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구르다 2025, 경칩 편
차와 사람과 이야기 09
: 김시습 金時習
내가 살면서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그래서 당신은 왜 그걸 공부하시나요?”다. 대학교에 다닐 적에는 동아리 활동을 할 때도, 소개팅을 나가서도 그 질문은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인문학에 관심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외국 문학을 공부하는 일이 외국어를 학원에서 배우는 일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문학이라고 하면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는 공부하고 생각하기 일쑤였는데, 그래도 내 누이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누이에 대해서는 철학관을 열어서 도사가 되려는가 보다는 의견도 꽤 많았으니까. 외국 문학을 공부하면 대체 뭘 하는 거지? 그들의 질문에 대해 내가 늘 했던 대답은 고작 문학과니까 문학을 하지. 이것은 과연 대답이었을까 아니면 회피였을까. 어쨌건 나에게는 꼬치꼬치 성의 있게 대답하는 일이 너무나 아득했다.
지금 사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외국 문학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찻일과 차 공부가 대다수의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뻔하다. 아무 생각 없음에 가깝지 않을까. 그들에게 내가 하는 일과 내가 하고 싶은 공부의 당위성을 설명해야 할 이유는 아무 데도 없지만 그런 질문은 늘 곁에 존재하고, 답해야 하는 입장의 난처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차가 뭐 공부할 게 그리 많나요?” 그렇다고 대답하면 이어지는 답은 “하긴 그렇죠. 차 종류가 워낙 많으니까 그거 다 마셔보고 외우려면 힘드시겠네요.” 그들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듣고 싶은 기색도 없고, 처음부터 귀담아듣기 위한 질문도 아니었던 셈이다.
동아시아의 문화사에서 차는 언제나 정신적으로 가장 앞선 세계를 탐구하는 자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지난 세계를 오늘의 거울로 삼아 앞으로 다가올 세계의 그림을 가장 먼저 그리는 자들이었고, 그 천 년여의 세월이 반복해서 가르치는 영역은 지극히 인간 그 자체를 깊이 바라보는 탐구였기에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건 문학이 했던 몫과 다르지 않고, 차문화는 그래서 문학과 떨어질 수 없다. 차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글(文)이 되어야 한다는 어느 차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여기서 글은 단순히 문장력 혹은 글 본새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김시습은 유학자로 활동할 때는 매월당(梅月堂)으로, 승려로 활동할 때는 설잠(雪岑)이라 불렀으며, 도교 수행자가 되었을 때는 청한자(淸寒子)가 되었다. 그가 우리나라 차문화사 천오백 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차를 많이 마셔서? 차 기록을 많이 남겨서? 남긴 글의 수준이 뛰어나서? 인문학에서 상상력은 아주 중요한 능력이지만 거기에는 동의와 공감을 위한 근거와 논리가 있어야 하니, 저들은 훌륭한 차인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그 반대가 될 수는 없다. 김시습은 세 가지 업을 모두 멋지게 해내었고 그 면모가 차를 통해 잘 드러났다. 그에게 차는 수양(修養)을 위한 재료고, 정진(精進)의 거울이었다. 양생(養生)의 도구기도 했다. 나에게 질문했던 그 사람들이 김시습에게 비슷한 질문을 한다면 그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조선 초의 유학자 김수온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평안도에서 유랑하던 김시습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유학을 버리고 묵도로 돌아가니 이 마음인가?
도는 물 외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네
두 길의 끝을 알고자 한다면
바라건데 논어와 맹자를 자세히 더듬어 보길.”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갈래는 다르지만, 오직 마음을 기르는 것뿐
마음 기르는데 부질없이 달리 찾을 필요 없네
다만 일에 막힘이 없어야 하니
어쩌자고 술지게미나 뒤적이고 있으랴.”
황현산 교수는 옛날 수업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문학의 효과는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삶의 안팎에 퍼져 있으나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적고, 그 효과가 어디서 오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적다고. 외국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철학을 공부하거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고문서를 뒤적이고 발굴지의 흙을 털어내는 사람도, 차를 통해 인간을 생각해 보려는 나같이 별난 사람에게도 나름의 뚜렷한 길이 있고, 사실은 당신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2025년 3월 5일,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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