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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보드 차트를 아시나요?

90년대 불법 음반 리어카의 추억

by 황상열


“야! 빨리 뛰어. 늦었다. 수업 시작했다.”


오늘도 친구의 외침에 종각역에서 학원까지 100m 달리기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신나는 겨울방학을 맞았다. 영어회화를 배워보자는 친구의 말에 종로에 있는 큰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일주일동안 3일만 가면 되는 초급반이다. 야심차게 시작하고 2주가 지난 날이다. 한번도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작심삼일이다. 아니 작심일일이다..


딱 하루 가고 친구들을 불러내어 종로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당구도 치고 술도 마시면서 노래방에 가서 한 곡씩 부르기도 했던 20살의 12월은 참으로 즐거웠다. 그래도 매번 빠질 수 없어서 오늘은 기필코 수업에 늦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전날 숙취로 인해 결국 늦고 말았다. 수업에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결국 또 땡땡이쳤다. (아..부모님 학원비를 유흥비로 다써서 이제야 고백하네요. 22년이 지난 지금에야 죄송한 말씀 전합니다...)


“당구나 치러 가자.”


친구의 한마디에 지금도 잘 치지 못하지만 흉내만 낼 줄 아는 당구를 치러 간다. 12월의 오후 종로3가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당구장에 가는 길에 잠깐 서서 리어카에 실려있는 불법 테이프와 CD를 구경한다. 리어카 주인은 테이프 한 개라도 더 팔기 위해 요새 유행하는 가요를 크게 틀어놓는다.


“사나이 가는 길에 기죽지 마라! 없어도 자존심만 지키며~...”


젝스키스의 “사나이 가는길(폼생폼사)”가 흘러나온다. 같이 따라부르는 나를 친구가 그만가자고 부추긴다. 조금만 더 구경하다 가자고 다시 친구를 붙잡는다. 결국 최신가요 테이프를 하나 샀다. 주머니 사정이 얇은 대학생 입장에서 소위 “길보드 차트”라 불리우고, 각 가수들의 최신 타이틀곡만 모아놓은데다 가격까지 저렴한 이 불법 테이프는 인기만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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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의 문제로 단속이 심해져서 2000년 초중반부터 사라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시절 종로나 강남역에 가면 거리마다 해적판 음악 테이프를 실은 리어카가 곳곳에 있었다. 거기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흥얼거리기도 하고, 시끄럽다고 귀를 막기도 했다.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I don’t want a lot for Christmas..”


1997년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어린시절 친구들과 강남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강남역에 내려 약속장소로 가는 길에 어느 리어카에서 머라이어 캐리의 캐롤송이 크게 들린다. 날씨가 추운지 팔짱을 끼고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연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당시 짝이 없던 나는 부러운 마음을 숨기고 친구들이 기다리는 술집까지 뛰어갔다. 그날따라 유난히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귓가에 맴돌았다.


지난 일요일 이은대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늘 지나는 휴대폰 가게에서 젝스키스의 “사나이 가는길(폼생폼사)”가 흘러나온다. 22년전 길보드 차트에서 듣는 기분이 든다. 오랜만에 같이 한번 따라 불러본다. 아직도 마음은 그 시절에 머물러있는데, 시간은 정말 빨리 흐른다. 올 겨울만큼은 나만의 길보드 차트를 모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쉬는 날 하루종일 틀어놓고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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