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로 써 내려가는 인간의 감정
오늘도 우연히 이곳에 당도하신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미리 하나만 밝히고 가자면 이 이야기의 끝은 7월 말에 맺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7월 말까지 저희가 가진 음악을 최대한 꺼내보려고 해요. 그 말은? 4악장이 굉장히 길어질 것 같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다른 주제에 갇히는 것보다는 음악 자체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하는 지금이 저희가 가장 즐거운 순간이자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아요.
오늘은 4곡 다 피아노로 연주한 곡입니다.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가사가 없는 음악은 참 가르치기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요소와 작곡가의 생애, 배경, 곡에 대한 이야기 등 많은 것을 버무려서 감상 수업을 진행하고 나면 성취감을 느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어쩌면 언젠가 4명 다 교단에 섰을 때 가장 잘할 수 있는 수업을 미리 텍스트로나마 체험하는 순간이 될 것 같아요. 그럼 지금부터 저희가 들려주는 피아노 이야기로 함께 떠나보시죠!
#죽음의 무도
https://youtu.be/PP0DMgOiFvo?si=vVR_22F03Dljt3yp&t=4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강렬함과, 그 와중에 피어나는 한 줌의 아름다움. 리스트의 죽음의 무도(Totentanz)는 그런 음악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호로비츠의 손끝이 닿았을 때, 이 곡은 더 이상 단순한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경계에서 불꽃처럼 피어나는 한 편의 시가 됩니다.
원곡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 중세의 진혼곡 선율 Dies irae를 중심에 두고 전개됩니다.
리스트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거울삼아 삶을 들여다보았고, 그 끝에서 다시 살아가는 의지를 끌어냈습니다.
그의 Totentanz는 바로 그런 고백이자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자신의 방식으로 손을 얹습니다. 거장의 편곡은 단지 화려한 기교의 과시가 아닙니다. 오케스트라가 맡았던 거대한 구조와 섬세한 디테일을 오직 두 손의 피아노로, 그러나 결코 빈틈없이 되살려냅니다. 그 손끝에서 죽음은 더 거칠어지고, 때로는 더 섬세해지며, 음표 하나하나가 마치 운명처럼 내리 꽂힙니다.
호로비츠 버전의 죽음의 무도는 숨 가쁘게 달려갑니다.
절박한 리듬과 무게감 있는 타건, 그리고 찰나처럼 스쳐가는 여백 속에 삶의 격렬함과 죽음의 침묵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그는 단 한 대의 피아노로, 우리 안에 숨어 있던 고통과 슬픔, 희망과 집착을 모두 무대 위로 끌어올립니다.
무서운 곡이지만, 자꾸 빠져듭니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죽음을 넘어서는 음악입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감정이 이렇게까지 정제되어, 그러면서도 여전히 날것의 감정을 간직한 채 들려온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 끝에서 남는 것은 단지 두려움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어떤 깊은 침묵 같은 감정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단순한 ‘죽음의 무도’가 아니라 삶의 절정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춤처럼 느껴집니다.
황홀하고, 고독하며, 끝내는 숭고하게 남는 음악.
호로비츠는 이 곡을 통해, 죽음 앞에서조차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의 무도는 그렇게, 우리에게 삶의 마지막까지 온몸으로 연주하듯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무도회
https://youtu.be/Fg2i2NB-i3o?si=nnkxjeeZ8Q0W_-K_
“소용돌이치는 구름 사이로 왈츠를 추는 남녀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점차 구름은 흩어지고 왈츠를 추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홀을 볼 수 있다. 장면은 서서히 밝아진다. 이윽고 포르티시모에서 샹들리에의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그곳은 1855년 경 한 황실의 궁전이다.”
위 묘사는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14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쳐 완성해 낸, 대규모 왈츠 “La Valse(라 발스)”에 대한 작곡가 본인의 서문입니다. 라벨은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왈츠라는 장르에 대해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라 발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라벨은 이 곡을 두고 ‘빈 왈츠에 대한 예찬’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빈 왈츠는 통상적인 왈츠보다 2배 빠른, 유쾌하고 우아한 비엔나식 왈츠를 의미하는데요. 그러나 라벨의 라 발스에서는 그 우아함 속에 알 수 없는 오묘하도록 기괴한 분위기가 서려 있습니다.
곡 안으로 같이 들어가 볼까요?
안갯속에서 무도회장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더블 베이스를 비롯한 저음 악기들이 차분하게 3박자 속에서 곡조를 만들죠. 안개를 뚫고 도착한 무도회장의 문을 엽니다. 이제야 선명히 들리는 왈츠 리듬에 맞추어 사람들이 어딘가 어색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왈츠를 추고 있습니다. 언제는 현악이, 언제는 목관이 중심이 되어 우아한 왈츠를 조금씩 고조시킵니다.
노래가 점점 발광하기 시작합니다. 현악과 목관으로 차분히 연주되던 테마가 점점 공격적인 금관악기 소리로 바뀝니다. 알 수 없는 상승기류에 한껏 격앙된 노래는 하이라이트에서 마침내 대폭발 합니다. 이후 무도회장은 광란의 무아지경이 되며, 갑작스럽게 화면이 꺼지듯, 마지막 여섯 음을 뱉고서 마침내 곡은 종료됩니다.
우아한 발레에서 죽음의 무도까지. 아름다운 선율과 기괴한 화성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라 발스는 피아노 버전과 오케스트라 버전이 있는데요. 제가 이 곡을 처음 듣고 반한 건 피아노 독주 버전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곡 중 하나인데요. 후반부로 갈수록 몰아치는 불협화음과 온 힘을 쏟는 하이라이트의 글리산도는 연주자의 연주 모습을 보는 맛도 쏠쏠하게 합니다. 또 오케스트라 버전은 피아노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악기 소리의 디테일을 감상할 수 있는 매력이 있죠. 오케스트라 소리가 무도회 묘사에 더 어울리기도 하고요.
해설과 함께 이 곡을 감상하며 비엔나의 한 무도회장으로 떠나 보세요. 광란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면서요.
#그라나도스+고야=고예스카스
엔리케 그라나도스. 스페인의 국민악파 작곡가 중 한 명입니다. 알베니즈, 파야와 함께 스페인 민족음악을 확립한 인물로 음을 색채적으로 표현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해서 피아노 곡을 많이 작곡했어요. 프란시스코 고야. 스페인의 낭만주의 화가입니다. 18세기 스페인에서 낭만주의를 벗어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화가라고 해요. 파괴적이고 주관적인, 대담한 붓 터치는 인상파의 시초가 되었고 피카소 등 후대의 화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인상파의 시초가 된 한 남자의 그림들을 보고 음을 색채적으로 표현하는 한 남자는 영감을 얻습니다. 스페인의 그림을 보고 스페인의 색을 입힌 피아노 모음곡. 오늘 제가 가져온 음악은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 그중 제5곡 '사랑과 죽음(El amor y la muerte)'입니다. 'Goyescas'라는 말은 'Goya-like'정도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요. 고야의 작품에 대한 3자의 시선을 음악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2권을 시작하는 사랑과 죽음은 말 그대로 사랑과 죽음이라는 두 감정의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두 인간의 운명과 열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정적으로 시작하면서 천천히 고조되는 감정을 보여주는 도입부에서는 감정의 표현과 더불어 프리지어 선법과 마치 기타 선율과 같은 음형을 통해 이 음악이 스페인 음악임을 보여줍니다. 곡의 분위기가 바뀌며 88개의 건반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절정과 그에 따라오는 이별의 고통은 스페인의 정열을 보여주는 듯한 강렬한 리듬의 변화와 헤미올라, 아르페지오가 표현하죠. 그리고 결국 모든 정열은 사라지고 전개되는 느린 템포의 단조로운 리듬, 결국에는 죽음을 암시하는듯한 침묵으로 이 곡은 끝을 맺습니다.
사랑과 죽음. 2가지 감정은 어쩌면 인류를 지배하는 2가지 감정일지도 몰라요. 사랑이 절정을 맞이하면 끝없이 행복해졌다가도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지면, 그 절정이 끝나면 죽음을 찾게 되는 지옥의 쳇바퀴 속에서 인류는 살아갑니다. 개인적인 감상평으로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하자면 그라나도스는 이 곡을 통해 '결국 죽음은 찾아오고 우리의 사랑은 끝이 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열정적으로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당장 찾아오지 않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닌, 지금 이 순간 가장 사랑하고 싶은 존재를 열렬히 사랑하게 해주는 이 음악, 사랑하는 사람과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Piano Concerto No.2
https://youtu.be/y4YqWXmF9Dg?si=EDgxGQfiSjOfTNxO
독일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입니다. 브람스는 자장가와 인터메조(간주곡)로 유명해서 부드러운 소품들만 작곡한 줄 아는 사람들이 꽤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소개해드릴 작품을 들으시면 이제껏 들어왔던 음악과는 규모자체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저번 주 글에 제가 음악은 크게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브람스는 ‘절대음악만 써왔다’ 고 스스로 밝히고, 음악에 이야기를 담는 형식은 피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브람스의 음악은 미친 듯이 화려한 효과와, 따로 스토리가 필요 없을 만큼 아름다운 선율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브람스는 3년에 걸쳐 작곡을 마친 후, 음악적 멘토인 클라라 슈만, 스승인 에두아르트 마르크센, 친구인 테오도어 빌로스에게 이 작품을 “작은 피아노 소품“이라고 적어 보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거대한 4악장 구성에, 50분 분량의 장대한 협주곡이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3악장 구성을 넘어 교향곡과 같은 4악장 구조를 도입한 건, 자신의 음악적 성숙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도 있었습니다.
브람스는 피아노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효과를 내도록 작곡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주 멜로디 외에도 효과음형이 많이 등장하고, 그것이 오케스트라와 맞물려 전개되죠. 저는 특히 1악장을 가장 좋아합니다. 워낙 완성도가 높아, 단악장만 들어도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우주인의 발걸음 같은 호른 솔로로 시작해, 그에 대조되는 맹렬하고 화려한 오케스트라. 그리고 그에 지지 않는 피아노까지. 곡의 규모가 큰 만큼 듣고 즐길 수 있는 거리가 많습니다.
1악장은 제시부-발전부-재현부가 있는 소나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시부엔 인트로와 브람스가 던져주는 4가지 피아노 노래들이 있습니다. 이 노래들의 모습은 다 다르지만 오케스트라가 이 사이를 이어줍니다. 발전부에선 제시부를 조금씩 가져와 변형하고 스케일도 더 커졌습니다. 재현부엔 제시부의 노래들이 다른 조성으로 다시 나옵니다. 재현부는 영화로 따지면 복선이 회수되는 것 같은 느낌이 줍니다.
재현부가 끝나고, 곡의 피날레를 향해 건반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빌드업을 시작합니다. 피날레는 인트로에 나온 호른 솔로 멜로디를 변형해서 같이 연주하는 형태로 나옵니다. 현악기군, 금관악기군, 목관악기군, 타악기, 피아노 모두가 말이죠. 이보다 더 벅차오를 수가 없습니다.
첨부 영상 기준 6:56~8:56이 곡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시부의 코데타(작은 클라이맥스)로써 이 부분은 나중에 재현부에서(첨부 영상 기준 14:39~16:44) 다시 등장합니다. 절뚝절뚝 저는 스윙리듬, 떨어지는 별똥별 같은 하행 아르페지오, 큰 도약을 기반으로 쓰인 절절한 멜로디가 이목을 사로잡습니다.
너무 큰 규모 때문에 듣기 막막하시다면, 한 악장씩 따로따로 들으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제가 추천해 드린 1악장만 들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 작품을 듣고 나면 브람스의 자장가가 새롭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