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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4악장 : 음악 그리고 위스키

음악과 술, 라벨링

by 오록
#레드라벨, 젊음의 맛

https://youtu.be/2 owRMhX3 AT4

요즘 편의점에도 다양한 위스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다양한 위스키를 편하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 찾아오면서 점점 이 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마시고 싶은 술이 생기면 무리 없이 살 수 있지만, 대학 시절 가끔 뭣도 모르면서 멋을 좀 부리고 싶을 때 제가 찾던 술은 편의점을 여전히 지키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스카치위스키 중 하나인 '조니워커 레드라벨', 그것도 200ml짜리 가장 작은 병이에요.

오늘 제가 들고 온 술과 음악은 조니워커 레드라벨과 다섯의 'youth'라는 노래입니다. 다섯의 youth는 말 그대로 청춘을 표현하는 음악이에요. 제 설명보다는 가사를 찬찬히 음미하며 각자의 감상평을 가져보는 것이 이 음악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6분짜리 긴 음악이지만 청춘을 살아가고 계신다면, 혹은 지나버린 청춘을 추억한다면 이 노래는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흡입력 있게 다가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청춘과 조니워커 레드라벨의 가장 큰 공통점이 있어요.
'숙성 연수가 표기되지 않았다.'
조니워커 레드라벨은 어느 정도 술맛을 느끼는 지금 저에겐 말 그대로 맛없는 술일 거예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알코올부즈는 튀고 맵다는 느낌이 올 정도로 정제되지 않은 저가형 위스키입니다. 하지만 숙성되지 않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제되지 않은 이 맛은 제20대 초반과 닮아있다고 생각해요.

레드라벨의 정제되지 않은 느낌을 지닌 철없는 학생이었지만 이 맛을 잡아줄 토닉워터, 탄산수 혹은 온 더락 잔 같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서 지금은 나름 사람 구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청춘과 레드라벨이 무언가를 만나서 정제되는 것은 'youth'에서도 느낄 수 있어요. 정돈되지 않은 기타 톤을 솔리드 한 드럼 그리고 차분한 가사의 보컬이 정제시켜주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마무리할 때는 오랜만에 20대 초반의 철없던 제가 멋 부릴 때 먹던 조니워커 작은 병을 하나 사 와서 잔잔하게 마무리해보려고 해요. 물론 온 더락으로.


#블랙라벨, 섞임의 미학

https://youtu.be/tCMhuN3053o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위스키에 재즈가 아닌 다른 장르의 음악이 붙는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술이란 게, 맛보다는 그 분위기에 더 몰입하게 되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술을 마시면 오히려 공상과 잡념이 사라집니다. 정말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고는 술과 분위기에 오로지 집중하게 됩니다.
오늘은 차분한 위스키 바에 어울릴, 산뜻하고도 진한 재즈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색소포니스트 Stan Getz의 “Desafinado”와 함께요.

‘Desafinado’라는 단어는 포르투갈어로서, ’ 어긋난 음정, 불협화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사노바의 대가, Jobim이 만든 이 멜로디 위의 Gilberto의 목소리와 Getz의 색소폰은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한 음 한 음 완벽한 음정을 노래합니다. 이 곡의 가사에서 ‘Bossa Nova’라는 단어를 처음 등장시켰고, 또 보사노바 리듬을 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만들었죠. 특히 스탄 게츠와 주앙 질베르토가 합작한 앨범인 Getz/Gilberto엔 여러 보사노바 명곡들이 포함되어 있어요. 혼자 술을 마실 때 즐겨 듣는 앨범 플레이리스트입니다.

저에게 술은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술을 일절 해본 적 없으신, 독실한 기독교인 부모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와중에 돌연변이처럼 술을 좋아하게 되었고요. 제가 색소폰으로 군악대에 합격했다는 말을 할머니께 전해드렸을 때, 할머니께서는 ‘제가 할아버지처럼 딴따라가 되는 거 아니냐’라며 장난식이지만 씁쓸한 말투로 걱정하셨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생전 색소폰 연주를 즐기셨고, 상당한 애주가셨다고도 해요. 또한 가정에 충실한 상냥한 아버지는 아니셨다는 말이 저에겐 스탄 게츠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할아버지를, 한 세대를 뛰어넘어 제가 닮은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요.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는 저는 겪어보진 못했지만, 저는 술과 음악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과하면 탈이 되겠지만, 지금 저에겐 쌉쌀한 위스키 한 잔과 재즈는 악착같이 버텨온, 어긋난 음정 같은 하루를 무덤덤하게 위로해 주는 친구일 뿐입니다.


#그린라벨, 감정의 재등장

https://youtu.be/5L8YflD3eh8?si=WC0CUOipqT3BKr2

위스키와 어울리는 노래. 클래식이나 정통재즈 만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두운 방에 작은 주황색 조명을 켜놓고, 온 더락글라스에 담긴 술을 조금씩 들이켜는 겁니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적적하지 않게 머리를 흔들기 위함입니다. 그리곤 평소엔 하지도 않을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존재론적인 사유부터 시작해서, 결국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죠.

최근엔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뭐든 정해놓고 하려 하면 될 것도 안 되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해야 행복한 것 같습니다. mbti 극 N에다가 음악과 술을 좋아하는 저는 전역만 하면 매일 이러고 있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평소완 다르게 오늘은 재즈를 가져와봤습니다. Chet Baker의 That old feeling. 오랜만에 만난 연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다시 만났는데, 예전의 그 좋았던 감정들이 아직 마음 한편에 남아있다는 걸 드러냅니다. Chet Baker의 올드하고 멜랑콜리한 보컬과, 곡 사이에 들어가 있는 트럼펫 솔로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에 충분합니다.

클래식 트럼펫 주자들이 정직하고 일관성 있는 음색을 가지고 있다면, 재즈 트럼펫 주자들은 음색의 스펙트럼이 더 넓습니다. 빠르고 경쾌한 장르에선 호흡근의 힘으로 바람을 세게 밀어서 찢어지는 소리를 더 섞고, That old feeling처럼 Chill 한 노래에선 바람이 입술에서 새는 소리를 살짝 섞어 더 따뜻한 음색을 내죠. 바람을 내보내는 빠르기와 입술의 텐션을 조절해서 곡 분위기에 어울리게끔 음색을 잘 배합하는 겁니다. 마치 블렌디드 위스키처럼요.

That old feeling의 ‘잊힌 줄 알았던 감정의 재등장’이라는 주제는 모두가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도 이 곡이 오래 남았던 것 같네요.

인연은 돌고 도는 것 같습니다. 끝난 줄 알았던 사이가 다시 닿는 일이 꽤나 있습니다. 전 지금 시즌 5에 살고 있는데 종영한 지 꽤 된 시즌 1의 인물에게 연락이 온다거나 말이죠.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되면 궁금해지게 됩니다. ‘대본작가가 이 인물을 왜 다시 등장시켰을까..’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뭐 하고 지냈는지, 못 본 사이에 어떻게 얼마나 달라졌는지 말이죠.

뭐 제 경우엔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옛날얘기나 주야장천 합니다. 그때와는 딴판이 되어버린 사람도 있고, 그때와는 똑같지만 깔이 훨씬 진해진 사람도 있습니다. 뭐가 어찌 됐든, 그렇게 이야기가 잘 통하면 서로의 인생이 다시 섞입니다. 블렌디드 위스키처럼 말이죠. 물론 안 좋게 끝난 경우라면 충분한 숙성을 거쳐야 하겠지만요 하하

또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 이상한 관계에 새로운 이름이 붙을지. 그 이름은 여러분들이 붙이는 겁니다. 그러나 상술했듯 꼭 이름을 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블렌디드 위스키가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술이면 뭐 어떻습니까. 맛만 좋으면 됐지.


#블루라벨, 쓸쓸함이 주는 위로

https://youtu.be/z4 PKzz81 m5 c? si=5 uewsCUjRqD4 MlAH

밤이 깊어질수록 위스키는 그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짙은 황금빛, 천천히 녹아내리는 얼음, 그리고 한 모금 뒤에야 비로소 퍼지는 묵직한 감정.
모든 것이 고요한데, 어딘가 마음속 어딘가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Almost Blue는 꼭 필요한 위로가 되어줍니다.

Chet Baker의 트럼펫은 무너질 듯 조용하고, 그의 목소리는 사라질 듯 낮고 부드럽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누구보다 진실된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 노래의 제목처럼, 그것은 ‘Almost Blue’ 슬픔 바로 직전의 감정.
완전히 무너진 것도, 완전히 담담해진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서 머뭇거리는 마음입니다.

“Almost blue, almost doing things we used to do…”
이별 뒤, 혼자 남아 과거의 그림자를 더듬는 사람의 이야기.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되짚고, 이미 사라진 감정 앞에서 마치 아직 거기 있는 것처럼 혼자 말을 겁니다.

“There's a part of me that's always true, always.”
결국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마음의 한 조각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고백.
그래서 이 노래는 단순한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감정의 온기’를 기억하는 노래입니다.

위스키도 비슷한 순간에 마주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조금은 무겁고, 쓸쓸하고, 그렇기에 거짓 없이 솔직해지는 시간.
말하지 못했던 마음, 끝내 털어놓지 못했던 진심을 묵직하게 삼켜내는 밤.

음악과 술이 꼭 닮았다고 느끼는 건 아마 둘 다, 말보다 조용한 방식으로 위로를 전하기 때문일 겁니다.
Almost Blue를 듣고 있으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나만의 기억과 감정들이 조심스럽게 다시 피어오릅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의 밤에, 무언가를 억지로 해결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 음악은 조용히 속삭입니다.

오늘 하루가 길었든 짧았든, 이 밤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한 잔의 위스키, 그리고 Chet Baker의 속삭임.

Almost Blue.
이 밤에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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