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 정도 있는 기획회의. 주로 팀장급 이상이 모이지만 희망하는 직원들도 참석 가능했다. 오늘은 기획팀의 서미연 과장도 자리를 잡았다. 명상음악이 조용히 BGM으로 흘렀다. 회의실 둥근 탁자 위에 간식으로 한과 종류 여러 개와 커피와 수정과가 책상 위에 놓여있다. 구내카페는 물론 구내식당인 뿌리 깊은 집밥에서도 틈틈이 직원들의 간식거리를 준비해 준다. 고민정은 주말 내내 작성한 베짱이 프로젝트를 오늘의 안건으로 올렸다.
베짱이 프로젝트
안단태 대표와 김도윤 기획팀장이 제목을 보고는 깔깔대며 웃었다. 고팀장은 회의실의 대형 모니터에 제안 이유와 개요를 그림으로 띄웠다. 땀 흘리며 일하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는 베짱이가 기타를 연주하는 만화였다. 그 위로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을까?'라는 문장이 천천히 떠올랐다. 웃음소리가 서서히 작아졌다. 유과와 약과를 베어 물고 커피나 수정과를 마시던 다른 사람들이 조금은 더 진지하게 화면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고민정은 개미와 베짱이 이솝우화를 얘기하고, 그 교훈이 가진 현대적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고 했다. 개미와 베짱이가 가진 상징적 의미를 말하고, 정치나 이념의 도구로 사용될 때 불편한 상황을 지적했다. 개미와 베짱이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가 부지런함과 게으름의 흑백논리로 변화된 우리의 사회상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우리 한국사회에는 유독 일개미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 많아 번아웃이 일상화된 상황이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분위기나 지나친 경쟁 때문에 불평불만도 하지 못하고 개미적 삶을 숙명적으로 살아가는 안타까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은 다음 상품으로 일중독과 번아웃을 막는 ‘베짱이 프로젝트’를 제안한다면서 제안 설명을 마쳤다.
‘베짱이 프로젝트에 생각나무 가족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합니다.’라는 마지막 문구가 느릿하게 흘러갔다. 마지막에는 개미와 베짱이가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 안대표를 비롯한 여러 팀장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팀장의 제안을 박수로 환호했다. 안대표는 고팀장이 자리에 앉는 다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느냐며 물었다.
“저번 주에요. 오래간만에 친구들 만나러 무교동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어떤 고등학생들이 이솝우화를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요. 그때 퍼뜩 스치는 영감 하나가 있었죠. 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수다 떨면서 얘기해보니까... 우리가 정말 일개미처럼 열심히 일만 하고 있는 거예요. 로펌이나 회사에 있거나 시민단체에 있는지 관계없이 너무 많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얘기를 서로가 했거든요. 그러다가 금요일부터 주말에 걸쳐 심심한 김에 정리 좀 했더랬죠.”
잠시 긴 침묵이 자리 잡았다. 명상음악이 주는 평온함 속에 모두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듯했다. 민수경 마케팅 팀장이 어색한 침묵을 깼다. 고민정 팀장의 제안에 격하게 공감을 한다며 자신의 광고회사 시절 얘기를 풀어냈다.
“제가 카피라이터로 있을 때는요. 광고회사 간 경쟁이 엄청나서 대기업이나 외국계 기업 광고수주전이 벌어질 때는 밤낮없이 작업하고 회의하고 보고하고 이걸 계속 반복하거든요. 그러다 광고를 따오면 좋지만, 막상 경쟁 기업이 더 잘하는 경우도 많아서 승패에 대한 압박이 어마어마합니다. 돌아보면, 한주에 몇 시간 일하고 하는... 이런 시간 개념이 없을 때가 그때였거든요. 일주일에 백 시간씩은 그냥 일하고 잠도 잘 못 자고 머리는 계속 돌아가야 하고... 스트레스는 만땅이고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잠자는 시간에도 고민하는 꿈을 꾸곤 했거든요. 그래서 많은 젊은 친구들이 중간에 그만두고 회사를 떠나는 걸 봐와서... 개미처럼 일한다는 고팀장님의 말씀이 가슴에 콕 박히네요. 아마 그때 가슴속에서는 베짱이 같은 삶을 동경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다른 사람들이 민팀장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안대표도 커피를 마시다 뭔가가 생각나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성실과 인내를 최고의 덕목으로 치잖아요. 이 두 가지 가치가 유교적 사회문화에 접속하게 되면 파괴력이 상당하죠. 개인의 수준이 사회적 요구에 미달하게 되면 게으름뱅이나 루저라고 평가받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 사항이 결과나 과정 모두에 영향을 미치다 보니 눈에 보이는 형식이 늘 실질을 앞선다는 게 큰 문제가 됩니다. 눈에 보이는 성실함과 인내가 중요하다 보니 조직이나 개인이나 사회나 몽땅 숭상하는 가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생의 더 중요한 가치나 덕목들도 많은데, 이 두 가지로 많은 것들을 설명하다 보니 벌어지는 해프닝이 개미와 베짱이 얘기 같습니다.”
안대표는 화면의 개미와 베짱이를 슬쩍 쳐다보면서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개미는 일이라는 성실과 인내의 표상이고, 베짱이는 그 대척점에 있는 게으름과 무능의 상징으로 그려진 거죠. 이 동화가 교과서에 실린 시절이 1970년대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개인들의 가치관이 어떻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과 개미, 근면과 성실 그 사이에 개인의 즐거움이나 다른 꿈은 몽땅 사치스러운 덕목으로 변모해 사라진 거죠. 뒤집어 보면 일부 힘 있는 자들은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일개미로 만들어놓고 본인들은 정작 탱자 탱자 베짱이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도 있죠.”
멍 때리기 전문가 김도윤 기획팀장이 안대표의 말을 듣고는 크게 웃었다.
“아니, 대표님. 탱자 탱자 표현이 유쾌하면서도 좋은데요. 간만에 유머 코드 가득합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예전에 ‘탱자 가라사대’를 외쳤던 유명 개그맨이 생각납니다. 요새는 그런 시사풍자 프로그램마저 사라져서 부조리한 사회세태나 엉터리 같은 정치인들을 조롱할 수도 없는 세상이죠. 음...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희희낙락 탱자탱자 즐겁게 사는 것도 중요하죠. 인생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말했던 에피쿠로스학파나, 요한 하위징어가 말했던 유희적 인간이라는 호모 루덴스 같은 표현도 같은 맥락이죠. 한참 전에 우리 사회에 불었던 욜로 열풍이나 일과 가정의 밸런스 찾기도 동일한 차원에서 얘기해야 되는 거죠.”
침을 튀겨가며 말하던 김팀장은 고민정에게 엄지 척을 날리면서 말을 계속했다.
“우리 고팀장님 제안대로 우리 생각나무에서 베짱이 프로젝트를 만들어보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중요한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일반 시민들이 삶 속에서 실현할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죠. 개개인들이 자신의 삶이나 일상에서 밸런스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팀장님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역시나 놀고먹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개발팀장 배지형이 한마디를 보탠다. 배팀장은 ‘노르먹’이라는 놀고먹기 전국적 동호회의 초대 회장이기도 했다. 노르먹은 ‘더 늦기 전에 부지런히 놀고먹고 잘살자’라는 모토아래 회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모임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너무 일이나 밥벌이에 내몰려있는 상황입니다. 극히 일부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든 사회구조라서 더 그렇죠. 땅덩어리는 좁고 양질의 직업은 더 적고, 그 범주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은 엄청 치열하고... 결국 외형적으로는 자발적 개미를 선택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어라 일만 하다가 진짜로 죽어버리는 일개미들의 세상이 우리 사회의 안타까운 민낯이죠. 그런데 웃긴 것은 행복은 늘 멀리 있는 파랑새 같은 한국사회에서 죽어라고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힘들거든요.”
배팀장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좌중을 돌아봤다. 잠시 스마트폰에서 무언가를 검색하면서 발언을 이어갔다.
“죄송합니다. 잠시 이 사람 이름을 까먹어서... 최근에 오죽하면 미국의 유명작가인 마크 맨슨이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국가’로 평가했겠습니까? 이 사람은 2천만 부 이상 팔린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 겸 유튜브 크리에이터입니다. 이 사람은 그 유튜브에서 뭐라고 했느냐면요. 한국은 너무 빠른 성장이라는 압박에 따른 잔혹한 교육체계와 단점만 남은 유교적 문화 때문에 정신건강이 악화된 거라고 했죠. 하나도 틀린 말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회적 통계를 보면 자살률이나 교통사고 사망률, 사회적 불안과 우울 관련 통계를 보면 전부 세계 1등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부끄러운 기록이거든요. 그래도 사회환경이나 분위기는 잘 바뀌지 않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일개미를 자신의 숙명이라고 여기고 순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잖아요. 왜 그럴까요? 우리가 그 점에 주목해야 베짱이 프로젝트에서 혜안과 방법론을 얻지 않을까 싶네요....”
자기주장에 적극적이면서 똑 부러진 성격의 서미연 과장이 기획전문가답게 한마디를 보탠다.
“저도 대표님이나 여러 팀장님들 의견에 적극 동의합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급속히 성장한 것은 위대한 지도가 때문이 아니라 이런 일개미들이 많아서였기 때문일 겁니다. 정치적으로는 왈가왈부하지만 성실한 국민들과 열심히 일하는 기업문화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오늘은 없는 거죠. 때문에 일개미의 성실과 땀에 대해서는 폄하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상징적 의미의 개미의 특성과 실존적 의미의 생존방식은 상당히 큰 괴리가 있을 수 있거든요. 아마도 고팀장께서 제안하신 취지도 선택의 문제 이긴 하지만 양자 간에 존재하는 스펙트럼에서의 밸런스 차원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서과장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발언을 멈췄다. 테이블 건너편의 고팀장이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살펴보고는 자신감을 얻은 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 생각은 개미의 자존감과 베짱이의 여유를 버무릴 수 있는 밸런스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금수저가 아닌 평범한 대부분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최근 한국의 20~30대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거든요. 앞선 세대보다 훨씬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도 상대적 박탈감이 커서 그런 것 같습니다. 베짱이 프로젝트는 연령과 세대를 가리지 않고 우리의 삶을 다시 재정비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짝짝짝... 고팀장은 자신이 꺼내놓은 제안에 대해 이렇게 뜨거운 관심과 예리한 의견을 주고받는 동료들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고팀장은 별도의 부연설명 없이도 자신이 말한 사항을 정확히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나아갈 방향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라 생각했다. 인문학적 배경과 사회적 관심이 없다면 쉽지 않은 진단과 처방이었다. 고민정 팀장은 고개를 숙여 주위에 고마움을 표하며 말했다.
“너무 열띤 회의장 분위기인데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전 공지 없이도 이렇게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요. 저 개인적으로는... 개미와 베짱이가 선택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개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을 바꾸는 게 더 우선적인 과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하지만 이런 거시적인 문제는 우리 생각나무가 해결할 수는 없고, 우리는 우리 차원의 해결책과 방법론을 강구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삶과 일의 밸런스를 어떻게 정하고, 일개미적 숙명에서 번아웃을 당하지 않게끔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할 수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서과장님, 제 제안을 정확히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베짱이 프로젝트는 마냥 놀고먹자는 플랜이 아니고, 일과 여가나 일과 가정에서의 균형과 선택을 좀 더 자발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자는데 중점을 두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 좋은 의견을 기다리겠습니다...”
안대표와 여러 팀장들은 고민정 팀장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더 큰 박수를 보냈다. 약과 하나를 먹고 깨물어 먹고 있던 안대표는 기획회의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오늘도 아주 의미 있는 제안 하나를 건졌습니다. 어쩌면 이런 날갯짓이 우리 사회를 좀 더 긍정적으로 변화하게 하고, 개인들의 삶을 좀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개개인의 의식이 변하면 사회적 분위기도 결국 바뀌게 됩니다. 맹종과 순응이라는 부정적 메커니즘이 우리의 삶을 갉아먹지 않게끔 개인의 선택에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개미에서 베짱이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우리의 생각을 시작해 보도록 하죠. 아마도 이 프로젝트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더 충실한 데이터와 사회나 조직의 분위기 파악은 물론이고 개인들이 자신의 선택에서 자유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포인트가 뭔지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도록 하시죠.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생각의 원천이 있다 해도 여러분들의 열정과 의지가 있어서 더 든든합니다. 생각의 원천도 최대한 활용해서 지혜를 끌어 모아야 하겠습니다. 고팀장님은 제안서를 사내 업무게시판에 공유해 주십시오. 그리고 기획팀과 개발팀에서는 고팀장님의 제안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긴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고민정 팀장은 안대표가 자신의 제안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라는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의 제안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웠지만, 열띤 회의장 분위기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안대표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프로젝트를 밀어줄 줄은 생각 못했었는데... 회의실을 나가며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이면서 고마움을 표했다. 발그레하며 고마워하는 고팀장의 얼굴에 머쓱했던지 안대표도 싱긋 웃었다. 속으로는 간만의 설렘으로 안절부절 이었지만. 무슨 일인지 안대표의 마음도 홍조로 물들어져 갔다.
기획회의를 마친 뒤로 베짱이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워낙에 사회적 분위기나 개인들의 불평불만이 많은 부분이라 의견이나 방법론에 대한 결집이 빨랐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베짱이의 삶에 대한 동경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기획팀에서는 서미연 과장과 팀원 한 명이 고팀장의 제안 작업을 지원하게 했다. 고팀장은 ‘좋은 의문은 좋은 질문을 낳고, 바람직한 질문은 현명한 결론을 낳는다.’라는 원칙에 충실하게 제안서를 수정 보완했다. 좀 더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일과 삶의 여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기획팀과 지원팀을 통해 다양한 연령대가 참여하는 설문조사를 진행해서 그 결과를 도출했다. 실제 살아있는 의문과 불만을 수집하는 것이 몇 사람의 책상 아이디어를 벗어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개발팀에서는 생각의 원천에서 각종 동화에서 얻을 수 있는 상징과 교훈을 추출해서 심리적 심상화 및 시각 이미지화 작업을 진행했다. 동서양의 고전과 각종 자기계발서를 막론하고 삶의 밸런스에 관한 모든 자료를 추출하고 압축해서 자료를 준비했다. 특정 주장이나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개발과정과 결과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의 원천은 프롬프트 엔지니어의 질문에 따라 방대한 원천에서 신속하게 정확한 자료를 추출해 주었다. 생각의 원천 스스로 답한 결과지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모아진 자료를 서로 비교하면서 베짱이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높였다.
안대표와 마케팅 팀장은 다양한 인맥을 활용해서 대기업 중역들과 각종 국가기관의 간부들을 대상으로 해서 설문을 진행했다. 안대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치권이나 재계 인사는 물론 부모님의 인맥까지 동원해서 발품을 팔았다. 민수경 팀장은 광고회사시절 다져놓은 인맥을 최대한 활용해서 다양한 기업의 임원들에게 두루 양해를 구하고 협조를 부탁했다. 그들에게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제품개발 후에 피실험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부탁 요청까지 해두었다. 처음부터 베짱이 프로젝트의 취지를 잘 설명해서 그런지 많은 이들이 생각나무의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싶어 하는 베짱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나무의 구성원들은 베짱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의 내면에 숨은 진심을 헤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느꼈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형식을 강조하는 유교주의 문화와 경쟁 이외에 크게 배울 게 없는 교육시스템을 가진 사회가 힘들었던 것이다. 더더욱 자신들의 인간적인 본성을 드러낼 수 없게끔 하는 사회분위기가 더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와 경제적 능력에 따른 차별이 많은 이들에게 개미의 삶을 강제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쉬이 저항하지 못했다. 문제는 개인들이 이미 고착화된 사회적 시스템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개인의 선택지는 멈춤과 균형의 차원에서 찾아야 했다.
AI 생각의 원천은 이솝우화의 의도와 교훈을 넘어 개미와 베짱이를 재해석했다.
개미와 베짱이는 개인 속에 들어있는 두 개의 자아다. 사회적 자아와 본능적(혹은 자연적) 자아. 열심히 일하고 사회적 활동을 통해 밥벌이를 해야 하는 사회적 자아와 현재를 즐기고 노래하는 자연적 자아. 이 두 개의 자아는 두 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양면적 모습을 가진 하나의 본질이다. 사회적 자아는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고 자연적 자아는 순간을 즐기며 중요시한다. 양자는 서로가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보완적일 수밖에 없다. 노동과 유희, 미래와 현재, 성실함과 적절한 휴식의 대비를 통해 이들이 서로 조화롭게 상응해야 함을 말한다. 양자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개미와 베짱이를 통해 서로 공존해야 함을 말하는 상징이다.
인간들이 보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개미와 베짱이는 서로 적성에 맞는 꿈을 찾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개미는 자신의 육체적 성실함에 맞추어 땀 흘리며 일하는 것에서 자존감과 능력을 발휘하고, 베짱이는 음률과 연주에 재능을 보여 사시사철 악기 연주에 매진하면서 서로가 자신의 꿈을 이룬다. 이러한 선택 생존은 자연 속에서는 너무 당연한 것이다. 대자연에서의 본능과 선택은 서로 결부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세계는 자연 상태의 선택을 거부할 때가 많다. 인간의 세상만이 갖는 특별한 경쟁문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 개개인의 흥미와 적성은 서로 다르며 꿈과 실현방법도 서로 달라야 한다. 이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불쌍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개발팀은 물론 생각나무의 직원들은 생각나무 원천의 해석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생각나무 원천은 독특한 해석에 이어 다음과 같은 데이터를 추천했다. 동양고전에서 과유불급과 멈춤의 시간이라는 중용을, 서양 철학과 문학에서는 에피쿠로스의 쾌락과 그리스인 조르바의 순간의 행복을 추천했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통해 멈춤과 휴식이 없는 사회와 개인들에게 경고사인을 보냈다. 무한히 커지는 물질적 욕망과 계속 작아지는 개인의 자존감을 비교했다. 불필요한 비교와 상대적 박탈감으로 점철된 경쟁사회의 맹목적 순응을 탈피해야 한다고 꾸짖었다. 워커홀릭이 칭찬받고 일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갖게 하는 산업사회의 도덕률에 수정 의견을 냈다. 무조건적인 성실과 완벽주의를 버리고 행복한 밸런스를 찾을 것을 권장했다. 호모 루덴스적 삶을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에 충실하라는 조언을 했다.
기획팀의 제안을 분석해서 제품기획을 하고, 개발팀에서 생각의 원천을 활용한 데이터 작업과 심상화 작업을 거쳐 순조롭게 최종 시제품에 완성되었다. 기획팀과 지원팀에서는 다시 사회 각 분야의 피실험자들에게 적용하는 테스팅 기간을 거쳤다. 그 결과로 제품의 완결성 99%, 사용자 만족도 98%의 결과치가 나왔다. 이와 같은 제품완성 및 실험결과에 대해 다시 회의실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우리 인간도 놀고먹는 유희적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 대기업의 임원은 실험기간 중에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자신이 그동안 너무 개미의 본능에만 충실하다 보니 가슴이 원하는 자기의 꿈을 잊고 있었다가 갑자기 이번에 생각이 뚜렷해져서 그랬다고 합니다. 이번에 사직을 하고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할 거라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왔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개미와 베짱이이라는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이 양자 간에 밸런스를 가지고 조화롭게 활용되어야 우리의 삶도 균형을 갖출 겁니다.”
“피실험자인 어느 고위 공직자는 자신이 승진을 위해 불철주야 보냈던 수많은 시간이 의미도 있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생각해보지 않고 지나와서 자신과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베짱이 프로젝트는 개인의 변화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노동과 여가에 대한 바람직한 환경변화를 가져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느 피실험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자신의 머릿속에서 개미 캐릭터의 성실함과 베짱이 캐릭터의 유유자적이 서로 합쳐진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래서 앞으로는 자신의 선택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합니다.”
회의실에서는 큰 박수소리와 간간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피실험자들이 보낸 메일과 감사인사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3달에 걸친 베짱이 프로젝트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베짱이 프로젝트가 출시되었다. 최초의 제안명 자체가 제품명이 되었다. ‘번아웃 방지와 삶의 밸런스 찾기’라는 부제가 붙어 제품으로 출시되었다. 앱에서는 연녹색의 귀여운 베짱이 캐릭터가 형상화되어 움직였다. 반도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문에서조차 한국의 노동시간의 문제점과 워커홀릭의 위험성을 꼬집으며 생각나무의 베짱이 프로젝트가 우리의 삶을 좀 더 다채롭고 여유롭게 해 줄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다른 보수 매체에서는 정부와 정치권이 피폐해진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꼬집었다.
저녁 8시 공중파 뉴스시간에도 베짱이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우리 사회의 선진화된 수준에 걸맞은 여가문화와 삶의 밸런스 찾기가 중요한 사회적 화두가 될 것이라고 했다. 뉴스에서는 베짱이 프로젝트 출시와 관련하여 민수경 마케팅 팀장의 똑 부러진 인터뷰를 소개했다.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서 시작해서 다시 우리에게도 돌아옵니다. 저희 생각나무에서 개발한 베짱이 프로젝트는 삶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포인트에서 시작했습니다. 밥벌이를 위해 일을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거나 타의적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은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합니다. 번아웃 때문에 사라진 열정과 삶의 의지는 우리 자신과 가정을 힘들게 합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일과 여가에 대한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개미와 워커홀릭이 훈장과 칭찬이 되는 시대는 갔습니다. 지금은 베짱이와 같은 태도로 일을 하면서도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시대입니다. 결국 개미와 베짱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균형의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돼서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밸런스를 찾았을 때, 일터에서나 가정에서 자존감과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생각나무는 신나는 일터와 행복한 가정 모두를 위해 베짱이 프로젝트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한 기자도 자신이 워커홀릭 증상이라면서 ‘저도 이 제품을 즉시 구입해서 사용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는 멘트를 끝으로 방송을 마무리했다. 방송국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밤새 문의와 댓글이 이어졌다.
이렇듯 언론과 방송에서 베짱이 프로젝트 제품출시를 직간접적으로 소개해주다 보니 별도의 광고가 필요 없었다. 그날 밤부터 제품문의와 구매에 관한 문의가 쇄도했다. 회사 온라인 구매사이트는 PC버전이나 모바일 버전 모두 대기 버퍼링이 생길 정도로 인기 폭발이었다. 공중파 방송의 위력은 대단했다. 수백만 명이 동시에 시청하는 뉴스에서 소개된 제품은 다음날이 되자, 전 국민의 1/3이 알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대기업과 국가공공기관에서도 단체구매가 줄을 이었다. 다국적 언어로 변환된 베짱이 프로젝트 버전도 출시되어 해외에서의 구매율이 급하게 우상향의 그래프를 그렸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언론에서도 베짱이 프로젝트 관련 인터뷰가 쇄도했다. 홍보와 언론 관련 대응은 모두 마케팅팀에서 전담했으며, 민팀장의 탄탄한 경험과 세련된 언행이 큰 빛을 발했다.
며칠 뒤 안단태 대표가 전 직원에게 회식을 공지했다. 그동안 베짱이 프로젝트에 대한 노고에 감사하고 대박성공을 축하한다는 취지였다. 공지사항 말미에 직원 모두에게 300% 특별 성과급을 지불할 예정이라는 기쁜 소식도 첨부했다. 직원 모두에게 특별휴가는 물론 원하는 호텔의 3박 4일 숙박권과 뷔페이용권까지 모바일로 지급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고민정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별 성과급과 제안자에게 주는 기여 상여금 대부분을 재단법인 공감에 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