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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4악장 : 음악 그리고 음악 그 자체 2

이런 음악도 한번 들어봐요

by 오록

오늘도 우연히 이곳에 당도하신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저번 주에 이어서 오늘도 음악 그 자체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번 주에 가져온 곡들은 좀 어려운 곡들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나름대로 고민을 해서 가져온 곡들이기 때문에 일단 한번 잡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취향에 맞지 않는, 또는 생소한 장르를 들어보는 경험은 나만의 '음악 알고리즘'이 확장되는 경험이 될지도 몰라요. 학창 시절 수업시간에 클래식을 들었던 경험, 20대가 되어 처음으로 위스키 바에 가서 들었던 블루스나 재즈, 길거리에서 들리는 K-pop 등 세상에 나쁜 음악은 없을 것입니다.


주제도 음악 그 자체, 정해진 형식 없음, 장르의 제한 없음. 저희가 4악장을 구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3가지예요. 이번 악장 이야기는 여러분들에게 다양한 음악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보자!라는 취지로 중구난방, 두서없는 음악 추천 이야기를 계획했어요.


조금 어렵더라도, 취향에 안 맞더라도 뜻밖의 명곡을 '디깅'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음악 그 자체에 흠뻑 빠져보시죠!

#Nevertheless

https://youtu.be/m6TYnXfG7w4?si=MXe3F8optHPbI3rI

Daniel Caesar의 ’Valentina‘라는 곡입니다. 고등학교 친구의 추천으로 알게 된 노래입니다. 제게 항상 영감을 주는 친구인데 노래를 추천해 주더라고요. 냅다 들어보니 스트레스가 확 내려가며, 새벽 3시에 불 꺼진 방 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사 내용이 다소 충격적입니다. 이미 연인이 있는 여자 발렌티나, 그리고 발렌티나를 꼬시려고 하는 화자의 시점입니다. 발렌티나의 남자친구는 화자만큼 발렌티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느니.. 발렌티나의 눈을 처음 본 순간부터, 발렌티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 궁리를 하고 있다고 직접 드러냅니다. 다행히도 특정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곡은 아니고, Daniel이 동생이 만든 비트를 듣고 바로 떠오른 내용을 가사로 쓴 거라고 하네요. 인터뷰에서는 “동생의 아이디어를 함께 다듬었다”라고 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런 장르의 노래는, 앞서 소개한 노래들과는 다르게 가사를 그렇게 음미하면서 듣지 않습니다. 현생에 치여서 머리가 너무 아플 때 손이 먼저 가는 곡입니다. 그냥 Chill 한 비트를 들으며 가로등이 켜진 보도블록으로 나갑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먼 산을 바라보는 게 제 힐링 방법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한참 동안 뇌를 포맷하고 나면 다시 기분이 괜찮아지곤 합니다.

다들 어떤 날은 하루가 너무 무거울 때가 있잖아요. 근데 굳이 위로받기는 귀찮고 혼자 있고 싶을 때 말이에요. 그럴 때 이 곡을 틀면 마음이 잠깐 절전 상태가 되는 것 같아요. 쉽게 쉽게 흘러가는 가사와 비트에 나를 실어 보내는 기분이에요. 저도 제가 누구인지 잠깐 잊고 싶은 순간에 이 음악을 듣는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어떤 타입이신가요. 짝사랑을 하시는 분들 중 일부는 다 듣고 나면, 노래가 말하는 사랑에 동의하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저처럼 어스름한 밤에 듣는 노래로 남을 수도 있고요.


#19

https://youtu.be/H6l1BQd-4pw?si=srJBCOzsSIwwYSVI

Rob Araujo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건반 위에서 누군가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힙합과 네오소울, 퓨전, 프로그레시브 R&B의 언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갑니다. 정통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그의 사운드에는 클래식한 깊이와 현대적인 감각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Nineteen〉은 그의 곡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제목 그대로 열아홉이라는 나이를 떠올리게 하죠. 불안정하지만 감각이 가장 예민하게 깨어 있는 시기, 완전한 어른도, 아이도 아닌 경계의 시간. 어쩌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었던 그런 나이.

이 곡은 처음부터 낯익지 않습니다. 화성은 복잡하고, 리듬은 어긋나 있으며, 멜로디는 자꾸만 돌고 돕니다.
어딘가로 나아가려는 듯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어느 순간엔 그 자리에 멈춰 선 듯한 기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자꾸 다시 듣게 됩니다.
이해보다는 감각이 먼저 반응하는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이루는 피아노 위로, 드럼과 베이스, 신스 패드가 쉴 새 없이 변주하며 레이어를 쌓아갑니다.
재즈의 즉흥성과 전자음악의 섬세한 디자인이 함께 공존하고 있고, 중간중간 삽입된 리듬 브레이크는 마치 숨을 멈췄다 다시 쉬는 것처럼 짧지만 인상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Rob Araujo의 음악은 때때로 ‘침대 위에서 만들어진 퓨전 재즈’라 불리기도 합니다. 그의 곡은 정제된 스튜디오보다는, 노트북과 헤드폰, 그리고 새벽의 자기 방에서 탄생한 듯한 친밀함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듣는 이의 마음 깊은 곳까지 자연스럽게 스며듭니다.

〈Nineteen〉은 그런 Rob Araujo의 특징이 가장 잘 담긴 곡입니다. 불완전한 화음으로 가득 찬 시절, 그러나 그 불안정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한 에너지. 그건 우리가 모두 한 번쯤 지나온 나이기도 하고,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Rob Araujo는 그 모든 감정을 음악으로 증명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살아 있다고 느껴졌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지금도 여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멜로디와 함께 천천히 걸어가는 중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는 듯합니다.


#피아노로 노래하는 잔잔한 빗소리

https://youtu.be/ectmLY1703k?si=wm7QaYfdpqx5cmc-

이번 주말엔 비가 왔습니다. 슬슬 장마철이 시작되려나 봐요. 비가 오면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차분해지고 조용해지는 듯합니다. (그냥 기운이 없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요.) 오늘 제 곡은, 포근하고 조용한 실내에서 창밖의 비를 보며 감상하기 좋은 곡이에요.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 2악장입니다.

경쾌하고 익살스러운 1악장이 한바탕 지나간 후, 빠른 음악이 훑고 사그라든 자리엔 여운처럼 조용한 피아노 솔로만 남아 있습니다. Adagio assai(아주 느리게)라는 부제이자 빠르기말을 가지고 있는 이 악장은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수 분동 안 느리디 느린 왈츠풍의 차분한 멜로디를 홀로 읊조립니다.


약 3분여의 명상과 같은 독주 끝에 플룻을 시작으로 오케스트라가 조심스럽게 합류합니다. 피아노의 명상을 혹여나 깨울까, 언제 들어온 지도 모를 만큼 조심스럽게요.


그러고는 이 느린 박자 안에서 함께 노래하다 오케스트라는 다시 사그라듭니다. 중간중간 주인공은 플룻이 되기도, 잉글리시 호른이 되기도 하지만, 역시 피아노의 조용한 트릴로 마무리함으로써 본인이 이 악장의 주인공임을 소극적으로 어필합니다.

모리스 라벨은 프랑스 인상주의의 대표적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그의 말년인 1931년에 이 곡을 작곡•초연하였습니다. 특징으로는 인상주의의 선두주자다운 오묘한 멜로디와 재즈적 색채가 있어요.
1악장과 3악장은 정말 경쾌하고도 복잡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1악장은 Allegramente(즐겁게, 쾌활하게), 3악장은 Presto(매우 빠르게)라는 빠르기말을 가지고 있어요. 협주곡의 특성상 화려한 악기 구성과 음형, 기교를 보여주는 게 보편적이기도 하죠. 그 사이 태풍의 눈과 같은 2악장은 이 모든 분위기를 따뜻하게 가라앉힙니다. 마치 바쁜 일상 속에서 차분히 내리는 조용한 빗소리 같아요.

여러분은 비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비라는 날씨를 달가워하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 같아요. 습하고 눅눅한 공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할 일을 계획대로 못 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장 지금까지도 바쁘게 살아온 당신에게, 비처럼 이 음악처럼 여러분을 가라앉히고 위로해 줄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나요.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이 음악을 듣는다면, 마침내는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된다면. 이 노래가 뜨거워진 여러분에게 단비 같은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걸로 저는 만족할 것 같아요.


#모든 것을 엄히 다스리시도다

https://youtu.be/ZjfN7m9Ow8o

오늘 다룰 장르는 '장송 미사곡'입니다. 왜냐고요? 그냥 제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의 장르가 장송 미사곡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룰 음악의 작곡가는 주세페 베르디에요. 베르디는 낭만주의 시기 이태리 오페라의 대 작곡가 계보를 형성하는 작곡가로 평가받습니다. 성악 전공인 저에게는 저에게 '리골레토'라는 작품을 통해 많은 공부를 하게 하고 성장시켜 준 고마운 인물이기도 하죠.

베르디가 작곡한 '장송 미사곡', 그리고 오늘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제가 오늘 가져온 클래식은 베르디 레퀴엠 중 '진노의 날'입니다. 레퀴엠이라는 장르 중 가장 유명한 곡을 꼽으라면 아마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떠오르실 겁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그것만큼 베르디의 레퀴엠도 완성도 높은, 잘 짜인 장송곡이에요.

베르디 레퀴엠의 특징은 크고 방대한 규모에 있습니다. 그리고 방대한 규모 위에서 독창-중창-합창을 넘나들며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합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베르디는 죽음을 앞둔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벗어나기 위한 호소를 자신의 레퀴엠을 통해 사람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진노의 날만 가져와서 모차르트와 베르디의 레퀴엠의 제 개인적인 감상을 비교하자면 모차르트의 진노의 날은 마치 예언자들이 '곧 너희들은 처벌받을 것이다.'라는 느낌을 주는 느낌, 베르디의 진노의 날은 결국 그날이 다가와 처벌을 내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너희들은 도대체 왜 그런 거야!'라는 느낌을 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라틴어 가사를 살펴볼까요. '진노의 날, 다윗과 실비아의 예언대로 모든 것이 재가 되리라. 심판자는 심판을 위해 내려오고, 모든 이는 두려움에 몸을 떨게 되리라.'라는 진노의 날에 걸맞은, 어쩌면 잔인한 가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부속가, 모차르트, 그리고 베르디까지 오래전부터 이 가사는 음악에 사용되곤 했습니다. 물론 부속가 진노의 날 전문을 살펴보면 결국 진노의 날에 죽은 이를 가엾게 여겨달라고, 제 기도를 들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지만 저런 가사를 사용한 데에는 어떤 시대든 사람의 생각이 다 똑같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온갖 선악이 돌아오는 날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내가 한 행동은 돌아온다. 어느 시대던,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던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최근 많은 고민을 하면서 이 음악을 자주 듣게 됐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은 하나예요. '시간이 지나면 나의 가치를 언젠가 알아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저에게 주어진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 해보려고 합니다. 당장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힘들고 고독하더라도요.

여름이 시작되면서 지치고 피곤한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오늘 하루는 신의 분노를 상징하는 이 음악을 들어본 후 스트레스를 다 날려버리는 것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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