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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너무 말라서..

내 생애 첫.....

by 황상열


어린시절 방학이 되면 아버지의 고향에 내려가곤 했다. 아버지가 어릴 때 살던 곳으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홀로 서울에 유학을 오셨던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혼자 자취하신 걸로 알고 있다. 그 당시 시골 큰집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내외와 사촌들이 살고 있었다. 여름에 내려가면 개울가에서 고기 잡으며 수영하고,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은 논밭 위에서 썰매나 스케이트를 타고 놀았다.

열심히 뛰어놀고 큰집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나는 항상 할아버지가 계신 사랑방에서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손녀 중에도 서울에서 오는 나를 유독 많이 예뻐했다. 아마도 자주 보지 못하는 게 가장 큰 이유라고 짐작이 된다. 용돈도 정말 두둑히 주시고, 잘때도 항상 나를 안고 주무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추운 겨울 어느날 사촌형들을 따라 엄청 뛰어놀다가 집에 들어왔다. 겨울은 해가 금방 떨어져 어두워진다. 가로등 불빛 하나 보이지 않던 시절이라 보이는 것은 칠흑같은 어둠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가끔 불하나 켜져 있는 집이 저멀리 보일 뿐이다. 밖에 나가는 것도 무서웠다. 그날따라 너무 피곤했는지 밥도 먹는둥 마는둥 하고 사랑방에서 바로 잠들어버렸다.


자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 잠이 깼다. 눈을 떠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일어나려고 했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양옆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대자로 코까지 골며 자고 있는 중이다. 밀어내고 일어나려고 해도 힘에 부쳐 어쩔 수 없었다. 도저히 목마름을 참을 수 없어 주변으로 손을 뻗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주전자 같은 게 잡혔다.


들어보니 무엇인가 차 있었다. 어떻게든 힘을 내어 몸을 비틀어서 일어난 다음 그 주전자를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정말 목이 말랐는지 한참을 들고 마신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마시니 해소가 된 것 같았다. 시원하고 개운한 마음에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누워 잠들었다.


“야! 일어나! 일어나..”

누가 부르는 소리에 일어난다. 사촌형과 아버지다. 일어났는데 머리가 아프다.

“어제 정말 피곤했나 보구나. 12시간을 넘게 자다니. 지금 벌써 점심 먹을 때 되었어. 밥먹어라.”

(내가 그렇게 오래 잤다구요?)

“네.. 근데 왜 이리 머리가 아프지?”

“상열이 너 혹시 어제 주전자에 있는 거 마셨니?”

“네. 자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요. 그런데 사랑방이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아 손에 잡혀서 마셨어요.”

“그거 물인줄 알고 마셨니?”

“네. 물인줄 알고 마셨는데요.”

“그거 물 아닌데..”

“네?”

“할아버지와 삼촌이 막걸리 먹다 남은거 넣어 놓은 건데...”

“네??????”


그랬다. 난 막걸리를 마셨다. 생애 처음으로 술을 마신 것이다. 나이는 10~12살 사이인걸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술을 마시니 당연히 머리가 아프지. 작은 주전자의 반에 해당하는 양을 마셨으니 꽤 마신 듯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저녁까지 심한 두통으로 누워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처음 느꼈던 숙취였다. 그 모습을 본 부모님과 다른 가족들은 웃고만 있다. 그 이후로 아무리 목이 말라도 불을 켜고 제대로 확인하고 물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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