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탕을 무서워했던 때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사실 들어가기 꺼려지니까 꼭 과거형만은 아니다.
아아 , 냉탕을 무서워하는 거지, 목욕탕을 무서워하는 건 절대 아니다.
한창 목욕탕 마니아였던 초등학생시절.
그렇게 매번 엄마한테 손목 붙잡혀서 온몸이 박박 벗겨져도,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걸 옆에 모르는 아줌마가 꺄륵 웃으며 놀리더라도,
갈 때마다 설레고 기분 좋은 곳이 대중목욕탕이었다.
따뜻한 온기가 폴폴 올라오는 여러 가지 온탕들이 옹기종기 놓여있고 그 주변에는 좌식 샤워기를 이용할 수 있는 자리가 주르륵 배열되어 있다.
탕에 들어가 있을 때 잘 보이는 자리 (쟁탈전이 심했을 시기라 탕에 들어앉아 우리 자리가 뺏기지 않게 감시해야 하는 목적이다.)를 신중하게 스캔하고 마무리하고 나오려는 아줌마를 쏜살같이 찾아내 그 뒤에서 알짱거리면 된다.
한창 대중목욕탕의 인기가 절정(?)을 찍을 때가 있었다. 엄마랑 찢어져 각자 한 바퀴, 두 바퀴를 돌아도 도무지 자리가 날 것 같지 않을 때에는 최후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이 감성을 더 좋아했다.)
바로 온탕을 둘러싸고 있는 회색 연석 같은 돌 위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오히려 이 자리를 더 선호하는 마니아 할머니들도 많았고 ( 그 돌이 꽤 거칠어서 각질 제거에 용이한 이유였지 않나...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등 뒤는 뜨끈한 온탕 열기가 올라오고 양쪽에는 엄마와 할머니가 나를 바라봐준다. 그렇게 폭 사이에 껴서 나란히 앉아 목욕했던 그 추억 때문인지 나도 은근 이 자리를 좋아했다.
한쪽 손으로는 작은 바가지를 들고 힘껏 뒤로 뻗어 온탕의 물을 퍼올리고
묵은 때를 시원하게 씻어내는데, 생각해 보면 남들 다 몸 담그던 탕 물을 내 몸 위에 부은 것이니
이게 세척의 의미가 있나 싶긴 하다. (그래서 엄마는 싫어했다는 걸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다.)
아무튼 그렇게 온탕 주변은 사람도 북적이고 , 보글거리고, 따습고 밝은 기운이 가득이다.
근데 왜.
왜 냉탕은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만든 건가...?
탕 차별도 아니고 콘셉트가 너무 극과 극이라 현기증 난다. 난, 냉탕이, 무섭다.
냉탕은 사람들과 온탕으로부터 저어 멀리 존재한다.
옹기종기 중앙에 모여있는 온탕과는 다르게
항상 벽 끝에 , 그것도 혼자 가장 크게 있다.
나는 냉탕을 '외로운 심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신비롭고 무시무시한 존재 같았다.
냉탕의 용도는 주로 이러했다.
갓 사우나에서 나와 쉬익 쉬익 열기를 뿜어내는 어른들은 곧장 냉탕으로 걸어가
난간에 항상 올려져 있는 미니 바구니로
그 차가운 물을
그 얼음장 같은 퍼어런 물을 거침없이 퍼올려 본인 몸에 뿌렸다.
그럼 치이익- 하고 몸에서 연기가 포릇포릇 피어올랐다.
혹은 "솨아아아아아아가악" 괴성에 가까운 물폭포? 물폭탄? 물대포? 같은 거에
굳이 굳이 들어가 몸을 사정없이 패버리는 사람도 많았다.
주로 할머니들이 많았는데, 한 번 도전했다가 몸에 구멍이 생길 뻔해서 다시는 사용하지 않았다.
' 헉! 뭐야. 괜찮은 건가?'
비교적 현저히 이용객이 적은 냉탕은 열기를 식히거나, 마사지를 하다가 사라졌다.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가 물 한번 얻어먹고 다시 갈길을 가듯. 무서운 사람들( 몸에 연기를 뿜어낸다던가, 몸에 구멍을 내려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무서운 곳. 아무나 들어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이 강했던 어린 나이의 나는
온탕에서 몸을 불리면서
바깥쪽으로 몸을 돌려 난간 부분에 기대어 냉탕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 냉탕은 어떤 곳일까?'
가끔 내 또래의 애들도 냉탕에서 바가지 두 개를 포개어 잡고 킥판처럼 발차기연습을 했다.
- '에..? 쟤네 들어간 거야...? 대단해..
... 수영장 같은 곳인 건가...?'
일찌감치 수영을 배웠던 터라 냉탕이 '까만 심해'가 아니고 사실은 '수영장'이었다면!
나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해볼 만했다!
오케이. 들어가 보는 거야.
- - - - -
냉탕의 이용객 분석과 끝없는 관찰에도 내가 쉽사리 도전하지 못했던 이유.
또래 애들 덕에 용기를 얻고 들어갔다가 사다리에 발만 담그고 후다닥 온탕으로 뛰어든 이유.
바로 냉탕의 색깔 때문이었다.
꼭 짙은 파랑, 남색, 거의 검정에 가까운 타일을 섞어가며 만든 냉탕 내부와 외부는
마치 심해 속 발 밑에 뭔가 알 수 없는 생명체가 나를 덮칠 수 있을 거 같다는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니 , 그 이상일지도.
( 심지어 벽에는 상어, 고래 같은 커다란 수상생물 캐릭터 이미지를 대문짝만 하게 붙여놓은 곳도 있었다. 아니 왜 ㅠㅠ 안 그래도 안에 뭐 있을 거 같은데 진짜 있다고 알려주는 건지 뭔지 ㅠㅠㅠㅠㅠ엉어우ㅜㅜ)
성인이 된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한다. 나름 냉탕 인테리어? 였겠지.
그렇지만 덕분에 그 이후로 온탕에서 구경하던 습관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아니 , 왜 , 냉탕은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만드는 거야!
너무 까맣고, 너무 차갑고, 너무 깊다.
근처에만 가도 한기가 느껴진다.
이건 뭐 얼음으로 만든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대체 어디까지 발을 내딛어야 하는지 모를 정도로 끝도 없이 내려간다.
내 발은 까-만 심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마침내 발 끝에 무언가 닿았을 때! (바닥이다.)
"아악!!! 뭐가 날 물었어!!!!!!!!!(바닥이다.) " 혼미백산 들어가던 속도의 몇 배의 빠르기로 탈출한다.
...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보글보글하고, 뜨끈하고, 알록달록 타일바닥이 있는 온탕이 그리워진다.
당장 달려들어가 안정을 취한다.
그렇게 몇 번이고 나와의 사투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패배했고,
모든 사투를 이기며 살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 순간 나의 패배를 영원히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대중목욕탕에 가는 빈도수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나의 냉탕 도전기는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냉탕의 색깔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온도, 습도, 소리, 깊이.. 모든 감각들이 까만 푸른색의 물속과 합쳐지면서 공포가 배로 뛰었다.
여전히 무섭고, 앞으로도 무서울 것 같은 냉탕.
관련 이미지를 같이 넣으려고 ai로 생성했다가 지금 심장이 너무 뛰고 온몸이 차갑다..
ai.. 사진 잘 만드는구나...
심신안정용으로 귀여운 이미지도 함께 첨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