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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4악장 : 음악 그리고 음악 그 자체 3

귄록루역의 보석함 개방

by 오록

오늘도 우연히 이곳에 당도하신 여러분들 환영합니다:)


오늘도 별다른 주제 없이, 그저 음악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글을 준비하면서 넷이서 한 이야기가 있어요.

이번 주 곡 선정을 할 때는 '도대체 이런 곡은 어디서 찾아온 거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들을 꺼내오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신기할 정도로 다양한 장르들이 이번 주 이야기에서는 등장할 것 같습니다. 부디 오늘의 음악 오마카세도 취항에 맞길 바라며,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도망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해

https://youtu.be/6iJcuUcH5gs

음악에는 여러 가지 순기능이 존재합니다. 편안한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보고 듣는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죠. 하지만 요즘 저에게 음악은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 같아요. 하루 일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육과 평가, 그리고 개인 공부에서 벗어난 후 듣는 음악들은 저에게는 하루를 벗어던지는 마무리를 해주는 소중한 친구입니다.

그래서 요즘 자주 손이 가는 친구가 펑크 락인 것 같아요. 간단하고 명료한 리프 아래 깔리는 파워코드, 반항적인 가사와 음악의 구성은 저를 도망치고 싶은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 줍니다. 먹고살려면 도망칠 순 없으니까, 난 이 모든 것을 포기할 용기는 없으니까 잠시나마 일탈을 음악을 통해 방구석에서 하는 거죠.

오늘 제 보석함에서 가져온 음악은 밴드기린의 '도망쳐'라는 곡입니다. 요즘 음악들은 정확한 장르를 정의하기 힘들고 저는 이 밴드의 음악이라곤 '도망쳐' 한 곡만 들었기 때문에 100% 장담할 순 없지만, 이 음악도 아마 펑크 기반일 것 같아요. 근데 밝고 신나는 팝 분위기를 곁들인.

이 음악의 특징이라면 펑크스러운 악기 위에 놓인 보컬의 음색과 가창이 정직하다, 그리고 가사가 희망적이라는 점입니다. 제목을 '도망쳐'로 박아두었지만, 그리고 악기는 펑크 락스러운 분위기를 풍기지만 가사는 결코 펑크스럽지 않아요. 아마 제가 펑크 곡을 쓰면서 제목을 '도망쳐'로 했다면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근데 그냥 살긴 싫어.'이런 풍이 었을 것 같은데 이 노래는 '내가 도망치는 이유는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야! 난 앞만 보고 다시 달려갈 거야!'라는 소년만화스러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전달은 요동치는 음악을 통해 더 극적으로 전개됩니다. 보컬이 빠지면 휘몰아치는 악기들의 연주, 예측할 수 없는 곡의 형태는 감정적 고조보다는 해방감을 선사해요. 이 곡을 듣는 3분 52초 동안은 아마 세상을 내가 다 씹어먹을 수 있다는 이유 모를 자신감에 휩싸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주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오늘, 정말 잠깐이라도 숨을 쉬고 싶을 때, 밴드기린의 '도망쳐'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귀로 듣는 풍경

https://youtu.be/s03-MWHEPGA?si=84uLiQAVwrc06OGM

음악은 크게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절대음악은 곡에 특정한 줄거리가 있거나 상징적 이야기를 표출하지 않고, 오로지 음과 음의 관계를 통해 예술성을 표현해 내는 음악입니다. 반대로 표제음악은 작곡가가 그림이나 소설 등 다른 예술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을 했거나, 곡 자체에 줄거리가 있는 음악을 일컫습니다.

표제음악은 작곡가가 걸어놓은 줄거리 때문에 해석하는 데에 방향이 정해져 있지만, 절대음악은 그렇지 않습니다. 연주자나 감상자가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갈 수 있는 것이 절대음악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가져온 핀란드의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의 4개의 서정적 소품도 절대음악에 속합니다. 시벨리우스도 작곡이 끝난 후에 분위기나 느낌으로 제목을 붙이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즉, 각 곡은 특정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고, 듣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위해 지어진 ‘감성의 풍경’ 같은 곡들입니다. 그러나 클래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절대음악을 해석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제가 느꼈던 이미지로 스토리텔링을 해드리겠습니다. 소품이라 러닝타임이 길지 않아 쉽게 따라오실 수 있을 겁니다.

1번 - Eklógue (목가적 시편)
당신은 나그네입니다. 눈이 쌓인 밤의 숲 속에서 길을 헤매고 있습니다. 바람은 불지 않고, 눈도 그쳐서 날씨가 그리 나쁘진 않습니다. 시간이 늦어 이제 쉬어갈 곳이 필요하던 찰나, 하늘에 보이는 무수한 별들과 오로라가 길을 알려주는 것만 같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 보니 나무로 된 오두막이 하나 있습니다. 안에 노랗게 불이 켜져 있고 굴뚝에선 연기가 납니다. 누가 저녁밥을 짓고 있는 모양입니다. 당신은 그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합니다.

2번 - Sanfter Westwind (부드러운 서풍)
집주인은 당신을 환영해 줍니다. 빨간 체크무늬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수염이 덥수룩한 나무꾼입니다. 말동무가 필요했던 참이라 반가웠답니다. 저녁을 준비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랍니다. 목재 욕조에 담겨있는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이니 살 것 같습니다. 세신을 마치고, 짐을 마저 정리하고 식탁으로 향합니다.

3번 - Auf dem Tanzvergnügen (무도회에서)
식사는 별 게 없었습니다. 따뜻한 빵 한 덩이와 크림수프, 그리고 벽난로에서 끓인 따뜻한 캐모마일 차 한 잔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갈 곳 없던 나그네의 속을 달래기엔 충분했습니다. 식사를 하며 나무꾼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무꾼은 내일 일을 하려면 어서 자야 한다고 2층으로 올라가 잠에 듭니다. 당신도 오늘 여정이 피로했는지 자꾸만 눈이 감겨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4번 - Im alten Heim (옛 집에서)
동이 트기 전에 눈이 떠졌습니다. 하늘이 검은색에서 짙은 푸른색으로 바뀌었습니다. 해가 곧 뜨려나 봅니다. 나무꾼은 아직 자고 있고 당신은 슬슬 떠날 채비를 합니다. 어제 마신 캐모마일 차가 머리맡에 차갑게 식어있습니다. 불은 켜지 않은 채로, 나무꾼이 내어준 방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봅니다. 대접해 주어 고맙다는 편지를 남기고 문을 열고 나갑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칩니다. 하늘은 조금 노랗게 변했지만 아직 달이 떠있습니다. 다시 눈이 덮인 벌판으로 발걸음을 뗍니다.


#이름이라는 이야기

https://youtu.be/waKm6T5rMxU?si=-n6IDPXvo4IbUsW4

‘이름’이란, 어떤 대상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붙이는 말이라고 합니다.
국어사전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1.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붙이는 말.
2. 사람의 성이나 성과 함께 불리는 호칭.
3. 명예나 체면 따위를 이르는 말.

말 그대로 이름은 어떤 존재가 존재한다고 증명해 주는 첫 번째 징표입니다.
누군가를 부르고,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한 가장 단순하고도 강력한 방식.
하지만 가끔은, 그 이름이 문득 낯설어질 때가 있습니다.
분명 자주 불렀던 이름인데, 어느 날 문득 입안에서 미끄러지고 맙니다.
amazarashi의 〈名前〉는 바로 그런 순간에서 출발합니다.

“너의 이름이 뭐였더라?”

이 질문은 단순히 누군가를 떠올리기 위한 말 같지만,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쩌면 나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세상에서 불리는 수많은 이름 속에서 진짜 ‘나’는 어떤 이야기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에 우리는 모두 수많은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학생, 친구, 동료, 딸, 혹은 어떤 사회적 역할.
그 이름들은 때로는 우리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 안에 나를 가두기도 합니다.

amazarashi는 말합니다.
별명이나 직함, 타인의 기억으로는 누군가를 온전히 알 수 없다고.
이름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는 우리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감정의 층을 조용히 파고들며, 불려진 이름이 아닌 살아낸 이야기의 무게에 대해 노래합니다.

나이가 들고, 위치가 바뀌고, 역할이 달라지면 사람은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지만 그 중심에 있는 ‘나’는, 사실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이 노래는 그래서 계속해서 되묻습니다.
“지금 너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니?”
“그 이름이 진짜 너를 설명해 줄 수 있니?”

〈名前〉는 결국 우리를 자기 자신에게로 데려다 놓습니다.
정말로 중요했던 그 이름 하나.
누군가 불러줘서가 아니라, 내가 살아온 방식을 통해 증명한, 말 없는 이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쓰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 이야기가 곧,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붙인 진짜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이 노래를 듣고 나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부르든, 나는 나만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구나.

그 이름은 아직 다 쓰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써 내려갈 나라는 이야기의 제목인 것 같습니다.


#나 그대에게 스며드오

https://youtu.be/TTI6kBGADYI

김동률이라는 가수를 모르는 사람은 많이 없을 거예요. 저처럼 고음이 힘든 남자를 위한 중저음 가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음색과 느낌을 살리기가 더 어려운, 아주 매력적인 중저음을 가진 가수이죠. 저보다 윗 세대 분들은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김동률의 여러 히트곡들에 숨겨진 보석 같은 명곡들이 정말 많아요. 특히 초창기의 김동률은 재즈 화성의 반주 또는 오케스트라 구성의 반주를 많이 사용했는데요. 오늘의 제 곡은 그런 재즈맨 김동률의 천재성과 감성이 돋보이는 노래예요. 가수 김동률의, “청원”이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2004년 김동률이 버클리 음악대학 졸업 후 발매한 정규 4집 앨범 ”토로”의 수록곡 중 하나입니다. “이제서야”, “잔향” 등 여러 명곡들을 담은 명반인데요. 이 “청원”이라는 노래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처음 들었을 때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던 노래입니다.
도입부부터 메인 테마처럼 계속 등장하는 하행 선율, 그리고 선율을 꽉꽉 채워주는 수려한 재즈 화성이 돋보입니다. 제가 서론에서 김동률은 재즈와 오케스트라를 반주로 많이 사용한다고 했는데요. 처음 1절은 서정적이고 세련된 피아노 반주만으로 노래를 받쳐 주다가 문득 노래가 밝은 장조풍으로 바뀝니다. 그리고는 현악과 플루트 소리가 고조되며 이내 웅장한 교향곡을 듣는 듯한 상승감을 선사하죠.


‘청원’이라는 제목은 누군가의 삶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는 화자의 바람을 한 단어로 담았습니다. 김동률의 가사는 소리 없이 읽기만 해도 잘 쓰인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은 만족감이 들어요. 특히 이 노래에서 쓰인 하오체는 화자의 애절함을 더 부각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 노래는 보컬을 전공하는 후배에게 처음 소개받은 노래입니다. 피아노 코드가 너무 예뻐서 제가 먼저 제목을 물어봤었죠. 김동률은 저만 아는 가수는 아니지만, 유명한 가수의 히트곡들 사이에 살며시 숨어있는 명곡을 하나 소개해봤습니다. 가사를 음미하며 눈을 감고 한 번 감상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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