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무 구내카페 생각의 숲, 나른한 오후 3시. 앞쪽이 훤히 트인 카페에는 따뜻한 햇볕 여러 자락이 손님으로 앉아있다. 창가의 라벤더 화분과 제라늄 화분에서 은은한 향이 고루 퍼지고 있었다. 레몬, 생강, 초콜릿향이 서로 섞여있다. 심신을 편하게 해주는 선율의 클래식 음악이 카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서미연 과장과 고민정 팀장이 카페 한쪽에서 수다삼매경에 빠졌다. 두 사람은 생강라떼와 홍차를 사이에 두고서 연애와 스토킹에 관한 대화를 했다. 서과장이 고개까지 좌우로 흔들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했다.
“남녀 간 연애도 서로 감정상 합의에 의한 거잖아요. 시작과 끝이 있는. 한쪽이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게 원칙인데.... 최근에 뉴스에 보도된 사건들을 보면 도대체 이해가 안 가네요.”
“그렇죠. 그 사건들을 보면, 결별을 선언한 상대방이 맘에 안 든다고 해코지를 하지 않나. 가족들한테까지도 폭언을 행사하질 않나. 낭만적 연애의 끝은 역시나 애틋한 낭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파국으로 진행되는 것은 끔찍하죠.”
“팀장님, 낭만적 연애. 멋진 표현인데요. 실제로 슬픈 이별도 있고, 아름다운 이별도 있고, 쿨한 이별도 많잖아요. 최근에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건을 보면 비극적 이별이긴 한데, 그것은 범죄잖아요. 어떻게 자신이 싫다는 사람한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참 그러네요.”
고민정 팀장도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제가 로펌에 있을 때 보면 이런 사건들 몇 개를 본 게 있어요. 계속 쫓아다니면서 연애감정도 강요하기도 하고, 연애하다가 끝났을 때 인정을 못하겠다고 이별을 거부하는 사건들. 그런 사건들 분석하다 보면 가해자는 남녀 불문하고 공감능력이 떨어진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생각해 보면, 그런 유형의 캐릭터들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 문제를 일으킨 사건들이죠.”
서미연 과장이 눈을 크게 뜨며 맞장구를 쳤다.
“네, 그러니까요. 이런저런 사건들 듣다 보면 우리 사회가 갈수록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거 같아요. 너무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살다 보니 그러는 건지, 아니면 우리의 인간적 본성이 변해서 그러는 건지 아무튼... 타인의 고통이나 상처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하고 2차적으로 피해를 주는 경우도 많잖아요.”
“음... 그렇죠. 우리 사회에 최근 있었던 사회적 비극에서 피해자들이나 유가족들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보면 분명 그런 것 같아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죠.”
때마침 카페를 찾았던 최지민 팀장이 자리에 합석했다. 손에는 잣과 대추가 동동 떠있는 쌍화차를 들고 있었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최팀장의 선택이었다.
“하하하. 두 분이서 무얼 그리 열심히 대화중이신가요? 졸린 오후시간에 무슨 즐거운 이야깃거리라도...”
고팀장과 서과장이 최팀장을 반갑게 맞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엄마 같은 최팀장님. 어제는 큰아이 중학교에 다녀오신다고 하셨잖아요.”
“아, 학교에서 위원회가 있어서... 최근에 우리 애 학교에서 폭력 사건이 있어서 거기에 대한 의견수렴과 대응 때문에 학부모 대표로 참석해서 갔다 왔거든요.”
학교폭력 사건을 담당한 경험이 있는 고팀장이 관심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팀장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사건은 전형적인 약한 아이 왕따 사건과 학교폭력이 겹친 사안이더라고요. 성인들 못지않게 아이들도 비겁하고 영악해요. 약한 아이한테 너무 일방적인 폭행사건이어서 더 화나고 짜증도 나요.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친구를 괴롭히고 악할 수가 있나 할 정도로 행동이 과격해요. 가해자인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도 평범하고 착한 아이들이라고 말은 하는데... 사건경과를 보면 부모들의 편향적 뇌피셜에 불과한 게 많아요.”
서과장도 최팀장의 불편한 얘기에 공감한다면서 눈을 맞췄다.
“사실 저랑 고팀장님이랑 공감능력에 대해서 얘기 나누고 있었거든요. 최팀장님 말씀 들으니까 이런 사건들 보면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공감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도처에 많이 있긴 해요. 각박한 세상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게 사람들 문젠데...”
학교폭력 얘기를 꺼냈던 최팀장도 서과장의 얘기에 긍정의 한마디를 보탰다.
“그렇긴 해요. 요새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공감능력이 큰 문제로 부각되는 거 같아요. 특히나 사회적 불행한 사태에 대해서 사람들이 보내는 비인간적 행동의 비정함에서 극에 달하죠. 일단 내문제가 아니면 비난이나 조롱하고 보는 익명성이 한몫하는 거 같긴 해요. 우리 사회가 공동체 문화가 붕괴되고 있다는 단적인 결과가 공감능력 부족이나 타인의 사정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것은 확실해요.”
홍차를 마시던 고팀장이 눈을 반짝이며 최팀장의 말을 이어받았다.
“제가 로펌에 있을 때 유명한 사립고에서 학교폭력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게요... 사건을 파고 들어가다 보니 학생들도 문제였지만, 그 학생들의 부모가 더 문제인 경우가 많았어요. 정부 고위관료라는 사람은 뻔뻔하기 그지없었고, 대형로펌의 대표변호사라는 인간은 저런 사람들이 누구를 변호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자기 자식만 옹호하는 걸 봤거든요. 자기들끼리 짜고 친한 기자들에게 엉뚱한 방식으로 흘리기도 하구요. 오히려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쌍방폭행으로 몰고 피해자 부모들을 조롱하는 걸 보고는 인면수심이라는 단어의 실체를 확인했답니다. 참으로 나쁜 인간들이라서 말도 꺼내기 싫지만, 그런 인간들이 TV에서나 언론에 사회적 리더나 인물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모습을 보면 할 말이 없죠. 세상이 원래 이런 더럽고 치사한 건가 싶어요.... 정말 이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화가 나더라고요.”
실내 음악이 어느 순간 조용한 클래식에서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연주음악으로 바뀌었다. 애처로운 선율이 공간을 휘감으며 찻잔 속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바이올린이 쏘아 올린 울림이 세 사람의 눈빛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있는 최지민 팀장의 머릿속에서는 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의 노랫소리가 화음으로 들렸다. 공명과 공감이 가져다주는 화학적 결과였다.
생각나무의 게시판에 올린 제안 중에서 의미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기획팀에서 사전 검토 후 제안서로 만들어져 개발팀에 제품화 의뢰 절차로 이어진다. 간혹 법률적 검토가 필요한 제안에 대해서는 법무팀에 먼저 전달되어 제품화 이전에 문제 될 수 있는 법률적 쟁점에 대한 검토를 마친다. 이번 어느 80대 사업가의 제안편지가 그랬다.
건강 제품 회사의 회장님으로 꽤나 유명한 이분이 생각나무에 장문의 사연을 보내온 것이다. 당신이 구술하고 손자가 문서로 만들어 보내온 제안요청서에는 후회와 반성과 바람이 들어있었다. 법무팀에서는 막내가 먼저 살펴본 후 고팀장에게 보고했다. 고팀장이 듣기로는 독지가 회장님이 공감능력에 관한 테라피 제작을 조건으로 고액의 사례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고팀장은 나름 생각을 정리한 후 팀장급 회의를 제안했다.
제안 편지글 : 공감능력을 주문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생각나무 대표님 그리고 담당자님.
저는 조그마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80대 사업가입니다. 평생을 일만 하다가 이제야 저를 뒤돌아보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건강이 안 좋아지고 죽을 날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후회가 많습니다.
어릴 적에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맏이로 태어나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배운 게 없어서 서울로 상경해서 막노동판과 구로공단에서 막일을 했습니다. 우연히 청계천 상가 쪽에서 장사를 배우게 돼서 사업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남대문에서 수입상품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면서 더 큰 사업에 발을 들이게 되었답니다. 결국 지금은 건강보조식품 사업을 해서 작은 명성이나마 얻고 살고 있습니다.
제가 귀사에 편지를 드리게 된 이유는 제가 인생을 잘못 살았지 않았을까 하는 반성과 후회 때문입니다. 그 계기는... 최근 어느 뉴스에서 사회적으로 고통을 당한 사람들 앞에서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모욕과 조롱을 일삼던 어떤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부터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자기 부모나 자식의 문제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요...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 제가 사업하며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떠올랐습니다. 저 역시도 누군가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짓밟으며 살아왔다는 걸 느꼈습니다. 누군가의 패륜을 보면서 제 자신의 과오가 컸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대문에서 장사하던 시절부터 지금 20층 빌딩을 소유한 기업의 회장이 되기까지 많은 분들에게 모질게 대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했던 행동들이 누군가에게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된다는 걸 몰랐습니다. 이제야 반성합니다. 저는 잘못 살았습니다.
그래서 최근 변호사가 된 큰 손주를 불러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나무 주식회사에 제안 하나를 하고 싶습니다. 저 자신은 물론 우리 사회에 공감능력이 너무 부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감능력을 키울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서 이들에게 나눠줘서 타인과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대신 저는 그 대가로 생각나무에 제품 연구 및 개발, 배포 등에 필요한 비용 30억 원을 지불할 생각입니다. 모든 절차와 방법은 생각나무 주식회사에 일임하겠습니다. 편지글 읽어보시고 연락 주시면 제 손주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부디 이 늙은 사람의 참회와 반성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기력토탈케어 주식회사 대표 정해조 배상.
4층 회의실에 한동안 정적이 떠돌았다. 모두들 기획팀에서 올린 편지글을 읽고 있는 까닭이었다. 잠시 동안 뜸을 들이고 나서 고민정 팀장이 말문을 열었다.
“네, 지금 읽어보신 내용이 기력토탈케어 정해조 회장님이 우리 생각나무에 보내온 편지입니다. 회장님은 현재 83세로 손자 분께서 대필하셨다고 하나 그분의 의사가 분명한 걸로 보입니다. 제가 기력토탈케어에 대해 알아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 화면을 보시죠....”
고팀장은 기력토탈케어 주식회사의 현황을 화면에 띄우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화면의 여러 수치들을 보시다시피 건강보조식품 업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 나가는 회사입니다. 설립연도는 1987년. 매출액은 작년 말 현재 9천300억 원에 달하고, 올해는 1조 원을 목표로 하고 있는 지속 성장 기업입니다. 주력제품은 건강보조식품에서 비타민까지 다양합니다. 외형은 중소기업처럼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대기업에 가깝습니다. 전국적인 지사와 영업망이 갖춰져 있고, 청정구역에 설치된 4곳의 생산시설 대부분이 자동화 시스템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본사는 서울 강동구에 위치하고 20층 본사 건물에 별도의 연구소 시설까지 딸려있습니다. 이 회사는 다른 사업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건강 관련 제품들에만 주력하다 보니 지금의 명성을 얻은 것 같습니다.”
고팀장이 말을 끝내자 안대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 회사 제품을 저도 몇 개를 먹고 있거든요. 저희 부모님께서도 액기스를 애용하고 있구요.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나요? TV광고에 저 회장님이 직접 출연하시기도 하고 건강 전도사로 꽤나 유명한 분이잖아요. 운동 마니아에 맨발 걷기 전도사에...”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지민 팀장은 뭔가 생각난 듯 쾌활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네요. 기력토탈케어. 이 회사 제품은 저희 집도 흑마늘즙하고 석류즙, 그리고 부모님들 흑염소진액하고 기력보강 식품 여러 개를 이용하고 있는데요. 광고도 엄청 웃기게 멘트가 나와서 기억할 수밖에 없잖아요. 애들은 가라, 아는 사람만 안다 뭐 이런 얘기를 하시면서 스탠딩 개그 같은 장면을 연출하잖아요.”
과묵한 아이디어 뱅크 김도윤 기획팀장도 씩 웃으며 한마디를 거들었다.
“아! 소문에 듣기에는 이 회사 명의인지 회장님 명의인지 몰라도 기부도 많이 한다고 하던데요. 고향에 고등학교도 세우고 장학재단도 운영하고요. 이분은 언론에 자주 노출되어서 그런지 낯설지가 않네요. 헛헛헛.”
끼 많고 저돌적인 배지형 팀장도 부모님이 그 회사 건강즙을 좋아한다면서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런데, 그 회사 회장님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신다면서 30억이나 내놓는다는 게 느낌이 잘 안 오는데요. 30억이면 보통 재벌들도 쉽게 내놓지 못하는 금액인데요. 우리 회사 개발비용은 대외비라 쉽게 추산하기 쉽지 않은데... 그래도 부담스러운 거액이네요. 제 생각에는 여기서 우리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먼저 논의해야 되지 않을까요?”
팔짱을 끼고 팀장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안대표가 배팀장의 얘기를 듣고는 정리하는 차원에서 발언권을 가져갔다.
“아마도 최근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뉴스거리 때문에 속상해하시면서 매정했던 당신의 지난날을 돌아보시지 않았을까 싶네요. 소시오패스에 의한 사회적 범죄나 조직에서의 갑질 문제, 학교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 등은 그 근저에 공감능력 결여가 들어 있잖아요. 타인의 사정을 돌아보지 못하는 불행한 사건들이 뉴스를 도배한 지가 꽤나 되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런 흉악한 범죄가 일어나다 보니 끔찍하기도 하면서도 우리가 반성해야 할 점이 무엇인가 돌아보게 되는 거죠. 특히나 큰 불행을 견디고 있는 참사 유가족들 앞에서 패륜적 행위를 하는 이들을 보고 이런 편지까지 보내신 걸 보면 우리 회사 측에서도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자신이 예상했던 결론으로 회의가 진행되는 걸 보고는 고팀장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은 개발 껀에 대해서는 기획팀장님과 개발팀장이 협의해서 하실 일이고, 저희 법무팀은 계약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검토하고 정회장님이 방문하실 때 자세한 사항을 논의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법무팀에서 정회장님 손자분께 연락해서 방문일정을 조율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법무팀에서는 정회장의 손자인 정찬형 변호사와 연락을 취해 일정을 상의했다. 대략적인 계약조건에 대해서는 미리 상호 검토를 한 후 방문 날에는 계약서에 대한 최종 승인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고팀장은 안대표 최지민 팀장 등과 여러 번 만나 계약서 초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안대표는 조심스럽게 계약의 대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30억이라는 금액의 정도가 아니라 그 용처를 고민해 봐야 되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 회사 입장에서야 수입이 늘면 좋기는 하지만, 현재도 충분하게 실적이 좋아서... 굳이 회사매출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정회장님 측에서 이렇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제안에다 과할 정도의 대가까지 지불하신다고 하니 황송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좋은 의미에 더 바람직한 화답을 하는 것이 어떨까요? 팀장님들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생각나무의 살림꾼인 최지민 팀장이 안대표의 내심을 이해한다는 듯 공을 넘겨받았다.
“음... 저도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30억이라는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좀 더 뜻있는 곳에 우리 제품을 활용하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표님 말씀대로 우리가 그 돈을 받을게 아니라 공감능력이 필요한 곳에 쓰일 수 있도록 용처를 달리 정하면 어떨까요? 대가도 그쪽에 지불하도록 하구요.”
그때 고팀장의 머릿속에서 제3자를 위한 계약의 법리가 스쳐 지나갔다. 30억이라는 돈을 사회적으로 의미 있게 쓸 수 있는 단체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문득 재단법인 공감과 실천시민연대가, 활짝 웃는 소현희 변호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죠. 제가 방금 여러 가지 생각이 났는데요. 최근에 보니까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시민사회단체가 많습니다. 그중에서 재단법인 공감하고 실천시민연대가 실제로 이런 취지에 맞는 실천방안에 적합한 단체가 아닐까 싶네요? 우리가 제품을 만들어내고 제품의 배포, 자금운용과 제반 활동에 대해서는 그 두 단체에서 적절히 알아서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안대표와 최팀장은 고팀장의 기발한 생각에 물개 박수로 환영했다. 최팀장은 책상에 손을 두드려가며 좋은 방법이라고 칭찬했다. 안대표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아! 고팀장님 의견이 아주 좋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는 전문성도 경험도 없다 보니 어려울 게 뻔한데, 그 두 단체는 충분한 저력과 인적자원도 갖추고 있어서 아주 잘 해낼 수 있을 거 같네요. 구체적인 절차는 고팀장님이 고민해서 계약서에 명기하시면 좋겠습니다.”
고팀장은 두 사람의 뜻밖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수줍어했다. 해맑은 미소로 쑥스럽게 웃다가 곧 정색하며 말했다.
“일단 이 계약은 제3자를 위한 계약형식으로 진행하면 됩니다. 정회장님과 우리가 주된 계약을 하고 그 반대급부만 재단법인 공감과 실천시민연대로 가는 방식입니다. 계약서에 이러한 사항을 모두 명시하고 계약 당일에는 두 단체의 관계자 분들도 모두 참석해서 이모저모 얘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두 단체와 접촉은 저희 법무팀에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고민하고 얘기하다 보니 더 좋은 방안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진행하면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은 따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팀장은 고팀장의 어깨를 감싸며 기발함과 대견함을 칭찬했다. 안대표도 고팀장의 차분하면서도 명석한 일처리를 흡족하게 바라봤다. 웃고 있는 눈동자 깊숙이 칭찬 이상의 감정이 피어났다. 고팀장 뒤에서 비쳐오는 역광이 오늘따라 더 빛나보였다.
그 뒤로 법무팀은 정회장의 손자인 정찬형 변호사와 접촉하며 계약과 관련된 일정을 주고받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모처럼 법무팀 본연의 역할을 해서 그런지 팀원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고팀장은 수시로 기획팀과 개발팀과 미팅을 통해서 공감능력을 키우는 방법론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혹시라도 계약 내용에 반영해야할 중요사항이 있는지를 꼼꼼히 검토했다.
고팀장은 별도로 재단법인 공감과 실천시민연대를 방문해서 공감능력 관련 테라피를 출시할 경우 배포 및 실행방법에 대해 입장조율을 했다. 공감과 실천시민연대에서는 사회적 반향이 클 수 있는 사업이라 자신들이 역할을 할 것을 흔쾌히 승낙했다. 이쪽 단체에서는 사회공헌사업을 하고 있는 활동가와 전문가들이 많아 생각나무의 제안에 대해 더 상세한 활동계획까지 짜서 협조하기로 했다. 실천시민연대에서는 소현희 변호사가 시민단체 활동에 협조적인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공감능력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입법과 제도화를 건의하기로 했다. 또한 국회도서관에서 ‘공감능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제고방안에 관한 국민 포럼’을 개최하여 국민적 관심과 이슈화 작업을 선도하는 역할까지 맡기로 했다.
이주일 뒤. 생각나무의 카페 생각의 숲에서 양측의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회의실보다는 이 좋은 만남을 위해 카페 분위기를 살짝 바꿔서 분위기 있는 미팅 장소로 활용하면 어떻겠느냐는 최팀장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회의실 같은 딱딱한 공간보다 더 편하게 이야기가 오갈 수 있게끔 사랑방 같은 공간으로 꾸몄다. 고소하게 내려지는 커피 향과 조용한 음악이 실내를 차분하고 따뜻하게 만들었다.
정회장 측에서는 둥글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80대 정회장과 이십 대 후반의 청년, 기획실장이라는 세 사람이 참석했고, 재단법인 공감의 사무총장과 실천시민연대 간사인 소현희 변호사가 함께했다. 생각나무에서는 안대표와 최팀장, 고팀장이 자리를 잡았다. 뜻있는 일을 꾀하는 자리라 그런지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도 온화한 분위기가 흘렀다. 따뜻한 환영인사와 악수가 오가고 서로 간의 소개가 있은 후에 정회장은 할아버지 미소로 말을 꺼냈다.
“아주 따뜻한 정감이 느껴지는 카페입니다. 여기가 회사의 카페라죠. 저희 회사에서도 이런 공간을 한번 생각해 봐야겠네요. 직원들 복지나 사기는 곧 업무효율성으로 나타나니까... 저는 왜 이런 생각을 못하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안대표님과 생각나무 직원 여러분들, 이렇게 환영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정회장님, TV에서 뵐 때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이시는데요. 50대라 말씀하셔도 충분히 믿을 거 같습니다. 하하하....”
50대라는 말에 정회장이 껄껄껄 웃자 좌중의 참석자들도 크게 웃었다. 웃음처럼 선한 영향력을 가진 매개체도 없다. 안대표는 한층 누그러진 표정들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야 말로 정회장을 뵙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더욱이 저희들이 본받아야 될 그런 제안까지 해주셔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전에 저희 법무팀과 회장님 손주분과 여러 번 연락을 통해서 오늘 이 자리를 만들었지만, 회장님의 의지가 없으셨다면 저희들도 감히 생각지도 못할 일일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혹여 좋으신 의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의 손님맞이 차는 오미자를 발효시킨 차였다. 잣을 동동 띄우고 작은 한과까지 곁들여 내놓으니 제법 운치 있는 상차림이었다. 정회장은 차를 한 모금 음미하더니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보조식품 회사의 대표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큰 영광이었기에 차를 준비한 카페 매니저는 정회장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오! 오미자향이 적절하고 깊은 맛이 나는 게 잘 발효된 거 같습니다. 저희 회사에서도 오미자나 약재를 활용한 각종 발효음료를 많이 만들어내고 있어서 이렇게 잘 만들어진 차를 보면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오미자의 특성이 잘 나타나서 남녀노소 관계없이 쉽게 마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허허허. 좋습니다....”
참석자들은 차와 회사분위기, 사람들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서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행한 사건들까지 다양한 대화를 나눴다. 고팀장이 생각나무를 대표해서 지금까지의 진행과정을 개략적으로 얘기하고 계약에 대해 설명했다.
“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정회장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뜻깊은 공헌에 함께 할 수 있어 저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입니다. 지금까지 공감능력 테라피에 대한 제안에서부터 계약 이전 과정까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계약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정찬형 변호사와 여러 번 구체적인 얘기를 나눴습니다. 계약 당사자 양측과 재단법인 공감과 실천시민연대까지 관계자분들의 승낙을 모두 받은 상태입니다. 이 계약은 법률상 제3자를 위한 계약으로 정회장님 측과 생각나무가 당사자로 계약을 하고 계약상 권리는 제3자인 재단법인 공감과 실천시민연대에서 수령하기로 했습니다. 계약서를 보시면 이와 같은 상세한 내용들이 적시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공감과 시민연대에서는 전문가들의 협업에 의해 구체적인 실천계획과 집행절차를 마련 중에 있습니다. 정회장님의 선의와 여러 단체의 도움이 우리 사회 공감능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향후 개발이나 배포과정에서 제3자간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 있을 경우에는 긴밀하게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양측에서 계약서에 서명하는 절차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양측에서 정회장과 안대표가 계약서 2부에 서로 기명날인을 하고 계약서를 주고받으며 악수했다. 참석자들은 환호성과 큰 박수로 오늘의 행사를 축하했다. 정회장 측에서 기획실장이 공감과 실천시민연대 양측에 약속한 금액 30억 원을 수표로 전달했다. 또다시 큰 박수소리가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박수소리가 잦아지자 고팀장에 이어 배지형 개발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네, 개발팀장 배지형입니다. 저희 개발팀에서는 공감능력 향상을 위한 프로젝트를 이미 진행 중입니다. 생각나무의 오픈 AI 생각나무 원천에서 인간의 본성인 관용과 연대, 이타심과 공감 등에 대해 정치하고 다양한 소스코드를 추출해서 이미지화 시키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다만 개발과정에서 조심스러운 것은 사람의 감정형성에 관여하다 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른 부적절한 간섭이 발생할 여지가 있어서... 이러한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외부 전문가들과 긴밀히 협의하고 있습니다.”
배팀장은 부작용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시선의 집중을 가만히 주시하면서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공감능력은 개념적으로는 타인의 감정이나 생각,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처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여기는 사회적 관계나 타인과의 교감, 상황판단 능력과 이심전심이라는 복잡한 메커니즘이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정과 태도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토록 복잡한 공감능력을 한두 가지 차원의 자극이나 이미지 전달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데이터 처리능력이 탁월한 생각의 원천도 상당히 보수적인 측면에서 아웃풋을 내놓고 있습니다. 차차 진행하면서 애로사항이나 협의할 상황이 있으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옆자리의 정찬형 변호사, 기획실장과 중간 중간 눈을 맞추던 정회장은 배팀장의 얘기가 끝나자 진지하면서도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고팀장과 배팀장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약서를 들어 보였다.
“저는 처음에 우리 손자인 정변호사가 생각나무에서 뭔가를 만들 수 있다고 얘기를 하길래... 뭐 그냥 인공지능인가 하는 컴퓨터로 뚝딱하면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습니다. 허허. 이게 근데 가만히 돌아보니까 말도 안 되는 무식한 생각이었네요. 건강보조식품이나 영양제 만드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네요. 이런 세상이 있는 줄을 몰랐네요. 이 계약서는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하네요. 생각나무 여러분들이나 두 단체 관계자분들이 하실 일들이 정말 많은 것 같은데... 괜히 수고스러운 일을 부탁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허허허.”
정회장의 겸손한 말투에 안대표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이고 회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기회를 저희에게 주신 것만 해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저희 생각나무에서 어떤 제품을 만들 때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치지만 회장님 회사에서 만들어지는 제품도 이와 못지않게 고심의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이로운 식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과 생각이나 태도에 도움이 될 만한 제품을 만들어 제공하는 것은 큰 범주에서는 비슷합니다. 이것도 큰 인연이니 회장님의 뜻이 더 넓게 전파될 수 있도록 공감과 시민연대 여러분과 협의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계약을 시작으로 해서 저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공감능력 테라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다소 오래 걸릴지라도 성급하게 추진하지 않고 차분하게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만남이 우리 사회가 좀 더 배려하고 따뜻해지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혹시 연락드릴 사항이 있을 때는 정변호사님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장님과 두 분, 그리고 재단법인 공감과 실천시민연대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회장은 카페를 나서기 전 안대표와 눈을 맞추며 따뜻한 한마디를 보탰다.
“대표님, 제가 우리 회사 제품광고에 출연해서 유치하지만 유행어도 있잖아요. 애들은 가라... 혹시라도 제품 관련 광고가 필요하시면 제가 재능기부 모델이 되겠습니다. 이번에는 철부지 애들부터 와라... 이런 멘트를 해야겠지요. 하하하...”
카페 안을 가득 채웠던 참석자들은 정회장의 마지막 멘트에 박수를 치며 웃었다. 역시 사람을 살리는 먹거리 사업을 하는 분은 다르네. 당연히 광고해야죠.. 등등 여러 목소리가 나오면서 훈훈하게 계약이 마무리되었다. 정회장의 함께 사진을 찍자는 제안에 모두가 웃으며 자리를 잡았다. 김치~~~. 마케팅팀에서는 이사진과 관련 내용을 다음날 보도 자료로 각 언론사 기자들에게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