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나면 누구나 이행해야 하는 국방의 의무!
(몸이 아프거나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못 가는 사람들을 제외!이상한 이유로 안 가는 연예인들은 나쁘다!)
나는 원래 1998년 대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육군으로 입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동창이 공군에 입대하는 것을 보고 나도 입대를 미루고 공군에 지원하게 되었다. 사실 미루게 된 또다른 이유는 2학기때 과대표를 맡게 되어 한학기를 강제로 더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2학년 2학기를 다니면서 동기들은 하나둘씩 군대에 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렇게 입대했던 내 동기들이 백일휴가를 나와서 같이 놀다가 들어가는 것도 보았다. 나는 1999년 5월 31일에 22살 나이로 늦게 입대하게 되었다. 훈련소로 들어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연평해전이 터졌다. 훈련소에 듣기로 아직 계급이 없는 훈련병은 전쟁이 나면 총알받이로 무작정 차출된다는 이야기에 정말 밤잠 못자고 긴장했다.
연평해전으로 남북한 관계가 악화일로였다. 밖의 뉴스는 들을 수 없는 훈련병 위치라 밖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그러니 그 긴장감과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루에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자려고 누웠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고 잤다. 그렇게 연평해전이 지나가고 나는 방공포병 특기를 부여받았다. 공군내 포병 특기는 육군에 가는 것이라 할 정도로 기피대상였는데, 먼저 간 친구가 포병특기는 나중에 상병 진급하면 편하다는 이야기에 덜컥 먼저 지원했다. 방공포병과 헌병은 지원만 하면 바로 된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는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대구에 있는 방공포병학교에서 육군 친구들과 같이 후반기 교육을 받고, 청주 비행단으로 자대배치를 받게 되었다.
자대에 가려고 더블백을 메고 기차에 앉았을때는 참 무서웠다. 훈련시절에는 동기들이라 그래도 편하게 지냈는데, 자대에 가면 고참들과 생활을 해야 하니 어떤 사람을 만날지 무서웠다. 군대나 사회나 처음 들어갈 때 그 느낌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설레지만 긴장되는 게 더 많으니 말이다.
나는 포병 중 발칸포 담당으로 작은 소대에 가게 되었다. 소대에는 병장 1명, 상병3명, 일병 1명이 내무반을 쓰고 있었다. 처음 내무실에 들어갔을 때 그 긴장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주 얼굴이 얼어서 고참이 자기 소개를 하라고 했을때도 말을 더듬고 식은땀이 날 정도니 말이다. 이제 작대기 하나 달고 신병이 왔으니 소대는 난리가 났다. 첫날은 초코파이를 사서 배가 터질때까지 먹었다. 일주일은 정말 고참들이 잘해주셨다. 딱 한명만 빼고...
바로 위 맞고참 일병은 나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었다. 말수도 없고, 딱 일할때만 명령하면서 못하면 끌고가서 엄청 갈구었다.
그러다 내무반장인 병장이 나를 불렀다. 요새 너무 잘해주니 편하냐고 물어본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내가 너를 불편하게 했다 이거네! 저기 보이는 철문 찍고와!”
발칸포 소대는 앞에 철문이 있다. 내리막길로 50m는 떨어져 있다. 거기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을 10회 반복했다. 스피드가 떨어지면 다시 몇 번을 반복했다. 그렇게 30회를 왔다갔다하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횟수가 늘어갈수록 점점 더 정신은 흐릿하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번 쓰러져서 일어나니 내무실 안이었다. 그렇게 신병생활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