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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Jan 18. 2023

아드님, 학기말 성적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스산하게 겨울비가 내리는 12월 말의 오후 4시.

뽀료롱, 문자 알림 표시가 뜬다. 무슨 광고성 스팸이나 카드내역인가?

"(웹발신). 오늘 2학기말 성적표를 배부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렇지. 셋째이자 큰아들인 고1의 학기말 성적표가 배부되었으니 확인하라는 문자였다. "확인"이라는 단어에 필이 확 꽂혔다. 확인해야 되는 의무사항이구나. 이런.... 구체적인 확인 절차에 대한 안내가 없네... "무엇"을 확인하라는 거지. 배부되었다는 사실을. 아니면 배부된 성적표에 기재된 점수를. 아니면 아들이 시험 봤다는 객관적 실을... 확인하면 되는 건가. 여러 생각이 바람처럼 왔다 사라졌다.


오후 5시. 창밖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비가 눈으로 바뀌고 있었다. 우산도 없는데... 왠지 불안한걸. 이 불안함의 정체는 뭐지! 우산이 없어서 아니면 성적표가 없어질까 봐.. 성적표는 사라져도 성적은 남을 터인데. 무엇일까?


요새 학교는, 아니 선생님들은 친절하다.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항들을 문자로 통지해 준다. 각종 행사참여나 시험도우미 참가여부, 성적표 통지 등을 알려준다. 겨울 저녁으로 퇴근하는 동안 가슴이 한 근 반 두 근 반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제법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하는 아들의 진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모의 마음은 이렇게 순진하다 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초등학교 시절 생각이 났다. 같은 반 친구가 성적표를 변조했다가 된통 혼난 사건이었다. 그때는 반성적이 1등부터 55등까지 있던 시절이어서 로또 숫자보다 더 많은 등수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의 객관적 성적은 13등. 친구가 원했던 성적은 3등. (뒤쪽 3을 지우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방법은 앞쪽 1을 지우개로 지우거나 칼로 긁어버리면 되는 거다. 친구는 기발하게도 이 생각을 떠올렸고 실행에 옮겼다. 심지어 뒷자리에 있던 반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했었다. 어디던지 선구자는 필요한 법이다. 비록 욕을 먹더라도...


친구들은 그 친구의 용기를 가상히 생각했다. 따라 하고픈 욕망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대나무 뿌리 회초리가 무서워 주저하고 있을 뿐이었다. 친구의 변조행위는 지금의 위변조 기술에 비하면 한참 뒤처진 것이었고, 그날밤 술 취한 친구 아버지는 공문서 위변조의 흔적을 너무나도 쉽게 발견했다. 그 당시 지우개의 성능이 좋지 않아 열심히 지우다 보니 종이까지 지워버린 까닭이었다. 삼십촉 백열전구가 형광등으로 바뀐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물론 종이의 질도 지금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구멍 난 곳에 있어야 할 숫자가 사라진 이유를 취중에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친구는 그날밤 여름날 개 맞듯이 맞았고, 찢어진 성적표를 밥풀로 붙여 다시 학교에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론적이지만, 애당초 실패할 수밖에 없는 허술한 계획이었다. 그래서 선구자는 위험하고 외로운 법이다.


지금은 의엿한 중년이 된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다가 잠시 멈춘 사이 집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혹여라도 눈이 쌓이지 않았을까. 내리는 역이 지상역 구간이라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 불길하다. 이 바람은 뭐지.... 급히 귀마개를 꺼냈다.


그날 저녁 밥상에서 '오사카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유투버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미리 뜸을 들이는 건가. 잘된 밥도 뜸 들이기가 필요하듯이, 보기 좋은 성적표를 내놓는데도 뜸 들이기가 필요한 건가. 김치찌개와 계란찜을 맛있게 먹으며 계속 오사카 술먹방을 얘기하는 아들. 그러다 갑자기 일본여행을 가자고 졸라대고 있었다. 오사카 아니면 오키나와로. 자랑하기 좋은 성적의 대가를 바라는 걸까. 기대도 허무하게, 과일을 먹고 자기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성, 적, 표의 어느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다. 부끄러웠을까?


아마도 아들은 연말과 새해벽두부터 부모님의 심기와 건강을 우려해 성적표 전달식 혹은 살짝 보여주기를 생략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혹여나 아들이 성적표를 보여줄 타이밍을 놓칠까 봐, 아빠는 거실에서 며칠간 계속 서성거렸다. 그사이 해가 바뀌고 2023년이 되었음에도 성적표는 아직 아들의 수중에 있는 걸로 간주된다. 하기야 아들의 누이들도 성적표 내놓는 일에는 무관심했거나 소질이 없었다. 이것도 형제들 간의 전통인가!


2023년에 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된다. 새해가 밝고 학년이 올라간다고 해서 성적에 복리가 붙는 것도 아니고, 성적이 발효될 이유도 없다. 어김없이 새해의 첫날은 시작되었고, 아들의 공부전선은 새로운 작전명으로 진행되었다. 1월 1일, 떡국을 두 그릇이나 먹던 아들은 앞으로 자신을 1등급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갑자기 수능 인터넷강의 사이트를 뒤져 연중 프리패스를 구입하고 필요한 책을 여러 권 주문했다. 왜 그런지 설명도 없었지만, 작심삼일의 냄새가 심하게 풍겨났다. 올해는 부모의 심정으로 믿고 기대란 걸 해볼까?


아들의 마음속에서는 예전의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스멀스멀 다가올 것이다. 지금의 성적이 고금리가 붙은 원금처럼 쑥 불어나기를 바라지만. 어디까지나 아빠의 생각일 뿐이다. 그럼에도 성적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대화가 가능한 아들의 건강한 멘탈을 응원한다. 성적은 유동성 자산으로 언제든지 시간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아들이 살아가야 할 자신의 삶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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