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묘사한 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 폴 호건(화가)
“여러분의 생각을 주문하세요? 생각나무가 해결해 드립니다. 그동안 어려운 문제였던 중2병과 중년의 위기를 극복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분의 인생숙제를 해결해 드립니다. 여러분의 삶이 원하는 대로 뜻하는 대로 길이 열릴 겁니다. 생각나무 주식회사가 함께 하겠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무 본사에서는 무료로 체험부스를 통해 각종 상품을 경험할 기회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우리 생각나무가 여러분들을 기다립니다.”
음악프로그램으로 유명한 라디오 방송에서 광고가 흘러나왔다. 생각나무에서는 라디오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최근에 아날로그에 향수를 느끼는 욕구의 증가로 라디오 청취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까닭이다. 다양한 세대가 각 방송국의 디지털 앱을 통해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있었다. 덕분에 라디오 광고가 틈새시장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민수경 마케팅 팀장의 제안으로 라디오에서 전파를 타는 광고 멘트는 선풍적이었다. 귀에 감기는 배경음악과 전달되는 문장은 광고업계에서 스타 카피라이터, 유능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던 민팀장이 직접 만들었다. 인문학 에세이 작가이면서 강연가로도 이름을 떨친 그녀는 생각나무에 걸맞은 인재로 안대표가 직접 스카우트했다.
“여러분 라디오 광고는 티브이 광고비용의 100분의 1도 들지 않습니다. 티브이 광고는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를 기용해서 화면으로 보여주다 보니 막상 무슨 제품을 위한 것인지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라디오 광고는 오롯이 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제품이나 광고문구 자체에 대한 집중도가 커지죠. 우리가 그걸 노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 회사 제품은 광고를 하지 않아도 잘 팔리긴 하지만, 사회적 공감대를 높인다는 측면에서....”
두 달 전 생각나무 회의실에서 민팀장이 열을 내며 말한 라디오 광고의 필요성이었다. 간결한 그림과 여백에 자신만의 문장으로 채운 프레젠테이션은 역시나 광고계에서 빛날만했다. 좌중이 자신의 얘기에 집중하자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최근 라디오는 감성을 자극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매체로 인정받고 있죠. 다른 영상매체와는 달리 편하게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거기에다 라디오 없이도 스마트폰에서 앱으로 다운받아 듣기 때문에 편의성도 최고죠. 종이신문이 사라져 가는 시점에 라디오가 빛을 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점에 주목해서 광고 매체를 선택해야 합니다. 최근 조사된 통계를 보면 다양한 연령층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개인에 맞는 맞춤형 상품을 홍보하기에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매체가 분명합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고팀장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네, 저도 주위에 보면 라디오 듣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저도 그렇구요. 유튜브 인기도 좋지만, 그거는 상대적으로 시각적 피로감이 크거든요. 하지만 라디오 방송국에서 만든 앱을 통해 듣는 라디오는 민팀장님 말씀대로 집중도가 좋은 거 같아요. 음악과 DJ의 멘트, 그리고 사이사이에 나오는 광고 문구에도 쉽게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은 확실합니다. 건강식품이나 가정에서 쓸 수 있는 생활용품 같은 제품들은 라디오에서 듣고 검색해서 구매하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고 있죠. 광고모델의 비싼 몸값이 반영 안 되어서 제품가격도 착하잖아요. 하하하.”
입이 무거운 김도윤 기획팀장도 옆자리의 개발팀장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개발팀장님이랑 우리 생각의 원천의 역량을 얘기하면서 개인 맞춤형 제품의 오픈 시기를 계속 조율하고 있었거든요. 최근 유행하고 있는 챗 GPT는 사실 우리 수준에서 보면 어린아이들 걸음마 수준이잖아요. 생각의 카테고리를 계속 세분화하고 이 범주의 결합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해야 맞춤형이나 개인설계형 주문이 가능하거든요. 사실 우리 생각나무에서는 안대표님과 더불어 외부 공개시기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맞춤형 개발 툴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장시킬 수는 없고 어느 정도 카테고리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우리는 사전조사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개인의 고민과 사회적 문제를 분석해서 333여 개의 조합이 가능하게끔 선택지를 만들었습니다. 개인고객이 원하는 황당한 요구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주문이 가능하게끔 시뮬레이션까지 마쳤습니다. 그리고 보완적으로 이 맞춤형 시스템에서 주문이 안 되는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별도로 개발팀에 의견을 제시하면 검토 후에 답을 주는 절차까지 개발을 마친 상태입니다.”
직원들의 열정적인 박수로 호응했다. 소리가 잦아지자 시스템 보안과 상품개발을 맡고 있는 배지형 개발팀장이 입을 열었다.
“방금 기획팀장님 말씀대로 맞춤형 시스템개발은 생각의 원천 덕이 큽니다. 지금 전 세계적인 빅테크 업체에서는 생성형 AI가 유행처럼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생각나무는 이미 한 템포 빠르게 발전하고 있죠. 여러분이 1년 이전에 봤던 생각의 원천이 지금 빅테크 업체들이 지향하는 모델입니다. 전문가인 프롬프트 엔지니어의 질문에 따라 뭐든지 답해주고 만들어주는 게 지금까지의 역할이었죠. 그렇지만 우리 맞춤형 시스템부터는 아닙니다. 그러면 그다음은 뭐냐 하시겠죠? 네, 생성형 AI가 인간과 AI가 상호작용하는 상호대화형 AI로 변화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생각의 원천은 가장 앞선 대화형 인공지능이 된 겁니다. 대화주체도 전문가인 프롬프트가 아닌 일반 개개인이 프롬프트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서 직관적으로 AI와 소통하게 됩니다. AI도 질문을 던지는 인간의 의도와 감정을 더 잘 이해하도록 능력이 향상되어 있죠. 이번에 런칭한 맞춤형 주문시스템의 근저에는 이런 대화형 시스템이 숨어있습니다. 너무 빠른 시스템 전환은 고객에게도 혼란을 줄 수 있어서 생각의 원천은 외형적으로는 생성형 AI처럼 보이게 했죠. 질문자가 던지는 몇 가지 단서만으로도 원하는 답이나 해결책을 얻을 수 있게끔 빠르게 진행될 겁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대표님과 개발팀의 지난 몇 개월 동안의 개발성과입니다.”
우와! 짝짝짝. 개발팀장의 얘기가 끝나자 모두 뜨겁게 박수를 쳤다. 생각나무의 업무는 느슨해 보이는 조직의 외형과는 달리 치밀한 구석이 있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분야의 독보적 실력자들이다 보니 가능한 차원이었다. 여러 번 반복된 회의가 필요 없을 만큼 사전 준비와 문제해결 역량이 충분했다.
기획팀에서는 라디오 광고 외에도 생각나무 홈페이지와 앱에 맞춤형 생각을 주문하라는 광고 메시지를 올렸다. 다수의 대중에게 필요한 프로그램과 소수의 개인들에게 필요한 테라피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만큼 생각나무 원천의 프로그래밍 능력과 AI 프롬프터의 명령 속도가 상품개발을 뒷받침을 할 수 있었다.
열정이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답게 다양한 요구가 쏟아졌다. 그중에 다소 황당한 주문들도 많았다. 재테크 천재로 만들어 달라, 수포자(수학포기자)를 포기하게 해 달라, 외톨이 탈출법을 알려 달라, 사회적 관계의 달인으로 만들어 달라, 청혼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 연애의 고수가 되게 해 달라. 주식 매수 타이밍을 알 수 있는 능력을 키워 달라. 자기 계발의 고수가 되게 해 달라... 는 주문 등이 그것이다. 엉뚱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대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았다. 사회적 트렌드에는 늘 누군가의 소망과 고통이 동시에 담겨있지 않았던가!
제안 게시판에서는 제안요청뿐만 아니라 각 제안에 대한 개인들의 선호표시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생각나무의 기준과 시각도 중요하지만 일반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평가도 의미 있기 때문이었다. ‘수포자를 포기하게 해 달라’는 주문에 많은 이들이 ‘♡(좋아요)’로 공감을 표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수학공부와 좌절에 대한 우려가 담겨있었다. 자기 계발에 관한 다양한 제안에도 수많은 ‘좋아요’가 따라붙었다. 무한 경쟁이 불러온 끊임없는 자기 계발에 대한 욕망이 계속 자라고 있었다.
맞춤형 주문은 앱을 통해 직접 주문제작으로 만들어지는 유형과 생각나무 기획팀의 검토를 통해 제품화할 수 있는 제안으로 나뉜다. 개인들의 맞춤형 주문은 333여 개의 선택지로 대부분 해결되었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큰 제안에 대해서는 별도의 선택기준이 필요했다.
생각나무에서는 수많은 제안요청에 대해 모두 답을 할 수도 없고 제품화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선택기준이 필요했다. 특히 기획팀의 검토가 필요한 사안은 더 엄격한 기준을 요했다.
첫째는 사회적 공헌도다. 최신 정보화기술을 활용한 생각의 원천은 사회적 산물로 영리 목적보다 공익에의 기여가 최우선이다. 다수의 공적 이익을 위한 제안은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
둘째는 선한 영향력이다. 생각나무 맞춤형 주문플랫폼이 개인의 단순한 호기심과 이기심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생각이 이타성에 기반을 두고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이로울 수 있는 전파력을 가져야 한다.
셋째는 사회적 약자의 요청 우선이다. 약자들을 위한 사회적 기반이 갈수록 약화되는 시대다. 국가나 정부기관이 정책화할 수 없는 영역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건강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맞춤형 주문시스템 구축은 처음부터 개념을 설계하고 각 모듈을 맵핑(mapping)하는 것은 방대한 작업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생각의 원천은 가장 원시적인 대화방식부터 추론적 사고까지 가능한 구동방식이기 때문에 연결 모듈만 제시해 주면 스스로 데이터를 구조화할 능력을 갖췄다. 생각나무의 빅데이터 분석과 딥러닝 능력은 현존하는 최고의 AI라 불리는 생각의 원천의 역량에서 나온다. 특히 오류가 있거나 오염된 정보의 추출을 막기 위해 끊임없는 교차검색기능으로 스스로의 신뢰성을 높이고 있다.
개발팀에서는 333개라는 한정된 범주 내에서 고객들이 원하는 맞춤형 생각의 씨앗을 주문할 수 있게끔 카테고리 작업만 수행하면 족했다. 때문에 개발팀은 기획팀과 상의해서 개인들이 선호하는 요구사항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각각의 주문 모듈로 구분하는 작업을 선행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을 상대로 만족과 불만에 대한 설문을 조사하고 이를 전문적으로 분석하여 일단은 333여 개의 맞춤형 시스템을 만들었다. 요구사항이 다양해질수록 추가적으로 보완할 예정이었다. 다만 맞춤형 주문은 생각나무가 만들어낸 기존의 제품과는 달리 개인화되고 경량화된 특징을 가진다. 보편적이고 종합적인 문제해결보다는 개인적인 문제해결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맞춤형 요구가 이미 개발된 제품에 부합할 때에는 바로 그쪽 상품으로 연결된다.
개발과정에서도 생각나무 가족들 사이에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개인 맞춤형 상품은 어쩌면 개인의 고민을 해결하는 부분이 강하잖아요. 혹시나 우리 제품 때문에 심리상담사 분들이나 신경정신과 닥터들이 수입이 줄지 않을까요? 헤헤헤.”
“이런 식으로 자꾸 고민이나 문제가 해결되다 보면 인간세상이 더 아름다워지고 살만해지지 않을까요? 그러다 보면 우리 회사 제품도 덜 팔리지 않을 수도 있겠는데요. 하하하”
“이런 제품이 인기를 끌다 보면 우리 제품을 모방해서 자신들이 만능해결사라고 칭하거나 어설픈 제품이라고 질투하는 세력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니까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게 기존의 관념인데.... 이런 시스템이 일상화되면 그 문장도 다른 걸로 변경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양화가 악화를 쫓아낸다... 히히히”
“한편으로 일반인에게 생각나무 시스템이 오픈되면 보안문제에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요새 해킹은 수법이 하도 다양해서.”
개인이 생각나무 앱에 접속해서 자신을 인증하고 나면 별도의 맞춤형 시스템의 창이 열린다. 기존의 제품을 탑재한 메인화면과 별도의 창에서 자신의 고민사항에 대한 해결책을 선택할 수 있다. 마인드맵 가지형태의 선택지는 개인의 고민사항을 입력하게 되면 관련 키워드가 나침반 역할을 하면서 시작된다. 고객이 보는 앱화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생각나무의 AI 챗봇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고객의 질문을 분석하고 적절한 응답을 해준다.
생각나무의 맞춤형 주문시스템이 오픈되자 봄날 벚꽃 피어나듯, 옥수수 알맹이가 팝콘으로 터지듯 주문이 밀려들었다. 충분한 서버 용량확보와 빈틈없는 사전 시뮬레이션 덕분에 고객들의 불만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에서도 생각나무 앱을 통해 고민을 해결했다는 사연들이 종종 흘러나왔다. 어느 눈치 빠른 작가는 ‘생각나무 따라 하기’라는 책을 출간해서 깜짝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작가는 생각나무 앱 초기단계부터 자신이 원하는 테라피를 다운받아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썼다. 알라딘과 예스 24 등의 온라인 서점 플랫폼에서 3주 차 인문사회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가볍게 10쇄를 넘어 장기 롱런의 기세를 보이고 있다. 작가는 생각나무에 자신의 친필사인 책 백 권을 증정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로울 수는 없는 법,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조용히 시작된 금요일 오전의 설렘은 속보로 무참히 깨졌다. 주요 외신과 연합뉴스는 속속 헤드라인으로 속보를 전했다.
다국적 해커들의 세계 주요 기업 및 국가기관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 발생...
러시아와 북한 시리아 등 다국적 해커라 불리는 이들의 전 세계적인 해킹공격으로 각국의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해커의 공격에 따른 피해상황 중 언론에 공개된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대외 신뢰도 때문에 쉬쉬하며 숨기는 기업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세계 각국의 인공지능 테크 기업들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 기업들의 주가가 20% 이상 급락했다. 서방의 어느 정보기관의 해외요원들 명단이 인터넷상에 떠돈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한국에서도 국방부와 대법원, 행정안전부와 보건복지부 등 다수의 공공기관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했다. 공격을 당하고도 피해상황을 모르는 기관까지 합하면 전방위적 공격임에 틀림없었다.
해커들의 공격으로 피해상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생각나무에서도 대책회의가 열렸다. 인공지능과 컴퓨터시스템 전문가들이라 문제점과 대책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우리 회사 피해상황은 어떤가요? CNN 보니까 미국 쪽 인공지능 회사들은 난리 났던데요. 공들인 프로젝트 전체가 날아간 회사도 있다고 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치밀하게 설계되고 광범위한 공격인데요... 예전과는 전혀 양상이 다른 거 같아요. 마치 최첨단 공장에서 만들어낸 제품처럼요....”
“아마도 그거는 해킹기술에도 인공지능이 개입한 까닭일 겁니다. 초기의 해커들과 2020년 이후의 해커들의 가장 큰 차이는 인공지능에서 온다고 봐야죠. 초기에는 직접 인간이 바이러스를 만들어 배포하거나 디도스 공격을 통해 서버를 마비시켰으나, AI가 만들어낸 공격무기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해커들의 AI는 공격대상 보안시스템의 취약점이나 허점을 찾아내어 거기에 최적화된 공격코드를 만들어 내고 있는 거죠.”
“제가 생각하기에도, 공격당한 대상 시스템의 보안망은 기존의 보안기술에 의해 설계된 것으로 아무래도 약점을 노린 치밀한 공격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죠. 뛰어난 성능의 생성형 AI가 만들어낸 해킹공격기술이 최신 보안망을 설계하지 못한 다수의 시스템에 큰 타격을 입힐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해킹도 문제지만 다크패턴을 이용한 사용자들의 선택권을 위협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AI가 인간의 감성이나 선택을 해킹하는 수준에서부터 인간을 속이는 방식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거짓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딥페이크이나 환각방식은 이제 한물간 수법이 될 겁니다. 더욱더 정교하게 만들어진 AI의 콘텐츠는 인간이 식별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에 이를 겁니다.”
“맞습니다. 이번에도 빅테크 기업이나 공공기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선택권 관련한 분야 쪽에도 피해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글로벌 기업들이 사용하는 마케팅 기법이나 공공기관의 프로그램 상당수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방식이어서... 아무래도...”
“문제는 갈수록 발전하는 해킹기술에 AI의 지능까지 합쳐지다 보니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의 접근도 가능하거든요. 기존의 링크수법이나 파일 다운방식은 이미 고전적 수법에 불과해서 어떤 형식을 띨지 우리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최근 고객게시판이나 외부에서 오는 평범한 파일에 보안망이 거르지 못하는 악성코드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크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 맞춤형 주문시스템처럼 고객들에게 오픈된 경우 그런 코드가 삽입된 요청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기획팀 서버에 저장될 수 있다는 얘기죠.”
“물론 우리 생각의 원천은 생성형 AI 중에서도 가장 앞서가는 시스템이라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도 나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작년부터 프롬프트 엔지니어들이 입체적인 해커들의 신종 공격방식에 대해서 생각의 원천이 필터링을 할 수 있도록 한발 빠른 조치를 취하고 있었죠. 그래서 이번에 다른 빅테크 업체들이 자신들의 첨단 보안망을 믿다가 피해를 입은 것과는 달리 아직까지 우리 회사는 안전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다각도로 시스템 보안유지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완벽한 시스템과 보안솔루션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빅테크 업체들을 비롯한 유명 정보산업기업들에 대한 해커들의 공격은 주효했다. 세계 각국의 공공기관과 기업들의 메인 서버를 파괴하거나 정보와 돈을 요구하고 흔적도 없이 유유히 사라졌다. 미국의 일부 업체는 인공지능 시스템 자체가 일부 파괴되어 복구하기 힘들다는 보도까지 이어졌다. 새로운 기법을 사용한 해커들은 기존의 해커들처럼 경로를 다양하게 이동할 필요성도 적어졌다. IP를 추적할 수 없게끔 AI가 공격용 루트를 만들어 대상에 접근한 까닭이었다. 정보기관과 수사기관의 추적 기술로는 그들의 디지털 흔적을 찾기조차 힘들었다. 외부 기업의 기술력을 차용해서 사용한 공공조직의 한계가 이번기회에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동생 니채가 안대표에게 연락한 것은 며칠 뒤였다. 언론에서 국가정보원 서버가 공격받았다는 보도가 나간 지 이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안대표는 오래간만에 동생에게 안부를 물었다.
“후훗... 요새 정신없이 바빴겠네. 어떻게 사후처리는 잘 되었고?”
“허허허. 국가보안문제라 많은 걸 얘기할 수는 없지만, 여기도 난리도 아니었어. 그동안 철통보안시스템에 막대한 예산을 지불했는데도 막상 당하고 나니까 우리 한계가 느껴지더라고. 형네 회사는 피해는 없고?”
“음... 아직까지는 그런 거 같기는 해. 최근에 맞춤형 시스템을 오픈하면서 보안시스템이 약산 허술해진 시기도 있어서, 다시 보안팀에서 면밀히 살펴보고 있거든. 해커들이 지나간 디지털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어서, 그게 이번 상황인지 아니면 그전부터 존재한 건지를 조사하고 있거든. 그런데 날이 갈수록 해커들의 공격력이 높아지는 거는 아닌가 모르겠다. 워낙에 AI 능력이 신출귀몰한 게 많아서 말이야...”
“그러니까 형 얘기대로 인공지능을 통해서 만들어낸 해킹 능력은 기존의 인식과 기술기반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패턴이 존재하는 거 같아. 우리처럼 준비가 잘되어 있는 기관도 약간의 피해를 입었는데... 아마 듣기로는 여러 정보기관이 낭패를 당한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이번에 보안망 기반을 AI시스템에 맞추려는 계획을 추진 중이야... 국회에 추가경정예산 편성 요구도 전달했고. 예산이 확보되면 미국 측 빅테크 업체나 형네 회사에도 연락을 취해볼 예정이거든. 어디까지나 친소관계를 떠나 공식적으로...”
안대표는 누가 들을까 싶어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번 해커들은 추적이 가능할까? 너희는 어느 정도는 조직이나 루트는 파악하고 있잖아.”
“형, 그게 문제더라고. 요번에는 양상이 이상해. 이번 공격이 블랙해커인지 아니면 화이트 해커인지 아닌지 여부도 불분명하고 동선 파악이 거의 안 되고 있어. 그들의 소재도 애매해서, 늘 표현은 러시아나 북한을 들먹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파악이 안 되는 경우가 많지. 이번 사건도 진짜 블랙이라면 완전 쑥대밭을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러지 않았거든. 이번에는 정체도 불분명한 것은 물론이고 종적을 찾을 수가 없더라고. 우리 기술자들 말로는 그쪽과 비슷한 능력을 가져야 꼬리라도 잡을 수 있다고 하는데... 하하하.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당연한 거지. 바둑 9단의 행마나 포석을 오목만 두는 사람들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과 같지 않을까? 내 생각에도 나쁜 의도를 가진 블랙해커들의 소행은 아닌 거 같기는 해. 아니면.... 이론적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AI의 소행일 수도 있고....”
“어! 그러니까 형 생각에는 AI가 벌써 그런 정도의 사고능력까지 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건가?”
“그렇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 중 하나지. AI가 인간의 명령에 충실한 인공지능이라면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범용인공지능)는 인간의 지능이나 사고능력과 동일하거나 더 뛰어난 수준의 AI거든. 대부분의 빅테크 업체가 추구하는 수준이 그 정도를 예상하고 있고... 지금도 AI 기능이 매년 10배씩 향상되고 있잖아. 그러니까 조만간 그런 수준이 일반화될 수밖에 없어. 벌써 그런 능력을 갖춘 AI들이 존재할 가능성도 높고... 앞서가는 업체들은 서로가 감추는 것도 많잖아. 우리도 이번에 생각의 원천을 상호대화형 AI로 업그레이드시켰거든.”
“허허허. 대단한데, 생각의 원천.... 그런데, 그 정도 수준이라면 인간을 상대로 장난도 칠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꼭 나쁜 의도가 아니라 경고나 예방적 차원에서라도.... 음, 인간의 의도가 아닌 AI의 시스템적 사고의 폭발력은 이제는 예상 밖일 수도 있잖아.”
안대표는 동생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말했다. 형제는 조만간 저녁을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하고는 통화를 끝냈다. 안대표가 창밖을 바라보니 붉은 노을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선정릉 공원 위로 까치 몇 마리가 시끄럽게 떠돌고 있었다. 저녁 해질 무렵이면 자주 보이는 소란이었다. 오래된 소나무 숲길 사이로 사람들이 한가롭게 오가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바로 앞쪽 숲길이 끝나는 길목에 손을 잡은 남녀가 보였다. 갑자기 허기와 갈증이 밀려왔다.
‘아! 배고픈데 누구랑 저녁을 먹지’
안대표는 목이 말랐다. 시원스레 흘러내리는 맥주 거품이 저녁노을 위로 겹쳐졌다. 친구들의 전화번호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사라졌다. 맥주파, 소주파, 양주파, 무당파... 이미 시간은 5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다들 약속이 있겠지! 가정이 있는 친구, 아이들이 기다리는 친구, 일이 바쁜 친구, 연락이 잘 안 되는 친구들까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미리 정하지 않는 번개약속은 쉽지 않았다.
노을은 농밀하게 익어가고 공원 숲 속에는 어둠이 조금씩 자리 잡고 있었다. 최팀장은 어머니 병원에, 민팀장은 부서 회식에, 김팀장은 아이들에게로, 배팀장은 휴가였던가! 그러면, 고팀장은 저녁에 뭐 할까? 공사다망한 스타일이라 역시나 바쁘겠지. 결국 혼술인가! 안대표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빼꼼 내민 이는 고민정 팀장이었다.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대표님, 저녁 약속 있으세요? 음.... 없으시면 맥주 한잔 하실까요?”
안대표는 마치 환청을 들은 듯 두 눈을 깜박였다. 마음속으로 이 순간에 유일하게 함께 했으면 바라던 사람이 눈앞에 있는 까닭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가로젓다가 다시 앞으로 격하게 끄덕였다. 두 가지 질문에 빠르게 답변을 한 것이다. 가장 처음에 떠올랐지만 애써 외면했던 얼굴. 당혹스러운 감정이 노을 속에 묻히길 바랐지만 노을이 성큼 안대표의 방으로 들어왔다. 안대표의 홍당무 같은 얼굴에 고팀장은 짓궂게 웃기만 했다. 팔짱을 낀 고팀장의 눈빛은 안대표에게 어서 서두르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까치 서너 마리가 서로 짝을 찾고 있는지 저녁놀 사이로 어지러웠다.
두 사람은 소시지와 감자튀김이 맛있다고 소문난 생맥주 집에 자리를 잡았다. 얼음 맥주 두 잔과 모둠감자튀김을 시켜놓고 나니 창밖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실내의 조명이 더 차분해지고 환해졌다. 다양한 모양새의 감자튀김과 황금색 맥주 두 잔. 흘러내릴 듯한 차가운 거품이 식욕을 돋게 했다. 귀에 촥 감기는 올드팝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I.O.U가 먼저 흘러나오고 Try to remember가 뒤따랐다. 안대표는 최근 어지러운 사건을 고민하다 고팀장과 맥주를 마주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감미로운 음악과 분위기 있는 조명까지 더하니 거칠어진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크림거품과 끊임없이 떠오르는 작은 기포는 멍 때기리기에도 좋았다.
“대표님, 요새 세상 돌아가는 게 어지럽죠?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사람들의 삶은 더 팍팍해지는 거 아닌가 몰라요...”
“그러게요. 컴퓨터나 기술발전이 인간의 편리성 증대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정신적인 부분에 미치는 영향은 별로인 거 같기는 해요. 문명의 이기라고 불리는 것도 그 단면이죠. 도구 때문에 인간이 힘들어지는 아이러니. 헛헛. 그런데 고팀장님, 부모님께서 떡집 하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헤헤헤. 그럼요. 지금도 잘하시고 계세요. 저희 오빠도 합세해서 함께 하거든요. 저희 오빠는... 의대 다니다가 그만두고 가업을 잇겠다고 난리 쳐서... 잠깐 진통이 있었지만, 지금은 가게가 상당히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아니 그런 사연이 있었네요. 다들 의대 갈려고 난리도 아닌데... 가족들이 많이 아쉬워하지는 않았나요? 저 건너편 대치동 보세요. 의대 갈려고 아이들 학원 때문에 이사 온 집이 한두 집이 아니잖아요.”
“키키키... 그러긴 하지만. 처음에는 오빠가 떡집에 관심을 갖고 학교를 그만둔다 하니까 부모님이 반대가 심했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요... 그런데 오빠가 기획서를 만들어 엄마 아빠를 설득했거든요. 오빠는 오래전부터 젊은 사람들이 떡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저한테도 늘 얘기했었죠. 지금 상호인 삼대청년떡집도 오빠가 합류하면서 변경했거든요.... 떡 만드는 방식과 기계도 부모님의 전통방식에 현대적인 것을 잘 믹스해서 개량하고 만들다 보니... 후훗 그 뒤는 아실 걸요?”
“아! 그 유명한 삼대청년떡집이 고팀장님네 집이라고요. 줄 서지 않고는 먹을 수 없다고 소문난... 저도 치즈크림떡과 팥앙금떡은 늘 냉동고에 쟁여놓고 먹고 있잖아요. 그런 떡 종류도 오빠가 만들었나요?”
“후후후, 그랬답니다. 오빠는 의대 본과 2학년 다니다가 떡 만든 지 7년 됐는데... 지금이 엄청 행복하데요. 자신의 창의력을 100%로 발휘할 수 있다고요. 맛도 있고 건강에도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만족감도 크고요. 덕분에 연애했던 올케언니랑 빨리 결혼해서 토끼 같은 아들딸 낳고 잘살고 있잖아요....”
연애, 아들딸이란 단어가 안대표의 가슴을 콕 찔렀다.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일었다. 쫑알쫑알 자신의 집안 얘기와 오빠와 떡집 스토리를 얘기하는 긴 생머리의 여성을 유심히 쳐다봤다. 옆 테이블에서 맥주잔을 부딪치며 브라보를 외쳤다. 따뜻하고 정겨운 분위기. 떡집을 하면서 남매를 건강하게 키워낸 부모들이 궁금해졌다. 의사와 떡집 사장이라... 뭐가 더 나을까? 인생은 모름지기 선택의 문제가 아니던가! 혼인 적령기를 넘어가고 있는 안대표의 얼굴에 잔잔하게 미소가 번져갔다.
“그리고 대표님, 저 있잖아요. 그거 아세요. 제가 특성화 고등학교 졸업한 거....”
안대표는 깜짝 놀란듯한 표정으로 고팀장의 문장을 살폈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인 고팀장에게 무슨 사연이 있단 말인가.... 하는 눈빛이었다. 고팀장은 입가에 묻은 맥주거품을 슬며시 닦아내며 차분하게 자신의 인생경로를 말했다. 안대표는 고팀장이 내뱉는 문장 하나 단어 하나조차 흘리지 않았다. 초롱초롱 빛나는 고민정의 눈빛과 목소리 톤에 서서히 집중했다. 극지방의 백야처럼 밝은 서울 도심의 밤하늘에도 별이 이토록 빛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어머, 놀라셨어요? 저희 오빠 이야기 듣고 놀라시고, 제 얘기까지 듣고 놀라시면 안 되는데. 하하하... 저도 어릴 적부터 부모님 떡집 하시면서 고생하는 거 보면서 자랐잖아요. 그래서 공부나 성적과는 별개로 일찍 돈을 벌어서 부모님이 덜 힘드시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음... 그래서 부모님 반대에도 불구하고 특성화고에 진학을 했거든요. 다행히 성적이 좋아서 스카이 나와도 쉽게 못 간다는 한국은행에 입사하게 됐죠. 거기에서 야간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이 생겼죠. 마침 같은 팀에 변호사 한분이 계셔서 법조계 관련해서 이런저런 얘기까지 들었죠. 그러고 보니 정말 우연과 우연이 겹친 거 같아요. 그런 이유로 로스쿨에 진학하게 되었고, 다행히 성적이 좋아서 대형로펌에 들어가게 된 거죠.”
“히히히. 엄청나기는요. 그런 과정 때문에 부모님도 약간 불안해하시긴 했었지만,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했죠... 그런데 로펌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엄청 열심히 일하고 약간 보람도 있었거든요. 연봉도 꽤나 만족할 만큼 받고요. 그런데 그 생활을 몇 년 하다 보니 뭔가 털리고 비어 가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돈과 소중한 내 자신을 바꾼다고나 할까요. 어떤 분들에게는 배부른 소리도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그랬거든요. 로펌에서 송무사건이나 컨설팅 업무들이 창의적인 부분은 거의 없거든요.”
“음... TV나 영화에서 보면 변호사들이 꽤나 멋있게 그려지기도 하잖아요. 뭔가 새로운 역사나 쓰거나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게 현실 속 변호사들의 모습이 아니었군요!”
“그렇죠. 변호사란 라이선스를 가지고 하는 정형적이고 틀에 박힌 업무의 연속이었죠. 일주일에 6일 일하고 매일 야근하면서도 잘 버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저는 숨이 막힌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죠. 어느 날 밤 지하철을 타고 밤늦게 집으로 오는 길에 한강을 건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예요. 한강 주변의 센티한 야경 때문인지 아니면 몇 잔 마신 술 때문인지 몰라도 창밖을 보면서 흑흑거리면서 결심을 했죠. 뭔가 다른 일을 해보자.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해보자. 내일 아침에도 이 생각이 남아 있으면 그때는 바로 그만 두자.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만 일상의 권태가 반드시 어떤 심경의 변화를 꾀할 모티브를 주지는 안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그조차도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리니까요. 우리 대부분이 그렇죠... 혹시나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히히히... 대표님은 눈치도 빠르세요. 하기야 삼십 대 초반에 느끼는 매너리즘이 뭐 얼마나 크겠어요.... 사실 몇 개의 사건을 의뢰받아 처리하면서 저 자신의 내면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는 게 더 옳은 표현 같아요. 어느 재벌가 3세가 연예인 관련 성범죄를 저질러서 우리 쪽 로펌에서 이 사건을 맡아서 진행했거든요. 그 철부지 때문에 대표 변호사나 파트너 변호사가 쩔쩔매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든지 빼내야 한다고요. 돈으로 검사나 판사를 매수하든 피해자와 협상해서 고소를 취하하든... 근데 이게 쉽지 않았거든요.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다양한 인맥과 별 희한한 방법까지 동원해서 일을 잘 마무리 짓기도 하는데... 저는 그럴 수 없었거든요.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절대로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고, 더 나쁜 짓이라고 판단했거든요. 이런 가당찮은 일을 하려고 어렵게 로스쿨을 가고 변호사를 열망했다는 게 근본적으로 회의를 느꼈거든요. 좀 지나고 나면 상처가 아무는 것처럼 괜찮을 거 같았는데..."
고민정 팀장은 목이 메는지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때 주변에서 여러 사람이 조언도 하고 위로도 했던 거 같은데.... 저는 그게 잘 안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아까처럼 한강을 넘어오는데.... 세상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거 있죠. 꼭 그렇게 원치 않는 곳에서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이었어요. 그걸 깨닫는 순간 어찌나 눈물이 흐르는지. 소리만 안 냈지. 엉엉엉 대성통곡했거든요. 옆에 있던 사람들이 막 쳐다보고 도와주려고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이게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된 진실이랍니다. 히히히. 아! 근데 이걸 말하니까 또 눈물이 나오네요... 음음. 하하하.”
여기까지 말하던 고팀장이 뭔가를 참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안대표는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숙이고 있더니 돌연 눈가를 매만지며 조명을 쳐다봤다. 말갛게 물기 어린 눈동자와 이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불빛과 음악 사이에서 만났다. 안대표는 무슨 행동인가를 해야 하는데 생각을 하면서도 손수건조차 건네지 못했다. 대신 보일락 말락 미소를 띠면서 맥주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부딪치는 술잔과 더불어 다시 두 개의 눈빛이 마주했다. 안대표의 목으로 넘어가는 것은 맥주가 아니었다. 몽글몽글한 뭉클함이 가슴에 스며들고 있었다. 맥주는 차가웠지만 스며드는 것은 따뜻한 온기였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둘 사이에 놓였다. 창밖 거리에서 누군가 산울림 김창완의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술에 취한 듯했지만 정감 있는 목소리였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내 청춘 피고 또 피는 꽃잎처럼....’ 안대표가 어색한 분위기를 떨치기 위해 말했다.
“저 행인이 노래를 꽤나 잘 부르시는데요. 이 밤 분위기에도 어울리고요. 허허허. 저도 청춘 저 노래 디게 좋아하는데... 4절까지 부를 수 있거든요. 그래서 결심한 바로 그다음 날 로펌을 그만뒀나요?”
“흐음... 그랬죠. 웃기는 게 뭔지 아세요? 아침에 일어나서 처음 든 생각이 전날 밤 마지막 결심이었거든요. 그래서 오전에 바로 나가서 사표를 내버렸죠. 그러다가 어느 카페에 앉아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정말 우연히 생각나무 채용 공고를 보게 됐잖아요. 너무나 우연히도.... 근데 이제는 필연이라고 불러야 할까 봐요!”
“오 필연이라. 좋은 표현인데요. 고팀장님은 우리 회사 어떤 점이 맘에 들었나요?”
“헤헷, 당연히 연봉이죠. 하하하. 농담이고요. 채용공고 첫 문장이 그거였잖아요. 생각을 파는 회사에서 여러분의 생각과 꿈을 삽니다. 필이 딱 꽂히는 그런 카피였어요. 그리고 대표님이 면접 때 그러셨잖아요. 우리 회사는 텅 빈 우주 같은 회사다. 여러분들이 꿈꾸는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저는 그 멘트가 너무 맘에 들었거든요. 정말 너무 멋진 문장이었어요. 지금까지 기억할 정도로...”
“아니 제가 그런 닭살 돋는 얘기도 했었나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그때 고팀장님의 생머리가 참 윤기 나고 길다는 생각은 나는데... 헤헤헤.”
“정말요. 그때 그런 생각을 하셨다구요. 참나 여유로운 면접관이자 CEO이시네요. 하하하.”
맥주잔이 두 잔에서 세잔으로 늘어나면서 안주로 독일식 모둠 소시지와 부추김치를 추가했다. 짭조름한 소시지 한 조각에 젓갈향 가득한 부추김치를 척 걸쳐 먹는 것은 최고의 안주였다. 꿀꺽꿀꺽 넘어가는 황금색 액체에 두 사람의 수다도 꿀물처럼 달게 흘러갔다. 건너편의 어둑해진 왕릉 위로 조그마한 초승달이 슬며시 떠오르고 있었다. 창문 밖 어둠 속에서 푸드덕푸드덕 새가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능 속의 주인공들은 과거의 시간 속에 어떤 사연을 남기고 살아갔을까? 수많은 인간들의 사연이 역사라는 시간에 묻히듯 공원 또한 필연적인 어둠에 묻혔다. 두 사람 사이에 쌓이는 것이 술잔만이 아니었다. 연극의 암전처럼 침묵이 공간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