뜬 분위기로 나를 마주했다.


"000 사무관님 되시죠? 저는 송파에 사는 000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너무 큰 은혜를 입어서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무슨 영문인지 의아해했지만, 곧 위조등기로 인한 사기 피해자가 될뻔한 강남구 부동산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았다.

"아, 000 선생님 되시죠. 경찰과 변호사 쪽에서 연락받으셨다고요. 정말 다행입니다. 자칫하면 큰 고초를 당하실 뻔하셨습니다. 저야 공무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이 사건은 등기 신청인이 등기권리증을 분실해서 의뢰인의 대리인인 변호사가 등기의무자의 신분과 처분 의사의 진정성을 확인한 경우로서 외형적으로는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치명적인 오류는 범죄를 공모한 이들이 복사해준 신분증의 진정성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라 할지라도 신분확인의 한계는 분명하다. 특히나 사건 수임 현장에서 의뢰인 본인이 신분증과 인감증명서를 지참한 경우는 수사기관의 베테랑조차도 속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동산을 사고팔 때 마지막 단계에 소유권이전등기를 하여야 그 효력이 발생한다. 개인에게 집은 가장 중요한 자산이지만, 다주택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개인들은 이러한 법률행위에 문외한이다. 때문에 어느 개인이 자신의 부동산 처분이나 취득으로 인해 등기소를 방문해서 등기절차를 진행하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대부분은 법률전문가들에게 맡긴다. 개인들이 어쩌다 한번 해보는 일을 전문가 수준으로 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에너지 소모가 과도하기 때문이다.


법률전문가인 변호사나 법무사도 각종의 신청절차에 해박하지만 의뢰인 본인의 진정성 여부를 100% 확신할 수는 없다. 이때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부동산 소유자임을 나타내는 등기권리증(등기필증, 현재는 등기필정보)과 개인의 인감증명서이다. 원래는 둘 다 있어야 하지만, 등기필정보가 없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때에는 자격자대리인이라 불리는 변호사나 법무사가 등기의무자가 등기부상 최후의 권리자임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다. 대부분의 사기범죄자들은 전문가들의 신분확인 여부에 대한 맹점을 노려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다.


자신의 평생의 재산인 아파트를 사기범죄로 날릴뻔한 분도 자신의 집을 임대로 내주고 자신은 송파구에 전세로 살던 경우였다. 법원의 업무상 전문가들이 등기의무자의 신분을 확인한 경우 재차 확인할 법적인 의무는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등기관들은 대리인을 신뢰하고 업무를 처리할 수밖에 없다. 통상적인 절차 이상의 의혹을 가지고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처리절차가 지연되고, 오히려 자신과 민원인에게 역효과를 발생시키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사건 이후에 위조등기 사건 두건을 더 적발했다. 피해자가 될 뻔했던 이들은 모두 우리 주위의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만약 그대로 등기가 완료되었다면, 등기 무효와 말소소송이라는 지난한 절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시민의 재산을 사기범죄에서 지켰다는 점에 의미를 두었지만, 여전히 시민의 재산이 범죄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세태를 보면 씁쓸함이 남는다.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절차는 수많은 타인들의 인생이나 하루를 좌우하는 문제들이다. 담당자의 입장에서는 사회복지 업무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감정 중립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 하나하나에 필요 이상의 정성을 쏟을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하소연이나 억울한 사정은 그들의 처지이거나 개인사로 치부된다.


어쩌면 이런 업무처리가 담당자 개인에게는 이롭다. 누군가의 사정을 들어주고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에너지 소비가 많고 피곤한 일이다. 그냥 객관적 입장에서 일을 감정 없이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결코 담당자의 잘못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고민이 피어오른다.


과연 관행이나 형평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절차는 정당할까?

개인적 사정을 고려해서 보호받아야 할 사회적 약자나 억울한 이들의 심정을 어루만져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업무를 처리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신청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처리하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재량이 허용되는 업무라 할지라도 객관적 거리두기를 하지 않으면 업무의 중립성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또한  타인의 개인적인 사정을 고려하며 일을 처리하다 보면 또 다른 타인에게 불공평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심사나 조정이 필요한 신청절차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간과하는 게 하나 있다. 업무관계의 양면성, 상대성 혹은 개별성의 측면. 다시 말해서 일을 처리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한 건의 업무이지만, 신청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인생이 달린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통상적인 인감증명서를 발급하거나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관공서의 인허가를 요하는 일들이 모두 이러한 양면성과 상대성을 갖는다. 특히 공적인 판단 작용이 필요한 신청. 예를 들어 재판이나 가족관계, 권리의무의 행사에 관한 민원, 인허가에 따라 경제적 이해관계가 달라지는 신청은 당사자에게는 지극히 중요한 사항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개인의 경제적 이해관계이거나 신분에 관한 것이거나 관계없이...


관공서에 오는 민원인들은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마트에 가는 것과 전혀 다른 생각과 행위를 필요로 한다. 공적인 절차를 통해 갈등이나 분쟁의 해결을 요구하거나 집을 건축하거나 요식업에 대한 허가 의 생계에 관련된 판단을 받고자 한다. 때로는 자산가치가 큰 재산을 처분하거나 꼬여있는 법률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업무 당당자의 입장에서는 편견을 갖거나 어느 한편에 치우쳐 판단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개인의 고충이나 개별적 사정은 주관적인 감정의 영역에 머무른다. 하지만 보다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거나 타인과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우려가 없는 경우에는 다시 한번 민원인의 속사정을 들여다볼 일이다.


결국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중대사건이 되고, 삶이 바뀌게 되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하여, 때로는 법적인 의무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사정을 들여다보고 이를 처리할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해주는 미담이 드문(드물어질) 까닭이다.



* 표지 사진은 아차산에서 구급대원들이 응급환자를 헬기로 송하는 상황임(202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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