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정 팀장의 목요일 퇴근시간. 별도로 정해진 퇴근시간은 없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5시 30분 정도에 사무실을 나간다. 오늘은 로스쿨 동기들 모임 때문에 종로로 가는 길이다. 교대역에서 환승한 대화행 3호선 지하철은 퇴근 피크타임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붐볐다. 재빠르게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숄더백에서 책을 꺼내 들고 살짝 창가에 기댔다.
지하구간의 어둠 속에서 객실 안이 화면처럼 흘러간다. 다양한 표정의 얼굴들과 졸고 있는 이들, 무언가를 읽는 사람들과 게임하는 이들이 안전한 튜브에 몸을 싣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고속터미널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그만큼 더 올라탔다. 서울시 지하철의 매력 중 하나는 환승의 편리성이다. 1호선부터 9호선까지 서로 오밀조밀하게 연결되어 승객들의 이동시간을 줄여준다.
종로 3가 쪽으로 향하는 지하철은 위로 올라갈수록 승객이 많아졌다. 건너편 임산부석에 중년의 남성이 졸고 있다. 그 앞쪽에 누가 봐도 임신부로 보이는 여성이 힘들게 서있다. 대략 7~8개월 정도로 보인다. 알아서 비켜주면 좋으련만... 남성은 모른 척하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고민정이 나섰다.
“선생님, 저기 죄송한데. 여기 임산부 좌석입니다. 양보 좀 해주셨으면 해서요....”
졸다 급작스럽게 뜬 남성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남성도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황급히 일어나 죄송하다며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다행이다. 자칫하면 말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래도 말이 통하는 중년이었다. 예비엄마는 고맙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민정의 엄마는 오지랖 넓은 딸에게 가능하면 나서지 말라며 한다. 잘못하면 험한 꼴 당하거나 욕 얻어먹기 십상이라는 거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가래떡 뽑듯 오지랖 넓은 부모를 숱하게 봐온 고민정이었다. 좋은 쌀과 소금을 사용하고 최소한의 이윤을 남기면서도 웃으며 일하는 부모 밑에서 무엇을 배웠겠는가!
그녀가 최근 읽고 있는 책은 문학평론가이자 교수였던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이다. 고팀장은 황교수의 전작인 ‘밤이 선생이다’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책을 전부 찾아 읽는 중이다. 문학평론가의 책은 딱딱하고 재미없기로 유명해서 전공자들이나 마니아들 아니면 잘 읽지 않는 장르다. 하지만 황교수의 문장은 문학 속에서 현실을 묻고 현실 속에서 문학의 지평을 넓혔다. 날카로운 사유로 부당한 현실을 직시하고 더 비겁한 위선자들을 꾸짖었다. 명쾌하고 시원했다. 현학을 거부하고 쉽게 쓰여 쉽게 이해됐다. 고개를 끄덕이며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읽었다.
지하철이 한강을 넘어가고 있다. 잔잔한 한강 위로 작은 보트가 떠다니고 있었다. 강물 위에 윤슬이 찬란하게 살아 반짝였다. 고수부지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과 걷고 뛰어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멀리서 바라봤을 때는 그저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민정은 우리 인간세상도 멀리서 바라보면 그러하겠지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비극 또한 그러겠지 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갑자기 앞쪽에서 문이 열리고 자잘한 소란이 밀려왔다. 고개를 돌아보니 무거워 보이는 백팩을 멘 십 대 두 명이 얘기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하고 있지만 앳된 표정은 숨길수가 없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건지 학원으로 가는 길인지 고등학생 두 명이었다. 눈치 안 보고 혈기왕성한 나이 때라 목성이 컸다.
“너 그 이야기 알아?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 얘기 말이야!”
“초딩도 더 되기 전에 본 기억이... 어디 동화책에 나온 스토리 아닌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하고.”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아. 베짱이도 나름 역할을 했을 텐데, 게으르다고 비난받고 겨울에 굶어 죽을 것처럼 그려놓고.”
“그렇지 지금 봐바. 예체능으로 자기 재능을 뽐내는 베짱이 족들이 더 성공하는 시대잖아. 유명해져서 돈도 더 잘 벌고 빌딩도 사고 그렇잖아...”
“그래, 우리 엄마 아빠는 이 동화를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웠다고 하던데.”
“히히히 그니까. 그 시대에는 개미 같은 캐릭터가 존중받고 베짱이는 게으름의 상징으로 남았겠는데. 다들 새마을 운동인가 뭔가 노래 나오면 열심히 일하고 먹고 자고... ”
“오늘도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그랬잖아. 동화에서는 은유와 적절한 교훈만 얻어야지, 그 이상의 것을 바라면 안 된다고.”
“원래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정치적으로 포장되거나 해석되면서 사람들에게 이상한 관념을 주입시킬 수도 있어서 독자들이 현명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내가 무릎을 쳤다는 거 아냐!”
“오!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 짜식 제법인데... 아 다음 역에서 내려야지. 매콤 떡볶이 먹을 거지?”
“당근이지. 그 집 어묵도 맛있잖아... 빨랑 내리자!”
고민정은 어린 친구들의 개미와 베짱이 얘기를 들으며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개미들이 옳다고 부지런한 게 선이고 게으름은 나쁜 거라고. 한때 그렇게 생각했었지. 개미처럼 부지런히 살 거라고. 멀리 남산이 스치듯 지나갔다. 맑은 날 해질 무렵이라 노을 속의 남산타워가 그림 같았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지금의 평온함이 그에게 미소를 던져주고 있었다.
고민정은 로펌에서 일하던 때가 떠올랐다. 매일 밤 밥 먹듯 야근하고 동료들과 얼마나 열심히 생맥주와 폭탄주를 들이부었던가. 짧은 시간에 먹고 마시다 보니 음식맛과 술맛을 평가하기 힘들었다. 피자도 우걱우걱, 프레첼도 두세 개씩, 먹태도 손으로 집어 입에 넣기 바빴다. 술자리 분위기를 즐긴다기보다는 그저 취하기 위해 하루의 노고를 달래기 위한 자리여서 서로 대화도 최소화했다. 가능하면 업무얘기는 피했다. 지겹도록 법조문과 판례를 검색하고, 회의하고 토론하며, 검토서를 작성하고 소장을 쓰다 보면 하루해가 짧았다. 점심 저녁도 의뢰인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아 자신만의 시간을 낸다는 게 꿈같은 일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받는 연봉이 적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업무량과 비교해 보니 결코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생활을 몇 년 동안 하다 보니 번아웃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는 맹목적 개미는 아듀다. 맑은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저녁 6시 30분, 을지로입구역 무교동 골목. 맛있는 갈비 냄새가 먼저 반겼다. 오래된 골목 사이로 삼삼오오 사람들이 오갔다. 숯불로 생선과 등갈비를 굽고 있는 이들이 손님들을 이끌었다. 오늘은 고깃집이라 그랬지!
60년 노포인 삼겹살집에는 직장인들로 꽉 차있었다. 뿌연 연기 속에 고기 굽는 냄새가 온갖 대화 속으로 떠돌고 있었다. 냉동삼겹살이라면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집으로 오래된 단골들이 많았다. 대신 시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팔을 걷어 부치고 먹고 마시며 목청껏 대화하는 팀이 많았다.
출입구 쪽에서 두리번거리는 순간, 저쪽 구석에서 누군가 번쩍 손을 들어 민정을 불렀다. 절친인 박수연이다. 언제 봐도 반가운 얼굴들. 로스쿨 동기들 중에서도 죽이 잘 맞아 계속 어울려 다니는 사총사였다. 벌써 소맥 넉 잔을 말아 놓고 불판 위에는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상위에는 냉동삼겹과 궁합이 잘 맞는 파채무침과 잘 익은 배추김치가 구색을 갖추었다. 계란 프라이도 네 개가 놓여있었다. 이 집만의 특별한 상차림. 군침이 돌았다.
네 사람은 잔부터 높게 들었다. 서로 눈빛을 맞추고 브라보 하며 잔을 부딪쳤다. 시원하게 원샷. 캬! 소리가 절로 나왔다. 새로 나온 라거 맥주는 쌉쌀하면서도 깊이가 그만이었다. 목 넘김이 부드러우면서도 짜릿했다. 서로 바빠서 분기별로 한 번씩 보자는 모임이 자주 건너뛰었다. 광화문 쪽 로펌에 근무하는 박수연이 웃으며 말했다.
“오, 민정이 얼굴 때깔 봐바. 로펌에 있을 때는 희멀건 했던 애가 핏기도 없어 보이더니만 지금은 뭐야. 혈기왕성한 이십대로 다시 돌아간 거 아냐.”
“그러네. 변호사 일할 때는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눈에 핏발도 서고 힘들어하더니만, 이 부드러운 눈매는 뭐란 말인가! 흐흐흐. 얼굴이 밝아 보이는 게 꼭 사랑에 빠진 십 대 같은 얼굴 표정인데...”
시민단체에서 간사로 일하는 소현희 변호사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시민운동에 뜻한 바 있어 로펌행을 거절하고 용감하게 종로에 있는 시민단체에서 간사 겸 법무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역시나 대형로펌에 근무하는 최소정도 고민정의 변화에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보여. 나는 잘 모르겠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표정이 예전과 다르게 부드러워지고 편해졌다고 그러네. 하는 일 때문에 그런가 봐. 로펌보다 작은 연봉이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해서 그런가 봐. 수연이 너는 지난번 대형 계약 껀 검토서 작업 맡았다고 그랬잖아.”
박수연은 고팀장의 얘기에 깻잎에 삼겹살을 싸서 크게 한입 먹으며 말했다. 우걱우걱 하면서도 소주 한잔을 급하게 털어 넣었다.
“응, 그러잖아도 그일 때문에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 빼놓고는 늘상 책상 앞이지. 틈틈이 프로젝트 팀이랑 회의하고 검토서 중간중간 점검하고 파트너 변호사랑 얘기하고... 요새는 휴일도 없어. 오늘은 간신히 아프다는 핑계 대고 도망 나온 거야! 저번에도 나 때문에 우리 모임 못했잖아. 도저히 미안해서 안 되겠더라고.”
다른 두 친구도 박수연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서로에게 위로를 보낸다며 각자의 잔을 들며 건배했다. 시민단체 소속 변호사인 소현희는 친구를 위로하면서도 본인도 일 때문에 죽겠다는 하소연을 했다.
“우리 단체는 누가 봐도 옳은 일을 많이 하잖아. 니들이 봐도 그렇잖아. 그러다 보니 이상한 단체나 사람들이 우리를 상대로 하거나 활동가 개인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고소 고발을 많이 걸거든. 일일이 대꾸할 가치도 없는 얘기들인데도 껀껀이 검토해서 답변해줘야 하니까 나도 힘들어 죽겠어. 상대방이 나이 든 분들이라서 함부로 할 수도 없고 우리 단체도 애로가 참 많아. 참고 참다가 나가버린 활동가들도 벌써 여럿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는 참 이상해...”
소변호사가 일하는 시민단체는 우리나라의 각종 정책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변호사라 해도 소정의 활동비 외에는 월급이 쥐꼬리만 했다. 사명감이나 보람이 아니면 도저히 생활도 안 될 정도였지만, 단체에 속하는 사람들은 꽤나 의연하게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10대 로펌에 근무하는 최변호사도 친구들 얘기에 귀 기울이다 화가 나는지 젓가락 사이에 들고 있는 고기를 내팽개치고는 한마디를 보탰다.
“에이 씨, 그니까 아무리 열심히 일하면 뭐 하겠어. 다들 파트너 변호사 되기를 학수고대하며 근 10년씩 참아내고 있지만. 쓰지도 못할 돈을 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야. 맨날 야근에 회식에다 회의하고 클라이언트 상담하다 보면 일주일이 고속열차로 쓩 지나가고 말이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어!! 내 다크서클 좀 봐바.”
문득 고민정의 머리에 지하철에서 들었던 고딩들의 얘기가 생각났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라. 이렇게 다들 개미 방식으로 살다 보면 무엇이 남을까. 무엇을 위해 개미 같은 생존방식을 택하고 살고 있을까. 자신의 선택이 옳은 걸까. 친구들과 못다 한 수다를 떨면서 베짱이의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한참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야 할 나이에 베짱이의 생존방식을 떠올리는 게 어울릴까. 현재 자신의 삶은 개미의 방식일까 아니면 베짱이의 방식일까. 민정이 친구들에게 소주잔을 건네며 질문 하나를 떠올렸다.
옆자리에서는 40대로 보이는 직장인들이 툴툴거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얘기는 희망퇴직이니 명예퇴직이니 하면서 퇴직금과 퇴직 연령대를 손꼽아 가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새로 바뀐 최장 69시간이라는 근로시간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면서도 웃음 속에 애잔함이 흘러가는 모양새였다. 건너편에서는 누군가 폭탄사로 ‘오늘만 날이다. 먹고 죽자’를 외치면서 넥타이를 벗어던졌다.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들 거기서 거기인 뻔한 퇴근시간을 살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던 민정이 친구들에게 술을 권하며 의미심장한 문장 하나를 던졌다.
“근데, 니들은 개미의 삶이 좋아, 아니면 베짱이의 삶이 더 좋아? 이솝 우화 그 동화 이야기 알잖아! 니들 생각은 어때?”
뜬금포 같은 민정의 물음에 잠시 침묵이 오갔으나, 눈치 빠른 친구들은 의미를 알아챘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독서광이면서 공감능력이 뛰어난 소변호사가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말했다.
“글쎄, 뭐가 좋다기보다는 개미의 은행잔고와 베짱이의 시간적 여유를 함께 가지면 안 될까!”
센스 있는 답변에 친구들 모두가 웃었다. 최변호사도 웃으며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지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옛말도 있잖아. 꼭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열심히 일하며 돈 버는 것은 잘 살려고 하는 건데. 막상 대부분이 잘 산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거지. 그렇지 않은가. 친구들?”
오늘 장소를 예약한 박수연이 분위기가 다운되는 걸 막고자 급히 화제를 돌렸다.
“얘들아. 여기 삼겹살 맛있지. 파무침에 김치에다 싸 먹어봐. 그다음에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고. 인생 뭐 있어. 자자 다 함께 또 한 번 브라보. 짜~ 잔. 여기 우거지된장국 맛있는데 그걸로 속 좀 채워볼까?”
역시나 30년 노포인 무교동 골목 안쪽의 생맥주집. 전형적인 독일식 맥줏집 콘셉트로 분위기가 좋았다. 우리나라에서 생맥주 냉각기가 가장 많다는 이 집은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인기 좋은 호프집일 것이다. 저녁 8시가 넘어서인지 거의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생맥주 잔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 울러 퍼졌다. 20대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남녀노소가 맥주잔을 들고 있었다.
네 사람은 하나 있는 빈자리를 겨우 잡고, 골뱅이와 오징어 마른안주를 씹으며 거품 넘치는 생맥주를 마셨다. 또 다른 안주는 아까 못 끝낸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였다. 친구들이 작심한 듯 개미에게는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베짱이에게는 호의와 찬사를 보냈다. 왜 이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지를 외치며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냈다. 오징어 다리를 뜯으며 개미의 삶을 한탄하고, 야채무침 속의 골뱅이를 골라먹으며 베짱이의 배짱을 부러워했다. 그렇게 친구들끼리 웃고 불평하고 미래를 얘기하며 무교동은 밤은 더욱 농밀해져 갔다. 웃음소리가 커져갈수록 맥주거품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꺼져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 서울 도심에서 택시 잡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어렵게 잡은 차속에서 고민정의 머릿속에 한 가지 계획이 거품처럼 떠올랐다. 남산 터널을 지나 한강에 접어들자 건너편 강남의 아파트와 빌딩들이 불야성으로 빛나고 있었다. 민정은 저들은 개미처럼 살고 있을까, 아니면 베짱이처럼 살아서 저토록 빛나고 있을까에 의문을 던졌다. 저 휘황찬란한 불빛은, 저 빛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즐겁고 행복할까. 많은 사람들이 소망하고 그토록 바라는 부자들의 삶과 상징들. 한강변에 쭈욱 늘어선 크고 작은 아파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뽐내고 있었다. 아마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러하겠지.
다음날 오전 10시. 고민정은 차분한 지하철에서 어젯밤 베짱이를 생각했다. 꿈속에서도 베짱이가 기타 치며 춤추는 걸 보고 손뼉 치며 환호하기 않았던가! 무언가에 필이 꽂히면 일단 직진하고 보는 게 고민정의 캐릭터였다. 그토록 생생하고 큰 베짱이는 처음이었다. 일어나자마자 그 베짱이를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고민정은 9층의 구내카페에서 얼음 가득한 커피를 한잔 받아 들고 곧장 자신만의 시공간으로 빠져들었다. 금요일이라 출근하지 않은 직원들이 많았다. 재택근무이거나 쉬는 날 일 것이다. 생각나무는 처음부터 주 4일제 근무와 유연근무제를 원칙으로 정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4일만 선택해서 24시간만 일하면 된다. 출퇴근 시간도 자유롭다. 바쁜 일정이나 회의가 아니면 월요일이나 금요일은 쉬는 직원들이 많았다. 오늘의 일정 체크를 해놓고 바로 베짱이의 삶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젯밤 생맥주가 두 잔 째 돌아가고 나서 제일 바쁘다는 박수연이 그랬잖은가. 대학 때 만난 첫사랑과 결혼한 수연은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다.
“지금은 뭔가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느낌이 강해. 회사에서는 직원으로 집에서는 엄마로 살아가면서도 내가 누군지를 묻는 게 쉽지도 않고. 니들은 안 그래? 민정이가 말한 개미하고 베짱이 얘기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분명 있잖아. 잘 사는 게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말이야. 어떻게 사는가 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그거잖아.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질문 다음에 어떻게 사는가가 나오는 게 순서인대. 우리는 늘 어떻게 사는가에서 시작하고 거기서 멈춰버리잖아.”
수연의 얘기가 맞았다. 우화 속 개미와 베짱이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성실과 게으름에 관한 은유적 삶의 태도이거나 생존방식의 문제다. 사실 모든 개미가 일개미인 거는 아닐 테고 모든 베짱이가 한가롭게 놀 수도 없을 것이다. 삶의 목적과 생존방식의 선택에서 동화에 나오는 태도가 나온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 결과다. 실상 동화 속 개미와 베짱이는 아무런 죄가 없다. 복잡한 자연계의 오묘한 이치에 의하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민정은 PC 화면에 ‘베짱이 프로젝트’라고 썼다. 베짱이... 베짱이 프로젝트. 베짱이 테라피. 일중독에서 탈출을 원하는 당신에게 보내는 치유의 레시피. 출근길 지하철에서 핸드폰에 메모한 문장을 그대로 썼다. 지하철 안의 수많은 개미들 사이에서 베짱이의 삶을 떠올렸다.
회사 홈페이지의 직원용 게시판에도 베짱이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올렸다. 좋은 의견이나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연관 단어로 일중독, 번아웃, 소진, 슬럼프... 를 기재했다. 민정은 똘똘하고 호기심 많은 직원들이라 다양한 의견을 내놓을 거라 생각했다.
회사 게시판에 업무 관련 주제가 올라오면 댓글과 메일이 쇄도하는 게 생각나무 주식회사의 좋은 문화였다. 업무가 서로 연관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협업이 중요한 업무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게시판에 작은 미끼를 던져놓아도 대어가 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까닭에 직원들은 게시판을 ‘대물 낚시터’라고 명명했다. 서로 사내 메신저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나 실행방법이 떠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0시 30분. 고민정은 구내식당의 점심메뉴를 확인했다. 오호라, 북어해장국과 동치미에 나물 반찬이었고, 다른 하나는 별미로 옹심이 팥죽이었다. 목요일에 회식이나 모임이 많은 사정을 헤아린 주방 세프의 세심한 배려였다. 두 가지 음식 모두 해장에 도움이 되는 음식이다. 바로 사내 시스템에 구내식당 이용란에 체크했다.
구내식당에서는 그날그날의 식수인원을 헤아려 음식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잔식이나 잔반을 남기지 않는 것도 환경보호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생각나무의 구내식당은 ‘뿌리 깊은 집밥’이다. 3명의 세프와 3명의 보조 인력이 근무한다. 각각 한식과 양식 일식 등 조리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을 불러 모았다.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마음껏 사용하다 보니 음식의 맛과 질이 훌륭했다. 식수인원이 대략 70~80여 명 정도라 준비과정도 여유 있었다. 하루 두 끼를 제공한다. 아침은 간편식으로 점심은 맛있는 집밥 메뉴를 준비한다. 김치부터 밑반찬 등 모든 음식은 직접 조리를 원칙으로 한다. 슬로우 푸드와 정성이 담긴 메뉴가 직원들의 사기에 도움이 될 거라는 안대표의 혜안이었다. 혹여나 배식하지 않고 남은 음식에 대해서는 인근 사회복지단체와 푸드뱅크를 통해 독거노인들에게 당일 배송된다. 최지민 팀장의 아이디어였다.
12시 30분. 조금 늦게 간 구내식당은 한산했다. 선정릉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점심의 맑고 시원한 북어해장국은 일품이었다. 거기에 살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동치미 국물은 가슴속까지 얼얼했다. 시골 할머니의 손맛이 저절로 떠오르는 그런 맛이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은 물론 어젯밤 숙취가 몽땅 달아났다. 일반 식당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엄마의 손맛 같은 느낌이었다. 민정은 옹심이 팥죽도 반그릇을 먹어치웠다. 약속 없이 혼자서 먹은 점심이라서 오전의 생각을 되새김질하며 천천히 먹었다. 서초동에서 쫓기듯 햄버거나 간편식으로 먹던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거품 가득 찐한 라떼를 들고 돌아온 고팀장은 사내 게시판을 열었다. 벌써 여러 사람이 댓글을 달아놓았고, 프로젝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사를 해보겠노라고 했다.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다. 예전 로펌에서도 각종 TF와 업무협업에서 만족감을 느끼긴 했지만, 지금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돈을 받고 고용된 법률대리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나무에서는 마치 내일을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점이 민정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 소속감과 업무 집중력을 높여주었다. 그렇다. 주인정신은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것이었다.
어제 만난 친구들에게도 SNS를 이용해서 안부를 전했다. 어젯밤 잘 들어갔는지, 속은 괜찮은지, 해장은 했는지 등을 묻고는... 자신이 어젯밤에 깨달은 바가 있어서 ‘베짱이 프로젝트’라는 테라피를 만들어 보겠노라고 했다. 친구들은 바쁜 와중에서도 따뜻한 격려와 박수를 보내왔다. 자신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니 잘 만들어달라고 했다. 로펌이나 업무량이 많은 친구들에게도 개미와 베짱이의 삶은 흥미로운 주제임이 분명했다. 민정은 7층 법무팀 사무실에서 멀리 삼성동의 높은 빌딩들을 쳐다봤다. 금요일 오후이지만 저곳에서는 수많은 일개미들이 죽어라 일하고 있겠지. 자신들이 개미의 생을 산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이번 주말에는 베짱이 모드에 빠져볼까 하며 민정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