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무기력할 때가 있습니다. 보통 아무 이유 없이 그렇다고 하지만, 잘 따져 보면 이유 없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저의 경우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몇 번 하게 되면 무기력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거기에 요즘처럼 흐리고 비 오는 날이 계속되면 쉽게 무기력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감.... 이것이 만들어 낸 결과가 '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목보다 부제가 훨씬 길고, 눈의 띄는 [책방 주인]은 좀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묘한 것이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데, 최근에는 '참 별 것 없군'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막상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뭔가 책의 핵심에 다가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책을 찾는 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렇게 가정을 하고 책을 읽는 사람을 바라보면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문득 문제에 대해서 답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살아가는 일을 좀 단순화시키면 문제를 만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 아닐까? 그러다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를 만난다면?
사실 해답이란 게 농담 같은 것입니다.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 '42'가 답이야 라고 말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책에서는 다음 농담이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답을 구하기 위해 제대로 된 질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애당초 맞고 틀리고는 부차적인 문제인 거죠. 우리에게는 해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신'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신의 존재가 농담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신'은 굉장히 강력하고 효율적인 답입니다. 그럴싸한 믿는 구석이 되는 거죠.
[나는 농담이다]는 신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농담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만 묘하게 같이 읽는 다른 책들에 의해서 이렇게 완성이 되었습니다.
보통 무신론자라고 하면 신을 믿냐, 안 믿냐로 구분하지만, 무신론자라고 신을 안 믿는 것은 아닙니다. 신은 존재하죠. 단어가 존재하니까요. 신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대상이 아닐 뿐이니까요. 무신론자는 그저 신을 해답으로 보지 않을 뿐입니다. 신은 농담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종교는 좀 다르죠. 언젠가 잡지에서 '학교'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그 기원이 종교라는 것을 보고는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찾아보니 학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약간 과장하면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세세한 과정들이 종교에 의해서 규정되고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면 무서워지기까지 합니다.
신은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종교는 피할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어디선가 과학자들은 결국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는 말을 읽은 것도 같습니다. 그런 거죠... 상상을 해보면, 해답을 찾아보겠다고 파고 또 팠더니 결국 알 수 없다는 절망감... 그런 상황에서 신의 존재는 얼마나 크게 다가올까... 테드 창의 작품들 속에서도 신의 존재는 피할 수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주는 의미는 그리 간단치 않게 느껴집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해답으로 만들어 놓았더니, 그다음엔 알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