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1월 어느 날 저녁 교문이 열린다. 많은 학생이 뛰어나간다. 그중 한 남학생은 천천히 걸어간다. 보온 도시락을 들고 있는 손이 시리다. 이미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시험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긴장이 풀렸다.
음악 CD를 사기 위해 한 가게에 들렀다. 그날 발매된 가수 김정민 3집 앨범을 사기 위해서다. 그동안 부모님께 받은 용돈을 조금씩 모아 CD를 샀다. 집에 오자마자 타이틀곡 <슬픈 언약식>을 듣는다. 애처로운 멜로디가 안 그래도 추운 내 마음을 적신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봤던 내 이야기다. 학력고사에서 19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대학 입시 제도가 바뀌었다. 초반 200점 만점에서 내가 보는 1996년 97년도 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부터 400점 만점으로 변경되었다. 그해 수능의 난이도는 극강이었다. 아마 지금도 희자되는 중이다. 400점 만점에 165점 이상이면 전국 4년제 대학 지원이 가능할 정도였다.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 모르게 가채점했다. 아무래도 2교시 수리영역, 즉 수학 시험 점수가 특히 나빴다. 아무래도 답안지를 밀려 쓴 느낌이다. 수학을 잘하지도 못했지만, 특히 수능 수리영역은 나에게 아킬레스건이었다. 문과 체질인 내가 이과를 선택하여 미적분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모의고사보다 점수가 더 좋지 않았다. 시험 다음 날부터 땅만 보고 다녔다. 추운 늦가을 날씨만큼 내 마음도 추웠다.
한 달이 지나 진짜 성적표를 받았다. 예상대로였다. 모의고사보다 본 시험에서 백분율로 5% 이하나 떨어졌다. 성적표를 본 아버지는 무조건 재수를 권했지만, 똑같은 공부를 다시 하기 싫었던 나는 거절했다. 반항의 표시였다. 그 시절 아버지와 참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점수에 맞춰 대학에 진학했다. 전공을 살려 30년 넘게 지금까지 달려왔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흥미가 있었다. 혼자 책 읽고 어떤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초등학교 시절에 반에서 1,2등을 놓치지 않다보니 부모님의 기대도 컸다. 특히 아버지는 무조건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좋은 직장을 다닐 수 있다고 수도 없이 강조했다.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랐다. 하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마흔 전까지 여러 회사를 전전했다. 실제로 사회에 나와 보니 학창 시절 공부 잘했다고 다 성공하지 않는다. 나만 봐도 그렇다. 알만한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공기업 등을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작은 설계회사에서 박봉에 매일 야근에 찌들어 살았다. 그 작은 월급조차 몇 달 밀리는 경험도 했다. 화려했던 과거 명성에 비해 초라해진 나를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나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더 차이가 뚜렷하다. 나와 같이 수능을 망쳤던 한 친구는 다시 재수해서 명문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대기업에서 구조조정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 전에 통화하다 들었다. 또 한 친구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지금은 어엿한 사업체 몇 개를 가지고 운영한다. 집이 잘살지 못했는데, 본인이 직장 대신 여러 사업 경험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다.
몇 번 언급했듯이 학교에서 아무리 날고 긴다는 학생도 졸업하면 다시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수능 시험을 잘 보면 금상첨화지만, 그 반대가 되면 설상가상이다. ‘몇 개 틀렸느냐?’, ‘총 점수가 300점을 넘느냐 또는 넘지 않느냐? 등의 질문은 상당히 민감하다. 단지 수험생의 컨디션에 따라 시험을 잘 보느냐 못 보느냐가 판가름 된다. 그 점수 하나가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사실에 좀 서글펐다.
수능을 망쳤다고 해서 울지 말자! 극단적인 선택은 더 하면 되지 않는다. 수능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 시험을 보는 수강생이 그냥 기출문제만 달달 외우다 보니 잘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찍기 바쁘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가봐야 한다. 이제 막 20대 초반이 되는 여러분도 수능 성적도 중요하지만, 내 인생 전체로 생각하면 아주 작은 티끌과 같다. 시험 성적으로 인생이 나뉘는 것도 받아들이자. 공부 못하고 시험 망쳐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질이 달라진다. 학교 성적과 사회 성적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
오늘 시험 본 모든 수험생들! 수고하셨습니다. 시험 잘 못 봐도 괜찮아요. 시간이 지나면 여러분에게 맞는 근사한 인생은 꼭 찾아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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