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세상의 모든 불행은 인간으로부터 나온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미숙한 인간의 충동과 어리석음에서 나온다. 특히나 정치 분야 쪽에 이런 부류들이 많다는 것은 인간세상의 아이러니다.
벌써 1년 넘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갈등인 전쟁은 그 시작과 끝을 아무도 모른다. 이 전쟁 또한 무슨 이유로 시작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몇 없다. 푸틴도 젤렌스키도 그럴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수많은 이국의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 어떤 감정도 명분도 없이 전쟁터에서 적과 적으로 만나 총부리를 겨누다 총탄에 산화된다. 전쟁을 일으키거나 부추긴 자들은 그 시간에 해외여행을 가고 캐비어를 곁들여 샴페인을 마신다.
전쟁의 위험과 공포가 일상화되어 버린 쪼개진 한반도. 어느 저녁자리에서 힘깨나 쓸법한 인사가 한마디를 던졌다. 특유의 반말 투로 폭탄주를 말다가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다. 군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이 인사는 전쟁 영화와 중국 무협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나 전쟁을 저렇게 밖에 못하나. 지지부진하지 않고 더 화끈하게 할 수도 있을 텐데... 허허, 참나 전투에서 두려움과 공포 없이 용감하게 싸우는 군인을 만들 수 있지 않나?”
강 건너 불구경식의 화법을 자주 구사하는 유력 인사가 저녁 술자리에서 그냥 툭 던진 얘긴지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 만, 출세욕에 눈에 뒤집힌 안보라인의 누군가는 머릿속에 메모하면서 그 사실을 기억하려 했다.
‘용감한 군인을 어떻게 만들지?’
베레모를 쓴 특수전 부대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하나. 생각나는 게 쌍팔년도 공수부대밖에 없는 터라. 그런데 우리 군에 이런 부대들이 몇 개나 있지. 역시나 이상한 질병을 이유로 군대를 가지 않은 이 인사는 군과 전혀 인연이 없는 유력 인사의 혼잣말에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비리로 잘렸다가 정권이 바뀌자마자 벼락출세한 국방부장관에게 물어볼까. 아니면 돈 욕심이 덕지덕지한 고등학교 후배가 짱으로 있는 방위사업청이나... 아하! 그렇지. 갑자기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 저녁 술자리에서 노덕술 의원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이 났다. 무슨 생각인가 의식인가를 심어준다는 그 회사 얘기가.... 그래. 그 노련한 노의원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었지. 대한당 당원들에게 엄청난 효과를 줬다고 했잖아. 잠깐 있어봐라. 노의원 전화번호가... 이른 노안이 온 그는 안경을 머리 위로 올렸다.
참석자들은 다들 취중 진담인지 그냥 농담인지를 내뱉으며 나랏일을 안주로 삼고 있었다. 국방안보와 북한문제는 이미 두 번째 건배를 하면서 마무리 지었고, 교육과 저출산 문제가 네 번째 건배 안주로 오르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너무도 중요하고 진중한 문제를 너무나도 쉽고 가볍게 해결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술잔이 파도타기를 하고 있어서 그 자리에서 통화하기에는 여간 부적절했다. 안보라인의 그가 밖으로 나갈 무렵에는 서로가 키우는 애완견 얘기에 빠져드는 중이었다. 이들에게 하룻밤은 만리장성 축성은 물론 국정 전 분야를 논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사망자 수가 수십만 명이라는 소식이 뉴스에 나온 날, 어느 방위산업체의 임원 한 사람과 직원으로 보이는 이가 생각나무를 방문했다. 부사장 명함을 가진 이 인사는 안대표를 찾았으나, 부재중인 대표를 대신해서 김도윤 기획팀장과 서미연 과장이 맞이했다.
생각나무의 게스트 룸이자 회의실은 잘 만들어진 카페였다. 최고급 커피머신과 간단한 먹거리가 늘 준비되어 있다. 방문한 인사는 제냐의 최고급 쓰리버튼 정장을 입고 세련미를 더한 외모였다. 태닝을 한 듯 짙은 구릿빛 피부에 건강미가 넘쳤다. 그의 외모와 말투에서 전직 군인 같은 느낌이 묻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무기정밀화학 주식회사 전무 장세용입니다.”
명함을 내미는 손길이 세련된 비즈니스에 최적화된 몸짓이었다. 강해 보이지만 의외로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에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그런 캐릭터였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생각나무 기획팀장 김도윤입니다. 엊그제 저희 회사에 전화하신 분이시죠? 상품 개발을 위해 방문하신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네, 그렇습니다. 생각나무 주식회사에서 주문형 상품도 제작한다고 해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생각나무에서 출시한 여러 상품을 다각도로 검토한 결과 저희가 원하는 제안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상당히 구미가 당기실 제안인 듯합니다만은...”
직원인 듯한 친구가 가죽가방에서 제안서로 보이는 문건을 꺼내 들어 기획팀장에게 건넸다. 얼른 봐도 포장이 잘된 기획제안서 같았다. 김팀장은 천천히 한 장 한 장 제안서를 넘겼다. 누가 만들었는지 그림과 그래프, 설명 문장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내용이었다. 총 1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쉽게 읽혔다. 앞뒤로 서류를 넘겨보다가 다시 제일 앞 페이지로 돌아와서 장전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장전무님 회사에서는 국방부에서 위탁한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시고요. 그 프로젝트의 핵심이 생각나무에서 군인들의 의식에 용기를 심어주는 상품을 만들어달라는 말씀이시죠?”
장전무는 김팀장이 골자를 잘 이해하였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생각나무 측에 좀 더 중요한 정보를 말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네, 그렇습니다. 최근 우리 군에 들어온 젊은 청년들이 다소 유약한 세대들이라서... 이들에게 제대로 된 군인정신을 심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다들 부모 밑에서 오냐오냐 키워진 친구들이라 아무래도 군대의 명령체계나 훈련과정에 동화되는 것이 조금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들에게 군 생활에 쉽게 적응하게 하고, 명실상부한 군대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 이런 제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제안서의 핵심은 국가안보를 위한 강군양성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 청년들에게 좀 더 수월한 군생활의 편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군 출신 인사답게 브리핑 능력이 돋보였다. 간결한 문장과 정확한 용어 사용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이 전달하고픈 의사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목적 외에도 생각나무의 인지과학 기술을 국방전략에 접목시켜 국가안보와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저희의 목적 중 하나입니다. 이점까지 헤아려주셔서 판단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드리겠습니다. 충분히 검토해 보시고 연락 주시면 저희 실무진이 다시 방문해서 자세한 사항을 협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나 입에 모터를 단 듯 일사천리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김팀장은 회사입장에서는 큰 프로젝트 하나를 수주할 것으로 기대하며 미소를 띠였다. 더욱이 국방 관련 산업이면 지속적인 매출이 발생하는 노다지가 아닌가! 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장전무를 천천히 바라봤다.
“저희 대표님과 담당자들의 회의를 거쳐 장전무님께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무님 말씀을 듣고 보니 상당히 고무적인 제안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의식전환이 저희 생각나무의 주력 아이템 중 하나거든요. 군인정신의 씨앗을 신병들에게 뿌려주는.... 생각만 해도 그럴듯한데요. 하하하”
장전무는 김팀장과 악수하며, 좋은 답변을 기다리겠노라며 말했다. 김팀장 또한 안대표에게 대형 수주에 대한 보고를 할 생각에 들뜨며 상담을 마감했다. 장전무는 김팀장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저희 회사랑 MOU를 체결해서 방위산업 협력업체가 되면 지속적인 매출신장은 물론 회사 이미지 제고에도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김도윤 팀장은 장전무가 돌아가자 무기정밀화학에 대해 검색을 시작했다. 대표자는 김기준... 육사 출신의 3성 장군 출신이다. 이 회사는 1970년대에 설립되어 현재는 김기준 대표가 2세대다. 서울 용산에 본사를 두고 공장은 평택과 천안에 있다. 주력 제품은 군수산업과 우주항공 관련... 아마도 전차나 장갑차, 미사일이나 로켓포일 것이다. 연 매출액에 대한 정보는 무기 생산 및 판매와 관련된 기밀사항이라 자세하게 알기는 어렵다. 국방부 관련 사업에 대한 사업내용이 있는 걸로 보아 그 밖의 유무형의 프로젝트에 관여하는 모양새다.
부사장인 장세용 전무는 역시 육사 출신으로 육군 소장 출신이다. 미국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파견과 무관으로 외교관 활동을 거치고, 다시 야전인 육군 특전부대의 사단장까지 거친 인물이다. 이 정도면 더 높이 승진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군사정권에서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전역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김팀장은 국방부나 방위산업체와 협력하는 이번 건은 대형프로젝트라 생각했다. 생각나무는 창설 이래로 다양한 상품을 일반인에게 소매형태로 판매에 주력했다. 동석한 서미연 과장에게 안대표에게 보고할 리포트를 작성하게 했다. 그 내용에는 용감한 군인정신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와 향후 협력방안에 대한 조치사항을 포함케 했다. 규모가 큰 국가기관이나 계속적 사업에 관련된 매출은 곧 조직의 급성장을 의미한다. 김팀장은 서과장과 이모저모 대화하며 한층 들뜬 분위기에 휩싸였다.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 직원의 사기는 물론 자동적으로 연봉과 직급의 상승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생각나무는 안단태라는 1인 기업에서 출발해서 현재는 중견기업과 중소기업 사이 규모로 성장했다. 매출액과 영업순이익만 따진다면 소문내서는 안 될 알짜기업이었다. 그야말로 첨단 기술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수익구조였다. 성장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회사 입장에서 꾸준한 매출이 보장된다면... 현재의 기업규모에서 장차 상장법인의 가능성까지 엿볼 수 있게 된다. 특히나 이런 대형수주 계약이 성사되면 상장법인이 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 몇 가지를 충족하게 된다.
00다운 생각은 모두가 자신이 입은 옷에 걸맞은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게 있을 것이다. 김도윤은 카페에서 가져온 생크림 가득한 아인슈페너를 마시며 달콤한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번 건을 잘 처리하면 자신의 입지는 물론 기획팀의 위상도 좋아질 거라는 기대에 커피향이 더 달달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기획팀장님 생각에는 무기정밀화학의 제안이 대박 기회라는 거죠?”
전날 출장을 마치고 안대표가 출근했을 때 그의 책상에는 전날 기획팀이 작성한 검토서가 놓여있었다. 안대표는 차분하게 기획서와 제안서를 넘기며 살펴보고는 김도윤 팀장과 서미연 과장을 자신의 방으로 호출했다. 이들과 에이스 크래커를 커피에 찍어 먹으며 안대표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안대표도 이런 대형 프로젝트 계약이 제대로 성사되면 회사의 규모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안대표가 에이스를 믹스커피에 찍어먹는 것은 어머니가 알려준 것이다. 커피만 마시기에는 뭔가 허전할 때 달지도 짜지도 않은 얇은 크래커를 더하면 양자의 궁합이 감미로워진다는 어머니의 얘기였다. 부모들 대학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커피와 과자를 마셨노라고.
평소에도 스스럼이 없던 안대표는 커피와 크래커에 얽힌 부모세대의 문화를 말했다. 김팀장과 서과장도 호기심 삼아 먹어보자고 했지만... 이들은 벌써 에이스 과자를 두 봉지째 커다란 커피 잔에 찍어먹는 중이었다. 쌉싸래한 커피가 덜 쓰게 느껴졌고, 퍽퍽한 크래커는 커피에 젖어 촉촉해져 식감이 좋아졌다. 맛과 향이 다양한 커피를 골라먹던 시대인지라 이런 풍경은 더 이상 보기 힘들었다. 지금은 카페마다 다양한 커피에 조각 케이크나 마카롱 같은 디저트를 곁들여 먹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한세대 전만 해도 이 같은 풍경이 일상이었다. 아침을 거른 건지 크래커 몇 개를 연신 집어먹던 서과장이 초승달 같은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하하하... 대표님. 이거 정말 별미인데요. 부드러운 케이크나 초콜릿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인데요. 커피와 크래커라.... 담백한 둘 사이의 궁합이 잘 맞고,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상쇄해주고 있어서 커피의 풍미가 더 깊어지는데요....”
“그렇죠. 저도 어머니한테 얘기를 듣고는... 그런 커피문화는 예전에 먹을 게 없을 때나 가능했던 걸로 치부했었는데... 막상 어느 비 오는 날 오전에 이렇게 먹어보니깐....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흔히 말하는 콜라보가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그런 생각도 했죠. 하나씩 놓고 보면 별론데... 두 개 세 개를 합쳐놓으면 뭔가 더 근사한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도 커피와 크래커 관계와 같다는 생각이... 하하하... 너무 많이 나갔나요. 커피 한잔 마시면서.”
안대표의 커피와 과자 얘기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생각나무가 회의실조차도 카페처럼 꾸민 이유는 말랑말랑한 상황에서 더 날카롭고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는 대표의 지론 때문이었다. 기획회의도 불편한 프레젠테이션이나 순번제 발표는 전혀 없이 정확히 필요한 얘기만 해서 짧게 진행하는 것도 직원들에게 큰 인기였다.
안대표가 평소 주장하는 세 가지가 있다. 1. 우리 모두는 이 회사의 주인이다. 2. 모든 사적인 업무는 공적인 업무보다 앞선다. 3. 커피타임이나 술자리는 어떠한 회의보다 앞선다. 어느 조직에서도 따라 하지 못할 이 같은 회사분위기 때문에 직원들은 하나같이 일당백의 능력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생각나무는 비상장 법인이지만 연봉과 다양한 성과상여금 외에도 별도로 전 직원의 주주화를 지향하고 있다. 회사 자본금 규모가 늘어날수록 주주이자 직원들은 신주인수권 행사를 통해 자신의 주식보유량을 늘려가고 있다. 나날이 애사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커피가 식어갈 무렵, 안대표가 김팀장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김팀장님, 말씀하신 대로 이번 건은 잘되면 우리 생각나무가 크게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네요. 일단은 저쪽 실무진과 접촉해 보시고, 자세한 요구사항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군인정신이라는 것이 정형적인 개념이 아니어서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도 물어봐주세요. 우리 상품은 인터넷 환경과 개인 핸드폰이나 정보화기기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군대 내에서 이러한 환경 조성이 가능한지 여부도 여쭤보시고요. 다음 커피타임 때 다시 얘기하기로 하시죠! 맛있는 점심들 되세요.”
안대표는 혼자 있으면서 군인 정신이라는 게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의무적 병역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요구하는 걸까. 300명가량을 4년 동안 교육 훈련시키는 사관학교에서도 군인정신이 쉽게는 만들어지지 않을 터인데... 대체 어떤 내용의 생각의 씨앗이 필요할까. 나아가 군인정신을 고취시키고 무장시키는 게 평범한 청년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없을까. 이런저런 걱정 지수가 올라가면서도 대형 수주에 따른 기대감도 상승 중이었다.
생각나무에서 긍정적 신호를 보내자, 일주일 뒤에 무기정밀화학에서 기조실장과 변호사 등 세 사람이 생각나무를 다시 방문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소개하고 100페이지에 가까운 두툼한 제안서를 제시했다. 두께를 보면 사전에 상당히 치밀하게 고민하고 작성한 흔적이 보였다. 생각나무에서는 기획팀장과 고민정 팀장, 서미연 과장이 동석했다. 김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희가 방문해도 되는데, 이렇게 저희 회사까지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번에 오신 강전무님 말씀을 듣고 저희 대표님과도 상의를 드렸습니다. 그전에 저희 사내 카페 커피가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한 모금씩 드시면서 얘기를 나누시죠.”
기조실장이 감사의 목례를 보이며, 커피 잔을 들었다. 커피에 나름 조예가 있는 듯 먼저 향을 음미하고 천천히 한 모금을 마셨다.
“오~ 원두 자체가 훌륭한데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고급 원두를 사용하신 거 아닌가요? 예가체프 같은 에디오피아 고산지대 커피 하나랑 하나 더... 초콜릿 잔향이 있는 걸 보면... 바디감 좋은 케냐 쪽 원두가 블렌딩 된 게 아닐까 합니다.”
커피애호가에다 바리스타 자격이 있는 서미연 과장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한번 맛을 보시고 거의 정확하게 말씀하시네요. 실제로 이 원두는 산미가 강한 원두와 바디가 좋은 원두 두 개를 블렌딩 했다고 들었거든요. 와인으로 치면 쉬라즈 품종과 말벡 두 가지를 섞어서 만든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하하하...”
본격적인 협의 전에 커피를 화제로 떠올리면서 양측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양측은 구매자와 판매자 입장이면서도 부탁하는 자와 들어주는 자의 역할이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서로가 갑과 을의 관계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서과장은 크래커 두 종류를 내놓으며 커피의 풍미가 좋아질 거라며 먹어보기를 권했다. 다들 크래커를 커피에 찍어먹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바른생활맨으로 보이는 기조실장이 크래커를 커피에 적시며 말했다.
“역시나 회사 분위기가 좋은데요. 저희 조직이랑은 큰 차이가 있네요. 아무래도 방위산업체다 보니까 남성들이 많기도 하고, 또.... 군 출신들이 많아서 경직되어 있거든요. 업무마다 보안사항들이 많아서 이렇게 화사한 회의실에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힘듭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허허허...”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김도윤 팀장이 한마디를 보탰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 회사는 아무래도 연구 중심의 수평조직이다 보니까... 최대한 개인의 자율성과 팀원들 간의 밸런스도 존중하고 있습니다. 가족적인 분위기가 말뿐이 아니고 생활 자체에서 우러나오게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카페와 구내식당에 상당히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답니다. 조금 있다 회의 끝나고 여유 있으시면 저희 식당에서 점심 드시고 가시죠? ‘매일 점심은 집밥으로’가 저희 회사 모토거든요. 아마 오늘 메뉴는 해물순두부와 오색 나물 비빔밥입니다.”
기조실장은 점심 제안이 맘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온 변호사를 바라봤다. 변호사는 노트북을 펼치며 자신들이 가져온 제안서를 요약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 보시는 자료는 저번에 강전무님이 주신 기획서를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만든 겁니다. 분량이 많다 보니,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회사는... ”
변호사는 능숙하게 100여 쪽에 이르는 제안서를 30여 분에 걸쳐 간명하게 설명했다. 업체가 제시하는 주요 골자는 ‘강군육성을 위한 용감한 군인을 만든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군인정신은 첨단무기가 주된 현대전에 있어서도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게 취지였다. 전군에 스마트폰 사용이 자유롭고, 각 군의 병영에도 전산시스템이 완비되어 있어서... 생각나무의 씨앗을 심는 작업이 어렵지 않을 거라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관건은 생각나무의 노하우에 자신들이 바라는 여러 조건을 어떻게 결합시키는가가 중요할 거라고 했다.
“저희 회사가 바라는 필요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군인정신의 규범적 기준은 무기정밀화학이 제시한다. 둘째는 제품 개발과정에 저희 쪽 연구자들이 협업의 의미로 참여한다. 셋째는 양측의 계약 및 개발 관련 사항은 국가기밀사항이므로 보안유지에 협력한다. 이 세 가지에 대해서 검토해 보시고 조속한 시일 내에 답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팀장은 고팀장과 한과장을 한번 쳐다보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 조건을 일반적인 요구사항 정도로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서로 그런 심정의 교감이었다. 차분히 대화를 지켜보던 고민정 팀장이 말문을 열었다.
“변호사님, 말씀하신 조건들은 계약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다만, 첫 번째로 제시한 규범적 기준이 법이나 사회상규에 위반되거나 저희 회사의 업무방침에 위배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이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변호사는 기조실장을 바라보면서 고팀장에게 답변했다.
“네 당연히 저희가 내세운 기준이 현행법이나 일반 법원칙에 위배하거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생각나무의 내부 업무기준에 저촉되는 기준도 제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군인이라는 특성상 더 강화된 기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저희 쪽의 입장을 말씀드린 겁니다. 일반사회와 군대의 도덕적 기준이나 행위기준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에요.”
변호사의 말은 최대한 둥글어서 반박하기 어려웠다. 고팀장 또한 같은 변호사 입장에서 달리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수긍하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국내 최대 로펌에서 근무한 경험이 특유의 촉을 발했다.
“그렇다면, 변호사님 혹시 첫 번째 조건에 관해서 계약사항에 특약으로 명시하는 건 어떨까요? 계약해지 사유 중 하나로요. 그리고 또 하나. 두 번째 참여문제인데요. 저희도 회사 기밀유지 차원에서 제품 개발에 관한 원천적 기술에 관한 사항은 서로 공유하기 힘들 거 같습니다. 물론, 개발 내용의 질적인 면에서 대해서는 충분히 상의하고 개발절차 측면의 협업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저희 생각나무의 내부 업무기준이나 보안사항에 대해서는 서면으로 답변드리겠습니다.”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기조실장이 변호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 또한 자신의 노트북에 해당사항을 메모하며 고팀장의 의견에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점심을 어디서 먹을까 하는 주제로 전환됐다. 양측은 생각나무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사전협의를 마무리 지었다.
이틀 뒤 저녁, 공중파 뉴스에서 국방부 대변인의 발표가 있었다.
“우리 군인 남북 분단이라는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고 국가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새로운 병영 만들기 프로젝트에 돌입하였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안은 강한 군인 만들기로, 이는 군인정신을 고취시켜.... 임전무퇴의 군인정신은 강군 육성이라는 신정부의 방침을 준수하고.... 대통령실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국회에 협조를 요청할 예정.... ”
생각나무의 기획팀은 삼겹살을 좋아하는 막내 직원의 요청에 의해 삼성동 먹자골목의 고기 집에서 회식 중이었다. 잠시 인터넷을 살펴보던 서미연 과장이 깜짝 놀란 듯 기획팀장과 안대표에게 국방부의 발표를 얘기했다.
안대표는 가능하면 부서 회식에 참여하는 편이었다. 회사 규모가 적당하기도 하거니와, 여느 회사의 대표들과 달리 꼰대정신이 전무한 캐릭터라서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했다. 회식비 계산은 물론 폭탄주와 하이볼을 잘 말아서 직원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술을 못하는 직원들에게는 무알콜 칵테일까지 제공했다. 회식할 때 업무이야기를 안 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뉴스를 보고는 다들 한 마디씩 했다.
“무기정밀화학의 일처리가 상당히 신속한데요. 벌써 국방부에 보고가 됐다는 것은...”
“아! 국방부에서 방위산업체에 용역을 준 사안인가 보네요...”
“이렇게 빨리 진행되는 걸 보면 미리 사전에 얘기가 다 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런 사안은 중장기적으로 신중한 프로젝트가 되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다들 눈을 맞추며 한 마디씩 했다. 안대표도 고기를 구우면서 직원들이 오가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까요. 빨리 진행되면 우리 회사야 좋겠지만. 국방이나 안보에 관련된 사안은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바람직하겠죠. 지금 발표를 보면 우리와의 계약을 전제로 하고 이미 계획 자체가 예정되어 있었다는 느낌이 드네요....”
눈치 빠른 김팀장이 분위기가 업무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한마디를 던졌다.
“자, 여러분. 이렇게 얇은 삼겹살은 금방 익어서... 잠깐만 한눈팔면 다 타버립니다. 떠난 버스와 타버린 고기는 절대로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잔에 술이나 음료수를 채워서 편하게 건배 한번 하겠습니다. 늘 그렇듯이 우리 회사는 폭탄사나 건배사 그런 거 없습니다. 아무나 합니다. 그럼 제가 먼저... 우리 가장 젊은 날을 위하여 건배!!”
직원들이 잔을 높이 들었다. 다들 큰 계약 건이 성사되어서 다소 흥분된 상태여서 상기된 표정이었다. 참기름 향이 강한 파무침과 잘 익은 백김치에 싸 먹는 삼겹살을 이길 음식은 떠올리기 어려웠다. 다들 크게 쌈을 싸서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역시 고기는 안대표와 고팀장이 각 테이블에서 열심히 굽고 있었다. 생각나무 회식에서 막내들은 가위와 집게를 들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주로 팀장들이 고기를 구웠고 술을 말았다.
직급이나 나이에 크게 상관하지 않고 편하게 대화하는 회사 분위기가 회식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서로 옆자리 앞자리 사람들과 건배하고 다양한 주제를 얘기했다. 최근 배운 로드자전거 주행법, 탁구 부수 올리기, 통기타 줄 교체하는 법, 삼겹살 김치찜 맛있게 하는 법, 집에서 상추와 부추 기르기까지 생활 속의 대화들이 식탁을 오갔다.
그러다가도 채근담이나 노자의 도덕경, 성경과 명상서에 들어있는 갖가지 문장들에 대해서 진지한 논의도 오갔다. 알고 보면 회식 자리가 평소 사무실에서 못하고 있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자리도 되었다. 누군가 음악에 대한 주제를 꺼내면 음악가의 계보와 작품들에 대한 평가가 이어졌다. 다들 인문학적 지식과 관심이 뛰어나서인지 대화의 수준이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평소의 대화에서도 생각지도 못한 영감을 얻어진다는 게 이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웃으며 얘기하다가도 수시로 메모앱을 열어서 뭔가를 간단하게 기록하는 이들도 있었다.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직원들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안대표의 표정에 흐뭇한 기색이 넘쳐흘렀다. 테이블마다 열띤 분위기를 보고서는 자신이 만든 회사가 빠른 성장을 하고 누군가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안대표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옆자리에 있는 고민정 팀장이 툭하며 어깨를 쳤다.
평소에도 술이면 술, 음식이면 음식 가리지 않고 좋아하고 얘기하는 활달한 성격의 고민정은 오늘따라 한층 볼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긴 생머리를 오늘은 하나로 묶어서인지 여성미가 물씬 풍겨났다. 말괄량이처럼 보이던 이가 갑자기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였다. 안대표 또한 그런 기미를 느꼈는지 쑥스럽게 잔 두 개를 모았다. 소주를 따르고 천천히 맥주는 붓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최대한 거품을 많이 나게 해서 숟가락으로 섞지 않고서도 충분히 밸런스가 어우러진 소맥이 완성되었다. 상표가 서로 다른 한잔을 고팀장에게 내밀며 건배를 했다.
“아니, 대표님 이거 소맥 맞아요... 너무 달콤하잖아요.... 하하하.”
하하 호호하는 두 사람의 눈꼴사나운 대화를 듣고 있던 직원들이 야유를 보냈다. ‘우~~. 지금 신성한 식당에서 뭐 하는 겁니까! 회식도 업무공간의 연장인데 공적인 자리에서 그런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도 됩니까! 달콤한 두 사람만 따로 나가셔도 됩니다. 혹시나 말인데 두 분이서 연애하시는 건 아니시죠?’까지 애정 어린 불평불만이 허공을 오갔다.
직원들의 뜻밖의 반응에 당황한 안대표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허 무슨 소립니까? 연애라니요! 민정 팀장님은 모태 솔로를 주구장창 부르짖는 페미니스트인데.... 워커홀릭에다 공붓벌레에 무슨 시인이기도 하고... 또, 남자 보기를 돌처럼 여긴다는 소문도 있고요.. 허허허.”
안대표의 얘기를 듣고서는 고민정은 눈을 흘기며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아니 대표님, 무슨 서운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워커홀릭이라고요. 베짱이 프로젝트를 벌써 잊으셨어요! 저는요, 일은 재미있어서 하는 거고, 공부는 취미에 맞으니까 하는 건데요. 시험은 어떻게 하다 보니까 로스쿨 가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건데.... 그리고 제가 남자 보기를 돌같이 여기는지 어떻게 아세요... 혹시 저를 질투하시는 거예요?”
두 사람의 티격태격을 한참 지켜보던 김도윤 팀장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날리며 한마디 했다.
“두 분이서 자기 자랑을 하시면 하룻밤도 부족할 겁니다. 뇌과학자이자 심리학 박사에 컴퓨터공학자이면서 고전에 능통하신 분과 로스쿨 변호사에 최고 로펌에 근무하신 두 분이서 무슨 불만을 그렇게 하시나요? 좌우를 한번 봐보세요. 우리 팀원들이 어떤 표정들인지, 다들 재수 없어... 똭 그런 표정이잖아요. 하하하.”
여러 테이블에서 기획팀원들이 두 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안대표와 고민정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얼굴을 붉혔다. 저쪽 테이블에서 누군가 술잔을 들고 외쳤다. 건배구호는 ‘아! 정말 재수 없어....’, 그들의 웃음소리가 창밖으로 흘러나왔고 골목의 저녁은 그렇게 검붉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