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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상열 Aug 10. 2020

구겨진 지폐


7월 마지막 날 오랜만에 부모님과 여동생 내외가 있는 광명 본가에 다녀왔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 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막내 아들의 생일과 어머니의 생신도 같이 축하하기 위해 온가족이 모였다. 이제는 흰머리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부모님의 얼굴을 볼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각자 마시고 싶은 술과 음료수로 잔을 채운다. 서로 건강하고 즐겁게 살자고 외치며 건배한다. 손자들의 재롱을 보는 아버지의 미소가 내 눈에 포착된다. 식사를 마치고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시려고 지갑에서 구깃구깃한 지폐 여러 장을 꺼낸다. 그 모습을 보니 사춘기 시절의 한 기억이 떠오른다.   

  


90년대 중반에 한창 농구가 열풍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새로 나온 한정판 농구화가 가지고 싶었다. 내가 가지고 싶다고 하는 물건은 웬만하면 부모님이 다 사주신 편이다. 하지만 그 농구화가 생각보다 값이 나가다 보니 어머니에게 사달라고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사야겠다는 생각도 못한 철없는 시절이었다. 혼자 공부하다 끙끙대고 그 한정판 신발을 신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다.   

  

사춘기 시절 아버지와 거의 대화가 없었다. 6학년 시절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서울에 있는 학교로 예기치 않은 전학을 갔다. 그 일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커졌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대들기 일쑤였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늦게 집에 돌아온 어느 날 그가 나를 부른다. 다녀왔습니다 라고 인사만 하고 지나가려는데, 잠깐 있어보라고 한다.     


아버지는 뒷주머니에서 오래된 지갑에서 구겨진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그리고 내 손에 그걸 쥐어주셨다. 공부하는데 피곤할테니 쓸 때 쓰라고. 그걸 받고 담담하게 고맙습니다 라고 짧게 대답하고 내 방으로 갔다.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참 못나고 나쁜 아들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그 기억을 떠올려보니 늘 허름한 양복과 구두에 오래된 시계를 차고 출퇴근 하던 아버지였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땀흘려 일하고 돈을 벌었지만, 정작 자신에게 쓴 적은 별로 없던 그다. 한정판 농구화를 사기엔 조금 모자란 돈이지만, 그날 아버지가 주신 구겨진 지폐와 모아놓은 용돈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는 아버지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금방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느라 아무도 보지 못했다. 평생동안 남을 위해 헌신하고 주는 삶으로 사셨던 그에게 나는 여전히 불효자다. 앞으로 내가 구겨진 지폐 대신 새롭고 빳빳한 돈으로 아버지에게 아낌없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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