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잖아. 어디든 가보자.
오늘도 우연히 이곳에 당도하신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마지막 이야기가 될 대단원 전, 4악장의 마무리입니다. 음악 이야기를 쭉 풀어보면서 즐거운 일이 많았던 것 같아요. 새로운 음악을 접하기도 하고 잊고 지냈던 음악을 다시 꺼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테마는 여행으로 잡았어요. 지금의 폭우가 끝나면 폭염이 기다리는 여름이지만, 가끔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새로운 행복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은 여행에 좋은 조미료가 되기도 하죠.
여름휴가를 기다리면서, 오늘 이야기를 통해 미리 휴가를 가는 상상을 같이 해보시죠!
#여행이라는 전시관
https://youtu.be/zeIzK9QWnK4?si=JBBIBcUG-8IPNj1g
제가 낯선 도시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입니다. 지도도 없이, 목적지도 없이, 다만 낯선 풍경 속에 스며들 듯 걷습니다. 도로 옆으로 늘어선 나무와 익숙하지 않은 간판, 가게 앞을 서성이던 고양이, 들려오는 낯선 언어들. 이방인의 눈엔 모든 것이 생경하면서도 반짝입니다. 그 찰나의 시간, 마음속 어딘가에 음악 하나가 스며듭니다.
무소르그스키의 Pictures at an Exhibition은 그런 순간에 떠오릅니다. 이 곡은 러시아의 작곡가 무소르그스키가 친구였던 화가, 빅토르 하르트만의 그림들을 떠올리며 작곡한 피아노 모음곡입니다. 하르트만의 유작 전시회를 다녀온 후, 그 그림들을 회상하며 곡을 만들었죠. 각각의 악장은 그림 한 점을 떠올리게 하고, 그 사이사이 흐르는 ‘프롬나드(Promenade)’는 관람객이 전시관을 걸으며 다음 그림 앞으로 이동하는 장면을 그립니다.
저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전시관이 아닌 어느 도시의 거리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 도시가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프라하의 언덕일 수도 있고, 아오모리의 시장일 수도 있죠.
그보다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떠남이란 결국 외부의 풍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바꾸는 일이니까요.
첫 번째 프롬나드가 울리면, 조용히 문이 열립니다.
천천히 전시관 안으로 발을 들이듯, 혹은 도시의 첫 이정표 앞에 멈춰 서듯 말이죠.
그 뒤를 따라 나타나는 ‘난쟁이’(Gnomus)의 불안정하고 일그러진 리듬은 낯선 장소에서 처음 마주하는 혼란스러움을 닮았습니다. 마치 외국의 지하철에서 방향을 잘못 탔다는 걸 깨달았을 때처럼요. 혼란은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일의 시작을 알리기도 하죠.
‘옛 성’(Vecchio castello) 앞에 다다르면, 오래된 돌담 사이로 빛이 드리웁니다. 리코더처럼 애잔한 선율이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지죠. 그 공간은 누군가의 추억으로 가득한 장소일지도 모릅니다.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오래된 골목길처럼요. 그곳을 걷다 보면 내 안에 묻어뒀던 옛 감정들이 하나둘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껍질 붙은 햇병아리들의 발레’(Ballet des poussins dans leur coques)와 같은 유쾌한 장면에선 마치 관광객으로 가득한 마을 축제를 찾은 듯 들뜨고, ‘리모주의 장터’(Limoges. Le marché)에선 활기 넘치는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상인들의 발걸음을 느낍니다.
한 곡, 한 곡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작은 세계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키이우의 대문’(Le grande porte de Kiev)이 웅장하게 열릴 때.
천천히 쌓아 올린 선율이 마침내 절정을 향해 터져 나올 때. 그건 여행의 끝에서 마주하는 어떤 감정입니다. 떠나기 전엔 몰랐던 마음, 여행이 끝날 즈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생각나는 풍경, 두고 온 누군가의 미소,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나 자신까지.
저는 때때로 이 곡을 들으며 여행을 떠납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음악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 천천히, 나만의 보폭으로 걷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걷는 동안, 제 마음속 작은 전시관에는 새로운 그림이 하나씩 걸립니다.
언젠가 누군가 그 전시관을 찾아와, 이 음악처럼 천천히 감상해 줄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며.
#마지막 여행
https://youtu.be/4M926oUnni0?si=cuBwe2RChap9u0_4
록이 이번 주 주제를 던져주자마자 바로 이 노래가 뇌리에 스쳤습니다. 전 지금 길고 길었던 여행의 막바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군생활이죠.. 무려 올해 9월 초 전역입니다 하하.
귄록루역에서 가이드 일을 시작한 게 아마 올해 2월 말이었을 겁니다. 군대 안에 있는 저와 역에게 글 한 번 써보자며 록에게 연락이 온 걸 시작으로, 매주 다양한 장르의 곡과 다양한 아티스트들을 여러분께 소개해드렸습니다. 이번 글은 21주 차가 되겠네요.
군필자들은 아실 겁니다. 휴가를 나가서 다니던 학교에 가보면 모든 게 그대롭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풍경은 낯섭니다. 물론 반가운 감정도 듭니다. 하지만 캠퍼스의 주인공은 더 이상 제가 아닌, 파릇파릇한 신입생들과 갓 복학한 선배님들이라는 걸 깨달을 때쯤엔 왠지 모를 소외감과 복잡한 감정들이 밀려옵니다. 제 소속은 꽤 오래전부터 국방부였으니까요.
가뜩이나 내향인인 저는, 캠퍼스를 걸어 다닐 때면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모자를 써서 숨겨봐도 모두가 저의 까까머리를 쳐다보는 것 같고,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숨길 수 없는 K2소총의 화약냄새는 저를 더욱 위축되게 합니다.
하지만 막상 사람들을 만날 때면 위화감은 없어집니다. 먼저 저와 같은 길을 걸었던 형들이 진심으로 반겨주고, 학교에 다니는 동기들은 고생한다며 술자리에 나와주죠. 마치 어제 만났던 사이처럼요. 밥이나 커피, 술자리를 같이 하며 서로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어냅니다. 각자의 배낭엔 갖가지 이야기들이 들어있습니다.
복귀날이 되면 보고 싶었던 부모님, 친구들, 대학동기들, 선후배들을 뒤로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여행길에 오릅니다. 전역날은 죽어도 안 오면서 복귀날은 왜 이리 빨리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전 이제 곧 집에 가니까요 으하하.
이 글이 업로드되는 날이면 44일이 남겠네요. 다시 제가 좋아하는, 저를 좋아하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전역 전까지 휴가가 두 번 남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제 여행의 마지막 이야기를 써 내려가보려 합니다. 전역날, 역에서 내려 집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잔뜩 부푼 마음과 함께 가져갈 이야기들을 말이에요.
그날 제 배낭엔 지난 549일의 이야기들이 들어있을 겁니다.
#밤하늘을 바라볼 여유, 침묵을 곁들인
이번 여름휴가는 시골로 떠납니다. 2박 3일 동안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다시 앞으로 가기 위해 어느 시골에 잠시 머무를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 휴가는 각자의 위치에서 글로만 만나던 2025년에 처음으로 귄록루역 4명이 모이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행이라는 주제에 맞춰서 제가 가져온 노래는 아마도 3일 동안 가장 많이 들을 것 같은 앨범, 쏜애플의 3집 <계몽>의 타이틀곡 중 하나인 '은하'입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4명이 떠나는 촌캉스에서 음악이 빠질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대학 생활을 보내던 그 시절과 다를 것 없이 각자 좋아하는 음악을 번갈아가면서 틀어놓고 그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겁니다. 단지 서로를 만나지 못한 지 반년정도 흘렀고 4명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거의 1년 만이기 때문에 음악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졌을 것 같아요. 3일 동안 주야장천 음악만 듣다가 올 것 같습니다. 물론 술과 맛있는 음식을 곁들인.
언젠가 저희의 이야기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쏜애플의 3집 <계몽>은 아마 넷 모두가 가장 사랑하는 앨범 중 하나일 것입니다. 언젠가 '나는 왜 쏜애플에 빠진 거지?'라는 고찰을 해본 적이 있어요. 폭발적인 무대매너와 짜임새 있는 화성, 한글로 써 내려가는 가사, 신기할 정도로 혁신적인 기타 톤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제가 내린 결론은 '우리와 닮아있다.'였습니다.
정규앨범만 간단히 톺아볼까요. 정규 1집에서 쏜애플은 지독할 정도로 개인의 심연을 건드립니다. 나와 동일시하던 청자에게 '차라리 이대로 죽어달라는' 선고를 내리기도 하고 '높은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짖기도 하죠. 정규 2집에서는 이 세상에서 그저 살아남는 것에 집중합니다. '청춘'을 외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지 말아요'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정규 3집 <계몽>에서는 약간 다른 느낌을 받았어요. 저런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이 날 위로해 주는구나. 어쩌면 이 처절한 내면을 꺼내놓는 행위는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라는 한 줄의 위로구나. 그리고 그 위러의 서사를 닫는 느낌을 주는 곡이 '은하'입니다. 각자의 현생에 지친 상태에서 떠나는 이번 여행에서 밤이 찾아오면 아마 저희는 자연스럽게 모닥불 옆에 앉아서 '은하'를 틀어놓고,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지 않을까요?
'우리가 머무는 우주가 끝날 때까지'
#여행, 그리고 상승
https://youtu.be/1FAO43bMByg?si=AY1UvqEUij7rqFbO
여행을 시작할 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감정은 바로 ’ 상승감‘입니다. 이리저리 치이던, 익숙한 현실의 공간에서 나와, 낯선 미지의 세계로 떠날 때의 그 설레고 해방된 마음을 저는 상승감이라고 표현해요.
여행의 시작에서 항상 그런 상승감을 선물해 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수의 라이브 스타일로 인해 웃긴 밈이 되어버리기도 했지만, 그 찰나의 실소만으로도 충분히 청자를 ’ 상승‘시키는. 오늘의 곡은 김장훈의 “고속도로 로망스”입니다!
사실 이 곡의 원곡은 윤종신이 2001년 발매한 “고속도로 Romance”입니다. 그걸 김장훈이 2004년 좀 더 신나는 리듬과 랩을 추가한 버전으로 리메이크를 한 거고요. 이후에도 여러 가수들이 편곡•커버를 했습니다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김장훈의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노래에 반한 건, 가수 김장훈의 익살스러운 편곡과 처음엔 배를 잡고 웃었을 만큼 우스꽝스러운 라이브 스타일이었어요. 솔직히 일부러 이러나 싶을 만큼 웃기게 부르거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라이브 버전에선 특히나요!ㅋㅋ
하지만, 나에게 상승감을 주는 노래에서 중요한 건 편곡의 완성도나 가창력 따위가 아닙니다. 이 노래를 듣고 내가 얼마나 신나느냐죠. 이 노래의 리듬에 맞추어 몸을 들썩이며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면, 상상만 해도 너무 즐거울 것 같아요.
김장훈은 그런 ’상승‘에 너무나도 특화된 가수입니다. 노래 실력이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지금 시대에, 김장훈이 진지하게 뛰어난 가창력이 장점이 가수냐 하면, 그건 아니죠. 하지만 노래에서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가장 잘 담을 줄 아는 가수라는 의견엔 반박하기 힘드실 걸요.
제 여행에서 필요한 노래는, 바로 그런 노래입니다. 지금 나의 이 신나는 감정에 진심으로 동의해 줄 노래 말이죠.
이번 여름엔 꽤 많은 여행들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임기제 부사관을 준비 중인데요. 혹자가 듣는다면 미쳤다고 할 이 선택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남은 휴가 동안 죽을 각오로 놀아버리려고요. 앞으로의 제 모든 여행에서, 저의 고속도로 로망스가 또 한 번 저를 상승시켜 주길 바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